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를 괴롭히는 영원한 내정간섭

모이즈 대통령 암살 이후 워싱턴에 의해 추방된 수천의 난민들

2021-12-01     제이크 존스턴 l 워싱턴 DC경제정책연구소 연구원

폭력배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흔히 ‘파산’ 상태로 간주되는 아이티는 국제기구들, 특히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간섭때문에 자국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빼앗기고 있다. 부정이 난무하는 선거, 유명무실한 원조, 경기침체로 아이티인들은 피난길에 내몰리고 있다. 

 

아이티와 아프가니스탄,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두 나라는, 외세의 개입이라는 공통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다. 2021년 7월 7일 새벽, 아이티공화국 대통령 조브넬 모이즈가 전직 콜롬비아군 장교로 추정되는 특공대에게 암살당했다. 수개월간 조사를 벌이고 40여 명을 검거했으나, 아직 이 작전의 수뇌부를 특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아이티 국가원수 암살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15년에도 일어났다. 이를 틈타 미 해군은 아이티를 침공해 19년간 점령했다. 모이즈 대통령 사망 직후 클로드 조제프 임시 총리는 미국의 복귀를 촉구했고, <워싱턴포스트>의 한 사설은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를 혼란스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유엔평화유지군을 조속히 배치해야 한다”(2021년 7월 7일)라고 강조했다.

약 한 달 뒤인 8월 14일, 규모 7.2의 지진이 아이티 남서부의 티뷰론 반도를 강타했다. 다음 날 아프가니스탄의 수도는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최근 아이티를 제치고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점령지’가 됐다. 몇몇 관측통들이 아이티와 아프가니스탄, 두 나라에서 ‘미군 장기주둔’이라는 공통점을 찾았다면, 이는 생각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것일 수 있다. 

2001년 9월 11일의 공격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그의 네오콘 동지들에게 그들이 꿈꿔온 기회를 제공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내걸고 시작된 미군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해외에 한 국가를 조성하는 ‘국가 건설’의 전형적인 사례다. 부시 행정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4년 2월 29일, 미국, 프랑스, 캐나다가 지지한 쿠데타는 아이티 대통령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의 해임을 요구했다. 아리스티드는 4년 전 70%에 달하는 높은 투표율과 압도적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프랑스는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며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으나, 아이티에 대해서는 미국에 협력했다. 아리스티드가 축출되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강제 추방되자 프랑스군은 미 해군과 아이티에 상륙했고, 이후 아이티 안정화를 위해 ‘유엔 아이티 안정화 지원단(Minustah)’으로 파병된 수천 명의 유엔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아이티 안정화란 바로 새로운 ‘국가 건설’ 계획이었다.

 

누구를 위한 ‘구호’, ‘원조’인가?

이 계획의 공식적인 목표는 제도를 개혁하고, 사법제도가 제대로 기능하게 하며, 경찰력을 가동하고, 선거를 감독하며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가장 중요시한 것은 군사 임무였다. 수년간 유엔 아이티 안정화 지원단은 2004년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알려진 수도 지역에 대한 공격을 증가시켜왔다. 2007년 2월 시테 솔레이유를 공습할 당시 안정화 지원단 소속 유엔군은 탄약 2만여 발을 발사했으며, 민간인도 사살했다. 이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다.

일부 논평가들은 2021년 여름 아이티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위기를 앞세워, 아이티를 아프가니스탄처럼 ‘파탄 국가(Failed state)’로 규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아이티는 ‘구호 대상국(외세가 영구 점령하기 위해, 원조를 앞세워 개입하는 나라)’이다. 2001년부터 미국은 민심이 외면한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들였는데, 아프가니스탄과 마찬가지로 2004년부터 아이티에서 치러진 모든 투표 역시 미국을 위시한 유엔과 미주기구(OAS)가 통제했다. 

예를 들어 2010년 1월 12일 강진이 발생하자 아이티 정부는 당초 2~3월로 예정돼 있던 총선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원조 공여국들은 1백만 명이 난민이 된 11월에 선거를 강행하고자 압박했다. 1차 선거는 재난 상황에서 치러졌다. 미국, 프랑스, 캐나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주기구 대표단은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선거를 연장하거나 재검표하는 방안을 권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당한 사유 없이 공식결과를 번복할 것을 권고했다. 우파 성향의 대중 가수 미셸 마르텔리에게 결선 출마 자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아이티에 ‘인도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했고, 이에 굴복한 아이티 당국은 이 ‘권고’를 받아들였다. 

2017년 2월 취임한 모이즈 대통령의 임기도 아슬아슬했다. 그가 2016년 가을 선거(부정선거 의혹으로 2015년 대선이 무효화되면서 다시 시행된)에서 승리한다 해도 투표율은 20% 미만일 터였다. 그는 총 600만여 표 중 59만 표를 얻었다(아이티 인구는 1,100만 명).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국가 최고위층의 부패를 규탄하는 시위와 퇴진 요구가 뒤따랐고, 아이티의 새로운 권력자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미국의 지지를 받은 아프가니스탄 정권과 달리, 아이티 대통령은 2017년 10월 유엔 아이티 안정화 지원단 임무가 끝나고 외국 군대가 철수한 후에도 정권을 유지했다. 아이티에서는 탈레반 수준의 무장 반대운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원단의 임무가 끝나가던 지난 2월 7일(대통령 당선자의 임명을 위해 헌법으로 정한 날짜), 모이즈는 미국-유엔-미주기구로 구성된 3자의 지원으로 자리를 고수했다. 이 때문에, 아이티 지도자를 국민이 아닌 원조 공여국이 결정한다는, 국민의 의혹은 확신이 됐다.

그러나, 2010년 지진 이후부터 100억 달러(당시 아이티의 국내총생산에 맞먹는 규모)가 넘는 원조 약속이 전 세계에서 쇄도했다. 아이티 주둔 유엔 평화유지군은 2004년에 7,000명 미만에서 1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의사결정권자들은 “현대의 국가는 군사력만으로 건설될 수 없으며, 인도적 지원이 아이티 ‘재건’을 위해 동원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재건’에 정작 아이티 국민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재난 이후 아이티로 몰려든 비정부기구(NGO), 개발업자, 국제기구들은 서양에서 교육받은 ‘전문가들’만이 낙후된 이 나라를 ‘재건’할 수 있다고 본다.

일례로, 지진 발생 이후 10년 동안 미 대외 원조의 3% 미만이 아이티 기구들로 흘러들었다. 워싱턴, 메릴랜드, 버지니아 등 연방제의 영향권 내에 있는 기업의 절반이 넘는다. 수천 명의 서양인들이 현재 ‘원조’로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원조가 필요한 나라는 원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금은 계속 빠져나간다.

국제 원조는 해당 국가의 현지 단체들을 배제함으로써 결국 그 국가를 약화시킨다. 아이티에서 보건 및 교육 같은 기본 공공 서비스의 약 80%는 비정부기구, 종교단체 및 민간기업들이 맡고 있다. 국내 산업은 인도적 분야의 수입 의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농업 부문에서 미국 자본 수혜자는 지역 농산물을 구매할 의무가 없다.

결과적으로, 의회의 ‘인도적 지원금’은 미국 생산업자들의 보조금으로 쓰이고 있다. ‘국가 건설’ 시작 후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이티 국민의 처지는 나아진 게 없다. 절반은 식량불안 상태에 처해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고국을 떠나려 한다.

 

‘망명 신청자 추방작전’이 보여준 것

2021년 9월, 1만여 명의 아이티인들이 망명을 희망하며 미 남부 국경에 도착했다. 그들은 미군이 카불 철수에 실패한 후 조 바이든 대통령이 3만 7,000명의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부여한 난민 지위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국경지대의 기마경찰들이 리오그란데강을 막 건너온 가족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일부 경찰들은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처럼 고삐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바이든 정부는 일주일 동안 4,000명의 아이티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수십 년 만에 ‘망명 신청자 추방작전’을 펼친 것이다.

대니얼 푸트 아이티 미국 특사는 임명 두 달 만에 사임함으로써 반발을 표했다. 그는 사직서에서 “나는 수천 명의 아이티 난민을 추방하려는 미 정부의 비인도적이고 비효율적인 결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1)이라고 밝혔다. 포르토프랭스에 짐을 푼 다른 외교관들처럼, 푸트 특사도 카불 주재 미대사관을 거쳐 왔을 것이다. 그는 카불에서 해외 민간원조 배분을 감독한 적이 있다. 아이티와 아프가니스탄의 유사성은 대중의 눈에는 잘 안 보일지 몰라도, 해외 당직자들에게는 뚜렷하게 보인다.

푸트 특사는 단순히 추방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권고가 묵살 또는 왜곡된 것에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수천의 아이티 망명 신청자들과 미국의 아이티 정책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봤다. 푸트는 “나는 아이티의 안정이, 국민들의 지도자 선출권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아이티를 국제적 꼭두각시로 여기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이티 지도자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는 전능에 대한 환상에 경악한다”라고 덧붙였다.

푸트 특사의 이 말들은, 외세의 개입을 암시 및 비판하고 있다. 모이즈 대통령 암살 직후, 조제프가 권력을 승계해 임시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대통령이 아리엘 앙리를 새 총리로 지명하기 2일 전 사임했다. 아리엘 앙리는 아직 총리 업무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모이즈 자신의 합법성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 두 후보자는 논쟁만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과 유엔은 아이티 국민들을 대신해 앙리를 지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200여 년 전 노예 처지였던 아이티 국민들은, 프랑스 식민자들을 몰아내고 아이티 국가 건설에 성공했다. 그러나 현지의 소규모 엘리트들과 결탁한 외세는, 아이티 지배를 위한 시도를 계속해왔다. ‘구호 대상국’은 지난 20년간의 그 지배욕의 산물이다. 지배를 위한 이런 시도들은 언제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으며, 그 저항은 18세기 말 아이티 혁명으로 표출됐다. 1915년 미군이 아이티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농민 민병대 ‘카코스(Cacos)’와 충돌했다.

2004년 쿠데타가 발생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배치된 뒤 무장 민간단체들은 침략자들에 맞서 수도에서 도시 게릴라전을 이끌었다. 미국, 유엔, 유럽연합(EU)은 아이티인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이제 2004년에 미국의 개입을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내정간섭을 비판하고 아이티인들이 직접 해결책을 결정하기를 요구한다. 공여국들은 조바심을 내며 앙리를 지지하고 있다. 반면, 민간 부분에서 지역 농민연합까지 아이티의 활기를 대표하는 수백 개의 조직들은 국제세력에 대항하고 있다. 그들은 영원히 구호 대상국에 머물기를 거부하며 공동 강령을 중심으로 단결 중이다.

아이티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제이크 존스턴 Jake Johnston
워싱턴DC. 소재 경제정책연구소(CEPR) 연구원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John Hudson & Anthony Faiola, “US special envoy to Haiti resigns, says he will not be associated with ‘inhumane, counterproductive’ deportations of Haitians”, <Washington Post>, 2021년 9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