되찾은 뒤마 장군에 대한 기억

로마에서 온 편지

2021-10-29     안세실 로베르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편집장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 장군과 우루과이의 혁명가 안드레아 아기아르, 로마의 국립기록보관소, 파리 17구 시청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지난 6월 14일, 로마에 있는 이탈리아 국립기록보관소에 모였던 국회의원들과 역사학자들,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답변은 간단하다. 뒤마와 아기아르는 둘 다 미천한 출신에, 공화주의자이며 이탈리아인의 정서를 지녔다. 로마에서는 지아니콜로 대로에 아기아르의 흉상을 세울 계획이고, 파리 17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손에 녹았던 뒤마 장군의 동상이 다시 세워질 계획이다.

뒤마 장군은 당시 이미 ‘나폴레옹’으로 더 잘 알려진 보나파르트 장군을 떠난 뒤 나폴리-부르봉 왕가의 명으로 투옥됐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삼총사>의 저자인 그의 아들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로마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가리발디(주세페 가리발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헌신한 군인-역주)에게 무기를 전달한 소설가 뒤마도 잊지 않고 있다. 로마-센트로 무니치피오(Municipio de Roma-centro, 로마의 행정구역명)의 사브리나 알폰소 구청장은 파리 17구의 조프루아 불라르 구청장을 초대해, 양 도시에서 진행 중인 두 역사적 인물의 동상 건립 계획을 축하하고, 문화계와 학계 학자 및 종사자들과 함께 양국의 정치·문화사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친구들 모임(Société des amis d’Alexandre Dumas)’이라는 단체의 조슬린 피오리나 사무총장은 알렉상드르 뒤마에 대한 애정으로 역사 애호가가 됐다고 했다. 그는 바티칸 경찰 기록 보관소에서 뒤마 장군의 기록을 가져왔다. 당시 교황청의 시각에는, 공화주의자인 뒤마 장군은 위험인물이었다. 피오리나 사무총장은 또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배신’을 강조했다.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배신했고,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탈리아 기록보관소의 안나 부지 소장은 1789년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자유의 바람과 국경을 넘어서 군주제를 타도하고 자유 안에서 프랑스처럼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투쟁했던 이들의 형제애 정신을 언급했다. 프랑스 대사관에서는 플로랑스 페랑 과학·대학 협력 담당관이 참석했지만, 전체 행사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동 행사의 의미를 높이 산 리카르도 바레라 우루과이 대사는 마리엘라 크로스타 공사참사관과 함께 참석했다.

파리 17구 구의회에서는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뒤마 장군의 새 동상 건립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행사에 참석한 불라르 구청장은 뒤마 장군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최초의 서인도 제도 출신 장군이며, 프랑스 혁명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토마 알렉상드르 다비 드 라 파유트리는 타란토에서 이탈리아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기 전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불라르 구청장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끊어진 두 개의 노예 사슬

파리 17구에는 자유 프랑스(1940년 런던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 장군의 주도로 성립된 망명 정부-역주)의 영웅인 조르주 카르투 장군의 이름을 딴 카르투 장군 광장(Place du Général-Catroux)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뒤마 장군과 그의 아들과 손자(『La dame aux camélias 동백꽃 여인』의 저자) 동상이 있어서 ‘세 뒤마 광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혁명가 제복을 입고 있던 청동으로 만들어졌던 뒤마 장군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을 중시했던 독일군이 녹여서 무기로 만들었다. 이후 새로운 동상 건립은 교훈적인 우화 같은 이야기가 됐다.

파리 시청은 2002년에 새로운 동상 건립을 국제 입찰에 부쳤다. 입찰자 중 한 명이었던 세네갈 출신 조각가 오우스만 소우는 예복을 입은 뒤마 장군이 성난 말을 길들이는 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 파리 시청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두 개의 노예 사슬이 끊어진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베르트랑 드라노에 시장 관할 하에 안 이달고 부시장과 ‘뒤마 장군 친구들 협회(l’association des amis du général Dumas)장이었던 작가 클로드 리브가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설치됐다. 

하지만 자유를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프랑스 혁명의 영웅이, 흑인 노예 출신 여성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역사 속 영웅에게서 영광을 지우고, 그를 고정관념 속에 가두는 것은(물론 노예 사슬이 끊어졌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부당한 일이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불라르 구청장과 피오리나 사무총장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파리 시청에 시정을 권고했다. 

노예 사슬 작품이 설치된 지 20년이 흘렀고, 2021년 2월에 마침내 파리 시청은 1913년에 설치됐던 동상과 동일한 뒤마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안을 표결에 부쳤다. 하지만 시당국에서는 새로운 동상을 어디에 세울지 고민 중이다. 아마 현재 설치된 노예 사슬의 중앙에 설치할 듯하다. 파리의 한 의원은 “아직 결정은 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프랑스보다 훨씬 간결하게 혁명사에 접근한 이탈리아 주최측은 6월 14일 행사를 이렇게 칭했다.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지아니콜로 대로에 아기아르의 흉상 건립. 파리에 뒤마 장군의 새 동상 건립.” 

이 역사 속 두 인물의 이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부제가 붙을 것이다. “두 공화주의자 장교이자 자유의 두 영웅”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e R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편집장

번역·이연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