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서구의 몰락』이 남긴 흔적

향수(Nostalgia)의 정치화

2021-12-01     에블린 피에예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이 세상, 나아가 우리 문명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들 한다. 이는 비단 기후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 비관론은, 인간을 나머지 생물들로부터 분리시키고, 구체적인 땅과 집단을 추상적인 민주주의로 대체해버린 보편적 이성을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 같은 개념은 더 이상 극우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 적어도 ‘우리’ 세상의 종말을 향해 갈 것이다.”

이제는 전혀 새롭지 않은 생각이다. 해학가였던 피에르 데프로주의 말과는 달리, 진보의 위세는 한풀 꺾였고 미래는 불투명해 보인다. 극우파 무리가 불안한 예측으로 국민을 선동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 때부터 있었던 일이라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예전이 좋았다’는 클리셰를 예고된 재앙으로 연결 짓는 이런 믿음은 이제 극우파 후손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문명은, 몇 년 안에 몰락할 것이다.”

2019년 장 조레스 재단의 의뢰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시행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인의 65%가 이 주장에 동의를 표했다. 2년 전의 조사결과이긴 하지만, 2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긍정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세상의 몰락에 대한 전조로 여겼던 것은, ‘향수의 정치화’에 따른 결과였다. ‘문명에 관한’ 고뇌의 선구자들이 감명 깊게 읽었으나, 언급은 꺼렸던 한 권의 책이 있다. 향수의 정치화는 이 책이 제안한 개념적 도구를 통해 진행됐다.

독일 출신의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쓴 『서구의 몰락』이 곧 출간 100주년을 맞는다. 1948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이 책은 최근 20년 이상 시중에서 찾기 어려웠는데, 시의적절하게 개정판이 나왔다.(1) 총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1권은 1918년에, 2권은 1922년에 출간됐다. 그 말은 슈펭글러(1880~1936)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이 책을 집필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당시 슈펭글러의 머릿속은 실패, 제국의 종말,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운동의 유혈 진압과 베르사유 조약의 반대를 바탕으로 불안하게나마 의회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맥락을 함께하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저서와도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 책은 큰 성공을 거뒀다. 덕분에 슈펭글러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돼 독일의 산업고문관으로 임명됐고, ‘보수 혁명’의 주요 사상가로 활동했다. 보수 혁명은 반민주주의적 이론 운동이었지만 극단적인 반부르주아와 반자유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혁명으로 명명됐다. 슈펭글러는 “역사가 미래의 기반이 돼야 한다”라는 철학을 내세웠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슈펭글러의 저서에 포함된 가정들은 과거의 분석과 현재의 평가를 기반으로 한다. 슈펭글러는 인류 역사상 총 8개의 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문명을 탄생-성장-쇠퇴-사망하는 생명체로 봤다. 문명은 이전에 존재했던 ‘고등 문화’의 결과로, 고등 문화가 완성되고 끝나는 지점이다. 슈펭글러는 로마 역사와의 비교를 통해, “몇 세기에 걸친 보편적 역사의 한 단계”인 서구 문명은 이미 전성기를 지났고, 종말에 가까워졌음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제는 종말 이후 무엇을 할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에게 고독한 의무를 지운 ‘이성’

슈펭글러가 이런, ‘조기 몰락’이라는 진단을 내린 근거는 무엇일까? “인류가 살아있는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우주적인 감정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슈펭글러가 내세운 ‘조기 몰락’의 근거다.  이는 ‘이성의 횡포’에서 비롯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이 문구를 통해 자아성찰적 의식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계몽주의자들을 통해 편견, 반계몽주의 등 자유 의지의 방해요소들에 맞설 수 있다고 강조하며, 인류를 운명의 길로 내몰았다. 그들은 인류가 속한 생명체 전체에서 인류를 고립시켰다. 인류가 가진 감성과 고유성을 무시하면서 인류의 본질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동시에, 인류는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명분을 내세워 인류에게 역사를 만들어내는 고독한 의무를 지웠다. 

“지성이 삶의 무의식적인 경험들의 대체재”가 될 때, 인류가 자연, 우주, 그리고 자신이 속한 생명의 거대한 표현으로부터 단절되고 그 모든 것을 개념과 법칙으로 만들어 ‘이해’하려고 할 때, ‘죽음으로 향하는 형이상학적 전환점’이 나타난다. 이것은 질은 무시한 채 양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속삭임을 분류하고, 변화시키고, 개발해야 하는 현실로 바꾼다. 인류는 경이로운 대상이 뿜어내는 빛보다 인과관계의 냉정함을 선호하게 된다. 그렇게 문명인은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자신을 메마르게 만든다. ‘정신적으로 해로운’ 추상의 승리는 이 문명의 쇠퇴를 의미한다. 

과거에 “파우스트적인 역동성을 가지고 힘과 생명 창조를 향한 가장 강한 의지를 표현”했을 때, 인류는 위대했다. 그러나 인류는 다양한 감성을 버리고 각종 법칙, 과학적 지식, 경제적 합리성을 선택했다. 인류의 행복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낸 운명적인 일탈이었다. 그러나 사실 “인류는 동물학적 개념 또는 의미 없는 단어”다. 슈펭글러는 인류라는 통일된 단위(추상적)는 없고 오직 민족(구체적)만이 있을 뿐이며, “민족은 언어적, 정치적, 동물학적 단위가 아니라 정신적인 단위”라고 말했다. 같은 ‘피’, 같은 ‘종’을 가진, 그러나 유전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같은 피와 같은 종을 가진 단위를 뜻한다. 

민족은 근본적이고, 유일하고, 비교 불가한 하나의 흐름이 구현된 실체로, 더 낫고 모자란 것이 없이 모두가 절대적으로 다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속해 있는 주변 환경과 관련된 가치, 선호도, 살아가는 방식과 느끼는 방식의 본능적인 총합체로서, 공동의 정체성과 ‘혼’을 공유하는 단위다. 이 ‘혼’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다른 방식은 절대로 개입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방식을 결정한다. “유럽인의 장점은 아랍인이나 일본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라진다.” 외국인은 열등하지도 우등하지도 않은 그저 외국인일 뿐이다. 다른 인간. 극단적인 타자성을 가진 인간. 

“세상에는 문화의 수만큼 도덕의 수가 존재한다. 딱 그만큼이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모든 문화는 각자 완전하고, 독립적이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견고하고, 그리고 개방되는 순간부터 변질하고 타락한다.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은 증오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심지어 타자성에 대한 존중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모든 ‘종’에는 고유한 가치와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의 ‘진실성’을 논할 필요도 없다. 슈펭글러는 ‘문화들’을 서열화하지 않고 다만 그 주기를 설명했으며,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자면 각 문화가 ‘본질을 보존’할 수 있을지의 가능성을 주기와 관련해 분석했다. 슈펭글러는 ‘생명론을 표방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상대주의자였다. 그리고 슈펭글러는 생명론자이자 상대주의자였기에, 반민주주의자이자 반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인본주의, 민주주의는 실재하는가?

개인, 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와 발전에 기반해 세상을 바라보는 합리적 인본주의는 민주주의로 이어진다.(2) 그러나 “인간의 보편적 권리, 자유, 평등은 문학과 추상에서나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는 사회의 분열, 욕망의 폭발, 끝없는 물질만능주의, 들끓는 불안감을 먹고 사는 “돈의 힘을 감추는 가면”에 불과하다. “지적 긴장감은 더 이상 이완과 휴식을 제공하는 오락거리가 아니다. 진정한 놀이, 삶의 즐거움, 기쁨, 취기는 우주적인 접촉에서 탄생하지만(생명의 거대한 움직임에 합류할 수 있는 능력), 이제 우리는 자연을 알지 못한다.” 본능에 충실하던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녹아 사라지고, 그 자리는 무색무취의 범세계주의가 차지한다. 

 “진심으로 믿는 종교”는 사라지고 모든 것, 심지어 생명 탄생과 관련해서도 수지타산을 생각한다. 우리와 국가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문명인은 뿌리를 잃고 메말라가고, 자본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자유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그것은 착각이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언론이고, 언론은 돈을 위해 일한다. 결국, 문명인의 특성, 나아가 문명인의 합리성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시기가 온다. 끝없는 의심에 빠지고, 마지막 확신마저 사라진다. “문명에 최종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마지막 투쟁, 즉 돈과 피의 투쟁이 시작”되는 시기다. 서구는 몰락하거나, 서구를 재생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손에 넘어간다. 이것이 바로 슈펭글러가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슈펭글러는 우리의 현대성에 문제를 제기했고, 따라서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이 2018년 슈펭글러 상을 받은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비록 수상 소감을 전하는 자리에서 에리크 제무어가 이 상에 더 적합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미셸 옹프레가 슈펭글러로부터 받은 영향은 마치 희미한 빛 속에서 완벽하게 빛나는 그 무언가를 찾아낸 것과 같았으며, 이는 감동적인 결과를 낳았다. 옹프레는 슈펭글러의 주제를 가져와 응용을 덧붙여 

『Décadence 쇠퇴』 (Flammarion, Paris, 2017)를 출간했다. 한편 합리적 철학의 대가 자크 부브레스가 슈펭글러에게 보인 관심은 의외였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이어 부브레스가『 서구의 몰락』을 좋아했던 이유는 우리가 최선이라고 믿는 ‘해결책’이 실제로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우리가 가장 현대적이라고 믿는 증거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3)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자유주의에 대한 슈펭글러의 비판은 많은 부분에서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보다 훨씬 더 신랄하다. 극우파는 정적의 담론을 취할 수 있을까? 이 담론은 이 ‘협상의 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야생적 역동성’

슈펭글러 분석의 중심은 ‘생명 중시 사상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원론을 향한 애도와 생명론을 향한 찬양은 ‘지배관계의 파괴’를 위한 것이다. 첫 번째 비판대상은 역시 데카르트, 즉 이성이다. 환경보호론자인 상드린 루소는 “인간에게 자연의 통제와 소유라는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이성-감정, 과학-자연, 문명-야만을 이원화하는 17세기의 이원론적 도식을 완성했다”라며 이 철학자를 비판했다(<리베라시옹>, 2021년 3월 8일).(4) 

사실 반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런 비판과 애도를 실행한 것은 ‘구원의 정결의식’이었다. 인간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를 버리고, 신으로 군림하고 자연과 경쟁하기를 멈추며, 우주에서 적절한 자리를 되찾게 하려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필리프 데스콜라부터 브뤼노 라투르까지, 많은 지성인은 인간을 보편적 존재로 여기는 서구의 사상은 비합리적이며, 다른 생명체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근거이자, 각종 폐해의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슈펭글러의 열렬한 추종자인 철학자 밥티스트 모리조는 이런 생각을 가장 명확하게 정리한 인물들 중 한 명이다. 

“현대의 서구 사회는 인류가 가장 완벽하게 개화한 시기로, 이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자율성(민주주의 대 신권정치)과 한계와 제약으로 여겨지는 자연에 대한 독립성(기술적 진보)을 확보한 덕분”이라는 생각은 비극적인 오류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5) 따라서 “추상적 사상”에 근거한 이 “신화”를 버리고 “우리보다 더 오래되고 또 우리의 근본이기도 한 야생적 역동성”을 되찾아야 한다. 슈펭글러도 이보다 더 잘 정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근본이 태고의 원초적 힘이라고? 이런 주장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안과 밖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기쁨을 되찾고 싶지 않은 인간이 과연 있을까? 그런 기쁨도 없이 “로비와 농업 비즈니스의 강력한 힘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6) 생명론적 사상은 명민하고 또 바람직하게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대표적인 생명론자 중의 한 명인 질 들뢰즈가 이야기했듯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또 우리를 좀비로 만드는” 상황 속에서, 생명론적 사상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7) 

슈펭글러와 ‘보수 혁명’도 이를 인정할 것이다. 생명론이 슈펭글러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이원론적’이고 보편적인 합리성의 거부, 감성의 우위, ‘우리의 근본을 구성하는’ 힘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사상들은 모순적이다. 전통이 살아있는 순수한 과거로 회귀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없애고 ‘생명’을 찬양하겠다는 계획은, 산업혁명 이전의 자본주의와 맥을 함께하며, 본능의 힘을 인정한다는 안도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 반합리주의에는 ‘보수 혁명’의 모든 가능한 변주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Oswald Spengler, 『Le déclin de l’Occident 서구의 몰락』, Gallimard, Paris, 2021, 1120 페이지, 두 권. 안타깝게도 번역은 초판과 같다. 요한 샤푸토의 서문만 새로 추가됐다.
(2) Gilbert Merlio, ‘Le début de la fin ? Penser la décadence avec Osswald Spengler 종말의 시작?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함께 쇠퇴를 생각하다’, PUF, Paris, 2019.
(3) Jacques Bouveresse, ‘La vengeance de Spengler 슈펭글러의 복수’, 『Essais II』, Agone, Marseille, 2001.
(4) 사실 데카르트가 쓴 문구는 “et ainsi nous rendre comme maîtres 그렇게 우리를 통제자로 만든다”로, 인용한 것과 매우 다르다.
(5) Baptiste Morizot, ‘Réensauvager l’humanisme 야만으로 되돌아가는 인본주의’, 『L’Europe réensauvagée. Vers un nouveau monde 야만으로 되돌아간 유럽. 새로운 세계를 향해』의 서문, Gilbert Cochet & Béatrice Kremer Cochet, Actes Sud, Arles, 2020. 밥티스트 모리조는 산지를 매입해 야생 동물 보호 구역을 조성하는 ‘Vercors Vie Sauvage’ 운동에 참여해 프랑스농민연합(Confédération paysanne) 등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6) ‘Il faut politiser l’émerveillement 감탄을 정치화해야 한다‘, Nicolas Truong의 Baptiste Morizot 인터뷰 기사, <Le Monde>, 2020년 8월 4일.
(7) David Lapoujade, 『Deleuze, les mouvements aberrants 들뢰즈, 비정상적인 움직임』, éditions de Minuit, Paris,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