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의 뿌리, 저항의 문제

2021-12-01     바바라 J.필즈 외

인종은 생물학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파이(π)처럼 영속성을 가진 개념도 아니다. 이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어떤 계기로 생겨난 이데올로기다. 그렇기에 또 다른 계기로 바뀔 수도 있다.

17세기 버지니아는 인종의 역사를 소개하기에 적절한 배경이다. 여기서 영국령 북아메리카 플랜테이션(대규모 농장) 제도를 빼놓을 수 없다. 버지니아는 초창기의 붕괴 위기에도 불구하고, 1620년대에 ‘담배 재배’라는 천직을 찾아낸다. 시작은 아프리카 노예가 아니라 ‘계약 하인(Indentured servant)’이다.(1) 미래의 미국은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 계약 하인을 물건 취급했다. 매매와 내기, 절도와 납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게다가 계약 하인을 굶기거나, 계약기간이 끝나도 풀어주지 않거나, 사전에 약속했던 자립금(Freedom dues)을 지불하지 않는 주인들도 있었다. 주인은 계약 하인을 때리고 불구로 만들거나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다. 한 계약 하인은 총독과 의회에 불만을 제기했다가, 팔이 부러지고 송곳으로 혀가 뚫렸다. 어떤 이는 귀가 잘렸고, 재판에 참여했던 의원의 집에서 7년간 두 번째 하인 계약을 이행해야 했다. 

버지니아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리 기업과 다름없었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담배를 재배해서는 이윤을 남길 수 없었다. 담배산업이 호황일 때 큰돈을 벌려면 집단 강제노역이 유일한 답이었다. 흰 피부도, 영국 국적도 이런 잔혹한 행위로부터 계약 하인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결국 그 고통은, 아프리카인들에게 넘어갔다. 학자들은 영국인 계약 하인이 아프리카 노예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흰 피부 덕택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인종이라는 그늘진 시각에서 나온다.

그늘을 벗어나 밝은 햇빛 아래로 나오면, 실상을 직시할 수 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피부색이 같은 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유럽인은 같은 유럽인을 노예나 농노로 삼았다. 잉글랜드 튜터 왕조는 부랑자를 노예로 삼도록 법으로 허락했다. 영국인은 누가 봐도 백인인 아일랜드인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잔혹하게 정복했다. 올리버 크롬웰은 드로이다 대학살의 생존자들을 바베이도스에 노예로 팔았고, 브로커를 통해 아일랜드 어린이들을 서인도제도 노예경매에 넘겼다(2). 피털루, 칠레의 산티아고, 한국의 광주, 천안문 광장, 산살바도르의 바리오스 등 인류는 역사적으로 피부색이나 국적이 같다는 이유로 억압을 제한한 적이 없다. 억압을 제지하는 유일한 수단은, 다름 아닌 저항이다. 

자유는 여러 세기에 걸친 저항의 결과물이다. 영국 하층민의 자유(여성의 자유는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피부색이 같은 동족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게 아니다. 억압의 피해자들은 억압을 제지하기 위해, 일상에서 공공연한/은밀한, 폭력적/평화적, 무장/비무장 투쟁을 벌여왔다. 무수한 권투시합을 치르듯, 하층민은 투쟁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자유를 획득했다. 그리고 이전 라운드의 결과에 따라 다음 라운드 도전자의 체급이 결정됐다. 

버지니아 식민지 시대에도 ‘권투시합’이 벌어졌다. 초창기에 계약 하인들은 같은 영국인 상대 선수에게 존엄성, 안락함, 복지 면에서 상당 부분을 잃었다. 그러나 전부를 잃진 않았다. 만약 신분이 하인에서 노예로 전락했다면, 투쟁의 수위는 위험할 정도로 격렬해졌을 것이다. 당시 계약 하인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수적으로 우세했다. 투쟁이 전쟁으로 번질 경우, 그 틈을 타고 인디언이 영국인을 공격할 위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민자를 노예로 삼았다는 소식이 영국 본토에 전해지면, 이민율이 감소할 위험이 컸다. 주인들이 아무리 탐욕스럽고 어리석더라도, 노예화 정책이 불러올 재앙을 예견할 수는 있었다. 버지니아 주민의 수명이 짧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노예들이 사망하기 전까지 노동한 기간은 7년 미만으로 추산된다. 1625~1640년 1만 5,000명이 이주했으나, 거주민 수는 약 1,300명에서 7,000~8,000명으로밖에 늘지 않았다.

부정적인 소문 때문에 자발적 이민은 줄었지만, 강제이주는 줄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영국 하층민은 협상과 투쟁을 통해 주인과의 관계를 정립한 오랜 역사가 있지만,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계 카리브해인에게는 그런 역사가 없다. 따라서, 투쟁의 역사가 만들어낸 법과 관습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권투시합에 비유하자면, 버지니아의 영국인 하인은 링 위에 혼자 서지 않았다. 앞서 투쟁했던 모든 세대가 함께 섰다. 이전의 무수한 시합에서 얻어낸 결과가 다음 시합의 조건을 결정한다. 

반면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계 카리브해인은 링 위에 홀로 선다. 그래서 영국인 하인보다 종신노예화하기 쉽다. 버지니아인들은 노예무역 초창기에 그랬듯, 이미 노예신분이고 경험도 풍부한 사람을 살 수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를 ‘인종’이라고 부른다.

다만, 아프리카 노예는 1619년부터 산발적으로 등장했지만, 사실 1619~1661년 동안 19세기의 자유인 흑인이 주장할 수 없는 권리를 누렸다. 1661년 이전까지 ‘종신’노예 조건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예제도가 체계화되기 이전에는 노예법이 필요 없었다. 아프리카 종신노예는 계약기간이 5년인 영국인 하인에 비해 두 배로 비쌌지만, 5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이 높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노예제도가 체계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1660년대에 들어서면서 바뀌었다. 그리고 다른 조건도 변했다. 담배가격이 하락했고, 미국으로 이주하는 영국인 하인도 감소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종신노예화할 만큼 수명이 길어졌고, 유럽계 미국인도 수명이 충분히 길어져서 계약기간 만료 후 지급되는 자유와 자립금(또는 토지)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계약 하인을 착취해 돈을 벌던 이들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연안 평지를 모조리 매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인은 계약 만료 후 지주에게 토지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주의 배만 불려주는 격이었다. 아니면 국경지대에 살아야 했는데, 이곳은 수상교통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인디언의 공격에 노출된 지역이었다. 인디언은 연안 평지에서 자신을 몰아낸 외부인의 침략에 분개했다. 

1670년대, 버지니아 통치자들 앞에는 크게 번질 수도 있는 불씨가 던져졌다. 그것은 하인 계약이 끝나고 자유인이 된 다수의 청년들이었다. 땅도 가정도 없는 그들에게는 들끓는 젊음과 분노, 무기가 있었다. 결국 불씨는 크게 번졌다. 1676년, 미국 식민지 시대 역사상 가장 큰 민란이 일어난 것이다. 계약 하인과 노예도 반란에 참여했다. 그들은 부유층의 재산을 약탈하고 수도를 불태웠다. 총독과 측근들은 버지니아 동부 연안에 은신했다. 

그러나 반란은 급작스럽게 끝났다.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한 채, 기득권자들에게 백인 하층민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만 심어준 것이다. 그 결과, 기득권자들은 아프리카계 노예를 더 많이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렇게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했으며, 영국인 하인들이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글·바바라 J.필즈 Barbara J. Fields,
카렌 E.필즈 Karen E. Fields

각각 컬럼비아대학 역사학 교수, 사회학자. 이 글은 두 사람이 공동저술한『Racecraft: The Soul of Inequality in American Life 인종환상, 미국 삶의 불평등』 (2021)에서 발췌한 것이다.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영국에서 온 계약 하인은 지주를 위해서 일하다가 계약기간(보통 5~7년)이 끝나면 돈 또는 토지를 받았다. 
(2) 영국 내전(1642~1651년)에서 왕당파를 물리친 올리버 크롬웰은 1649년 8월에 아일랜드 정복에 나섰고, 9월에 드로이다를 공격한다. 드로이다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수천 명이 시민이 학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