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유년기의 풍문

2021-10-29     아가트 멜리낭 l 극작가 겸 연출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연극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안데르센의 작품이 후세대 작품들에 영향을 미친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서기 1,000년 경, ‘푸른 이빨왕 하랄’이라고 불린 하랄 1세가 덴마크 왕국을 세웠다. 그는 바이킹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노르웨이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북유럽의 경이로운 다신교 숭배가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의 나무’ 이그드라실(Yggdrasil), ‘땅의 정령’ 란드바이티르(Landvættir), ‘신들의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Bifröst), 공기의 요정, 물의 정령, 늑대, 백조를 숭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담과 마법이 깃든 전설에(그리고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도) 자양분을 제공한 이 고대의 다신교는 오랫동안 ‘이야기’에 대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열정을 북돋았다.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다. 안데르센의 초현실적인 세계에서는 장난감 병정이 해양생물에게 잡아먹힌 채 세상을 여행하고, 꽃들은 무도회를 열고, 찻주전자들이 사라지고, 관료들이 시를 쓰고, 바늘은 교만함을 뽐낸다. 안데르센 본인처럼 야심찬 꿈을 꾸는 전나무도 등장한다. 그가 창조한 세계는 인어의 꼬리와 춤추는 어린 소녀의 다리를 잘라 버리고, 구두 수선공은 사랑에 빠져 죽고, 왕들은 벌거벗은 잔혹한 세상이기도 하다. 안데르센은 광기와 야심을 동력삼아 보잘 것 없는 출신을 극복한 독특한 천재다.

 

온갖 불행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

천문학자이자 진보주의자였던 섭정 프레데리크 6세가 루터교를 받아들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정식 국왕으로 즉위할 준비를 하던 무렵인 1805년 4월 2일, 안데르센은 덴마크 오덴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사는 사생아, 알코올중독, 정신착란, 감옥, 가난으로 얼룩졌다. 노란 벽의 작은 집에서 안데르센은 외롭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랐다. 세탁부였던 어머니는 도깨비불과 묘지를 무서워했다.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는 손재주가 없었다.(1) 안데르센은 아버지가 큰 소리로 읽어주는 장 드 라퐁텐의 우화와 극작가 루드비그 홀베르의 희곡을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안데르센에게 인형극 무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일했는데 안데르센이 할머니를 따라갈 때면 실 잣는 여인들은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7세가 되던 해 극장에 다녀온 안데르센은 연극에 사로잡혀 가수와 무용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학교에 다니며 자신이 쓴 시를 조롱하는 선생님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숭배했던 안데르센의 아버지는 전장으로 떠나 덴마크의 동맹국인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프랑스 본토에서 벌어진 전투는 제 6차 대(對)프랑스 동맹의 승리로 끝났다. 안데르센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났다. 당시 11세였던 안데르센은 고운 목소리로 이웃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당시 그에게 도제수업을 받게 했다면 아마 다른 도제들에게 능욕 당했을 것이다. 이는 본인이 직접 인정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핀섬의 나이팅게일’이라 할 어린 안데르센은 계속 노래했다. 그의 첫 후원자였던 한 대령은 그를 크리스티안 왕자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미래의 국왕은 그에게 도기 제조인이 되라고 추천했다. 화가 난 안데르센은 “동화에서처럼 혼자서 세상을 향해” 길을 나섰다. 14세가 되던 해였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안데르센은 유태인 박해가 한창인 와중에 “연극 시즌이 시작되던 바로 그날”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과거 볼테르를 찬양하던 덴마크는 파탄이 난 상태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의 편에 서서 대륙봉쇄령에 동참한 결과였다. 수도는 영국군의 폭격을 받았고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양도됐다. 덴마크는 영토 2/3와 인구 1/3을 잃었다. 그럼에도 당시 ‘덴마크의 황금시대’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신고전주의 건축과 조각, 베르텔 토르발센의 대리석 상, 빌헬름 함메르쇠이 또는 크리스토퍼 W. 에케르스베르처럼 놀라운 화면 배치를 선보인(2) 화가들의 회화 작품이 덴마크 예술을 꽃피웠다. 이 화가들은 검은 원피스를 입은 인물들과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아이들을  캔버스에 담았다.

혈혈단신으로 코펜하겐에 입성한 안데르센은 한 발레리나의 휴게실에서 양말만 신은 채 춤을 추고 노래해 발레리나를 겁에 질리게 했으며 무작정 왕립 극장 단장의 집을 찾아가 낭독을 했다. 이런 시도는 놀랍게도 성공을 거뒀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결국 안데르센은 도제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세계의 상스러움에 질려 도망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매 단어마다 철자법이 틀린’ 희곡을 써 사교모임에서 낭독했다. ‘어린 낭독가’는 청중을 사로잡았고 후원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요나스 콜린 의원은 아버지처럼 그를 도왔다. 콜린이 안데르센을 위해 요청한 장학금을 프레데리크 6세가 승인했고, 안데르센은 슬라겔세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시몬 메이슬링이라는 끔찍한 인물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였다.  

17세의 안데르센은 11세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았다. 전혀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안데르센에게 시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학교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메이슬링 교장이 햄릿의 배경이 된 암울한 도시 헬싱괴르로 전근을 가자 안데르센도 함께 전학했다. 끔찍한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성과는 있었다. 23세가 되던 해 안데르센은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여행, 민담수집, 위고와의 만남

이에 1년 앞서 출판된 안데르센의 첫 시집 『죽어가는 아이』는 덴마크와 독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뒤이어 발표한 작품은 매우 호프만적인 성향의 『도보 여행기』로 이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낭만주의자 안데르센은 여행을 좋아했다. 그는 먼저 국내를 여행하며 ‘많은 민담’(3)을 듣고, ‘가장 저명한 일가들’의 집을 무작정 찾아갔으며, 희망이 없는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불가능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다. 

“여행을 하는 것은 살아 숨 쉬는 것이다!” 파리에서 빅토르 위고를 만난 후에는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도 여행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첫 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했다. 소설은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많은 돈을 벌고 싶었고, 덴마크의 좁은 사회에 숨막혀했다. 아직은 위대한 시인 겸 비평가 요한 루드비그 헤이베르그가 안데르센을 ‘유명 작가’로  칭송하기 전이었다. 

1835년, 안데르센은 기분전환을 위해 ‘동화 몇 편’을 썼다. 이중 네 편을 발표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사람들은 내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고 그만두라고 설득했다.” 사람들이 익숙한 방식이란 무엇이었을까? 17~18세기 프랑스식 동화의 광풍 이후 궁정의 주요 인사였던 샤를 페로는 『엄지동자』와 『푸른 수염』으로 성공을 거뒀다. 낭만주의 유럽은 다시 한 번 동화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동화는 민족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구심점 역할을 하는 민족의 영혼으로 여겨졌다.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는 기념비적인 『독일어 사전』 외에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 이야기들에 게르만 민족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림형제가 『신데렐라』, 『엄지 동자 톰』, 『개구리 왕자』등의 이야기를 모은 이유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독일 민속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유기와 신체 훼손에 관한 이야기에 담긴 게르만 민족의 유산과 그들의 조국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그림 동화』는 그림 형제가 이 이야기들을 순화해 1857년 출판한 것이다. 

환상은 낭만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테오필 고티에의 아들 테오필 샤를 마리 고티에는 아힘 폰 아르님을 프란시스코 드 고야에 비교하며 아르님의 ‘기이한 이야기’ 몇 편을 번역했다. 여행을 좋아한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은 악마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찰스 디킨스는 ‘귀신들린 집’을 조롱했으며, 에드거 앨런 포는 『기이한 이야기』를 펴냈다.

하지만 1835년 코펜하겐 사람들이 읽던 것은 샤를 페로의 작품과 『천일야화』였다. 덴마크는 유스트 마티아스 티엘레가 수집한 『덴마크 민속 동화』나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몰베흐의 교훈적인 이야기와 같은 기준점이 필요했다. 안데르센의 환상적인 문체와 부조리한 유머는 혼란을 일으켰다. 완두콩 한 알에 멍이 들 만큼 연약한 피부를 가진 공주가 있다? 잠자는 공주는 병사에 의해 납치를 당한다? 작은 클라우스와 큰 클라우스는 서로를 죽인다? 도대체 어디서 찾아낸 이야기들인가? 사람들은 안데르센은 이야기 수집가나 민속학자가가 아니고, 과장하거나 꾸며낸 그의 이야기들은 무의식적 차용과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교훈도 찾았다. 페로의 이야기는 세 가지 교훈을 한꺼번에 담기도 한다! 반면, 안데르센은 자신의 상상력과 윤리관을 자유롭게 표출했다. 이 윤리관은 불만, 허영과 싸울 것(정작 본인은 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매우 부조리한 유머 또는 기이한 감수성을 행복하게 버무린 맹렬한 의지, 순수와 신념으로 요약된다.

 

그의 글은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장난감 병정은 살아 움직이고, 성냥팔이 소녀에게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작은 극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앞선 두 모음집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에 맞춰 발표한 안데르센의 세 번째 모음집은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이라는 언급이 삭제됐다. 안데르센은 보편적이길 원했다. 

근대 문학 비평가 게오르그 브란데스의 표현에 따르면 안데르센은 “본인의 자아로 완전히 가득 찬” 정신세계를 글에 표출했다. 안데르센 자신이 바로 행복의 구두를 신은 여행자이며, 눈의 여왕을 따라가는 소년이고, 사랑에 빠진 셔츠 깃이었다. 사람들은 『인어공주』는 요나스 콜린의 아들을 향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불 속에 감춘 완두콩 한 알을 감지하는 것은 소녀들의 성적 쾌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평생 동정으로 수음을 즐긴 안데르센이 이를 알았을까?

파리는 안데르센을 환대했다. 그는 왕궁에서 열린 만찬에 수없이 초대됐다. 프러시아의 왕은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덴마크의 새로운 국왕 크리스티안 8세의 자제들은 안데르센을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꾼으로 꼽았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초대를 거절할 정도로 성공했다.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 알렉상드르 뒤마와 만났으며 안데르센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적 없었던 야코프 그림과도 만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이미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조국 덴마크에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안데르센은 과학, 기계, 철도, 사진술에 열광했다. 1867년, 안데르센은 파리 만국 박람회를 열정적으로 관람했다. 하지만 그는 기계인형 나이팅게일의 노래보다 진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더 좋아했고 해저에 설치된 전신케이블을 ‘인간의 어리석은 발명품’으로 여겼다. 가난에서 벗어나 인정과 환대를 누리게 된 안데르센은 노동자 계층, 당대의 정치·사회 문제, 위대한 사상운동을 완전히 망각했다. 그는 보수주의자로서 부르주아의 가치를 수호했다. 맨주먹으로 가난에서 탈출한 안데르센이 구두 수선공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 속에서 뿐이었다. 그는 디킨스와 달랐다. 

1869년, 덴마크는 안데르센의 코펜하겐 입성 50주년을 성대하게 축하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그의 희곡, 여행기, 소설, 자서전, 동화, 시를 모은 총 69권의 안데르센 전집이 출간됐다. 이로부터 4년 뒤, ‘국보’ 안데르센은 간암 판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동화 집필에 매진했다. 1875년 8월 4일, 영생을 믿던 안데르센은 인어공주처럼 공기 속에 흩어져 사라졌다.

안데르센은 많은 후계자를 남겼다. 예술가, 연구가, 정신 분석가들이 그의 작품을 각색하고, 영화로 만들고, 연구했다. 코펜하겐 왕립 도서관은 안데르센 작품의 전 세계 번역본을 11권으로 모아 소장하고 있다.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안데르센의 동화는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4) 안데르센이 이미 직접 밝힌 사실이다. 그의 작품을 달콤한 디즈니판으로 만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 눈의 여왕은 상냥해졌고 인어공주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공포와 불행이 사라진 이야기는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시인은 시의 주석이나 왜곡보다 더 굳건하게 살아남는다.

우정을 믿는 용감한 아이들이 존재하는 한, 불행한 연인들이 여행하는 한, 겨울이 꿀벌을 닮은 수천 개의 눈송이를 흩뿌리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글·아가트 멜리낭 Agathe Mélinand
극작가 겸 연출가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Hans Christian Andersen, 『Œuvres 작품집』, 제1권, 원문 번역 및 주석 Régis Boyer, Gallimard, ‘플레이아드’ 총서, Paris, 1992. 다음 주석들은 이 책에 수록된  Régis Boyer가 쓴 전기를 참조했다.
(2) Cf. Peter Nørgaard Larsen et al., 『L’Âge d’or de la peinture danoise(1801-1864) 덴마크 회화의 황금시대(1801-1864)』, Éditions Paris Musées, Paris, 2020 (2020년 9월 22일~2021년 1월 17일 파리 프티 팔레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회 도록).
(3) Hans Christian Andersen, 『Le Conte de ma vie 내 인생의 동화』, Les Belles Lettres, ‘Le goût de l’histoire’ 총서, Paris, 2019. 다음에 나오는 인용들은 이 작품을 참조했다. 
(4) Bruno Bettelheim, 『Psychanalyse des contes de fées 동화의 심리분석』, Robert Laffont, Paris,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