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자유 찾기
88서울올림픽 이듬해 초, 리비아에서 1년 동안 노동자로 일하고 돌아온 남자와 결혼을 했다. 첫아이를 낳고는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분을 어렵사리 구한 뒤에야 학교도서관에 출근할 수 있었다. 당시 비정규직인 학교도서관 사서는 ‘일용잡급직’으로 분류돼, 한 학교에서 8년 동안 근무했지만 월급이 채 17만원도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돈의 대부분은 아기 돌보는 아주머니에게 줘야 했다. 말하자면 나와 그녀는 ‘취약한 상태에 놓인 두 개인 간의 관계’였던 것이다.
내 일자리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나와 아기 돌보는 아주머니의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둘째를 낳고는 학교도서관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 살림을 하게 되었다. 평일 대낮에 공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햇살을 받으며 산책하는 것이 꿈만 같이 느껴졌던 기억이 새롭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아이들을 키우며 도서관을 다니고 마을 복지관에서 맞벌이 자녀들에게 ‘책 읽어주기’를 하면서, 틈틈이 취미생활과 관련된 것들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한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엔 나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우울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남성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자리하는 자신이 온전한 독립체로 살아갈 수 없다고 느끼며 허망해했다. 그러면서 책을 읽었다. 며칠을 밖에 나가지 않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가정이 소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들이 더없이 소중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노력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삶이 내게 에너지를 주었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자.’
주변의 주부들과 함께 마을 도서관에 모여 주 1회 어린이 책을 읽은 뒤 토론하고, 책과 아이들에 관한 문화행사를 기획하면서 바빠졌다. ‘동화 읽는 어른들의 모임’을 만들어 회원을 모집하고, 어른들이 먼저 공부를 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읽고 토론하면서, 우리가 어릴 때 접해보지 못한 그림책과 동화책에 매료돼 자긍심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를 찾아가 교사들에게 좋은 책 목록을 전하고, 마을 도서관에서 책 읽어주기를 했다. ‘아줌마가 세상을 바꾼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마을 공동체 일원으로 다양한 문화행사를 함께했다. 그때 마을 주민센터 강당에서 홍세화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10여 년의 ‘무직’ 세월이 내게 준 의미는 크다.
경제적 이득이 없는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내가 이러고만 있어도 될까’ 하는 조바심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내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체험하고, 가사와 취미활동을 배우고 익힌 것을 주변에 나누는 일상 속에서 내 생각을 키울 수 있었다. 어르신들과 청소년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고, 책과 관련한 복지관 봉사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익혔다.
지금은 다시 학교도서관 사서로 6년째 일하고 있다. 불혹이 훌쩍 넘은 나이에 학교 비정규직 사서직에 원서를 내고 20대 젊은이들과 함께 면접을 봤다. 그때 내 또래의 여자 면접관은 이런 질문을 했다.
“나이로 봐서는 청소년기의 자녀가 있을 법한데요. 자녀들의 학업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을 시기인데, 일하는 것에 부담이 없겠습니까?”
면접관 본인의 사정이 그러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물은 것인지 몰라도, 그 질문이 내게는 생소하게만 들렸다. 어릴 적부터 항상 뭔가를 하러 다니는 엄마를 봐온 우리 아이들은 일하는 엄마를 당연히 생각했고, 학교도서관 사서로 다시 일하게 된 것에 대해 가족은 함께 기뻐해주었다. 무직으로 지낸 세월 동안의 체험 덕분에 20대 젊은이들을 제치고 ‘사서’ 일을 다시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때의 경험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돌아와서 본 학교도서관 사서직의 환경은 지나간 세월만큼 변화를 따라잡진 못했다. 사서 교사 임용이 너무 적다 보니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비정규직 사서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하나의 절차였다.
내가 근무하는 도에서는 2000년 초부터 도내 학교도서관 현대화 사업으로 도서실을 디지털화하도록 지원했고, 2005년께부터는 비정규직 사서들을 학교도서관에 배치하고 있다. 올해도 170여 명의 비정규직 사서가 도내 학교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다. 초기만 해도 ‘학교도서관 사서 전담 요원’이란 명칭으로, 일선 학교에선 ‘사서보조’란 직책으로 불렸다. ‘비정규직 사서’를 정식 ‘사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저 도서관 관리를 맡아보는 ‘요원’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인력들인데 호칭을 낮춰 부르고,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반나절을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고 방과 후에 도서실 근무를 하게 한다.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사서들은 도서관 관리 업무 외에는 독서 교육 계획을 세울 수도 추진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도서관 담당교사의 업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위치에 있다. 심지어 소속은 행정실이고 업무는 교무실에 있다 보니,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어중간한 위치에서 소신껏 업무를 추진하기 어렵다.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면서 무기계약을 체결할 때도 사서들마다 진통을 겪었다. 그러다가 그녀들이 찾은 곳이 학교비정규직 여성노조였다. 모두 저마다 섬이 되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정보를 공유하지도 못하던 차에 여성노조에 ‘사서분과’를 만들자는 인식이 지난해에 강하게 불었다.
월수입의 몇%를 회비로 내고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보니, 집회에 나가서 할 일도 많고 모임도 잦아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했다. 대부분이 여성이고 주부라서 모임이 짜임새 있게 엮이지 못하고, 남편이 반대하거나 학교에 노조 가입이 알려질까 두려워 탈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개인적으로는 노조의 강경한 발언이나 행동이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해 회원들에게 부담감을 가중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노조에서는 학교비정규직의 교육감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 호봉제 실현을 요구하며 시위에 동참하라는 문자메시지가 온다. 회원으로 가입해서 시위에 동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이 말도 핑계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들과 함께해 우리 권익을 위해 주장하려는 마음만은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