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분노 폭발…그리스 '12월 민중항쟁'

2008-12-30     발리아 카이마키 | 아테네 특파원
  지난 12월 6일 경찰이 15세 소년 알렉산드로스 그리고로풀로스를 사살함에 따라 아테네, 테살로니키, 파트라스, 라리사, 이라클리온, 크레타, 이오니아, 볼로스, 코자니, 코모티니 등 수많은 도시에서는 중·고생, 대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문자나 메일로 집합 장소가 통보된 이 우발적 시위에서는 전대미문의 격렬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경제위기, 국가기관 총체적 불신
 항의 시위가 발발된 원인은 여러 가지다. 경찰의 진압이 가장 큰 이유이긴 하나, 희생자의 나이가 최연소였다는 점을 빼면 이 같은 사살 사건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같은 반란이 일어나기 쉬운 토양을 다져놓은 건 단연 경제위기였다. 전 세계적 경제 한파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부터 이미 그리스는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제도 및 도덕적 차원에서의 정치 위기 또한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 정당과 정치인의 투명성 부재로 야기된 정치적 난국은 국가기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 사건은 결코 '실책'이 아니다. 그간 고문·사살된 시위대나 이민자는 많이 있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기나긴 희생자 목록에 이름 하나를 더 추가했을 뿐이다. 사실 1985년에 15세 소년 미칼리스 칼테자스가 이미 경찰에 의해 피살된 바 있었다. 당시 문제가 된 경찰관은 허술한 법률 제도의 빈틈을 이용하여 혐의를 벗었다. 그리스 공권력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대처한 건 아니나, 그리스는 독재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다. 대중의 무의식은 이 7년간의 암흑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스는 다른 나라처럼 그렇게 쉽게 용서하는 사회가 아니다.
 2005년 프랑스 소요사태와의 극명한 차이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법과 질서'라는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선봉에 설 수 있었으나, 그리스 국민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진압에 맞서며 우파 정부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국민동맹의 진두 지휘를 하고 있는 건 어린 학생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곳 고등학생들은 대학 입학을 제일 목표로 평소 과도한 학업에 시달린다. 입학 시험이 무척 까다로워서 12세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 이어 대학에 입학한 행복한 학생들은 취업 후 월급이 기껏해야 한 달 700유로라는 현실을 대학 입학 이후에나 깨닫는다.
 
 '700유로 세대'의 가혹한 현실
 그리스에서는 오래 전부터 '700유로 세대'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일부는 '700유로 세대'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들의 목소리를 높여줌과 동시에 이들에게 무상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임금 700유로의 '기회'를 잡은 사람들조차 하도급 계약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정규직은 예외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사회보험의 혜택을 받는데다, 입사 후 13개월부터는 해고 수당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공분야에서까지 흔히 나타나는 하도급계약 근로자들은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임시직'이 아닌 근로자 '임대직'이라고까지 불리는 실정이다.
 학생들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처럼 가혹한 현실 때문이다. 한 통계연구소  대표인 스트라토스 파나라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재의 경기 지표 및 미래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사회 계층, 교육 수준, 성별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실망이 무척 크며, 앞으로 더 나아질 거란 기대도 없다. 1981년부터 매달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는 산업·경제연구재단 또한 경기지표가 이례적으로 낮은 수준임을 인정했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평범한 소시민들에겐 상황 분석에 필요한 수단이 없다. 이들을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이들 진영과의 경계선을 그은 것은 경찰의 폭력이다. "언제나처럼 당황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 사살 사건을 흑백 논리로 판단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이 비극을 선과 악으로 구분 짓고 선의 편에 든 것."이라고 파나라스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 같은 참여가 정책입안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며, 제도도 정당도 젊은 층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다. 1950년 이후 그리스 정계는 세 개의 정파가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신민당(우파)과 사회당(Pasok)이 권력을 양분하고 있다. ('국외파'라 불리는) 공산당(KKE)의 경우 스탈린적 전통 때문에 딱히 해법을 제시해줄만한 대안 세력으로는 떠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안부재의 정치권, '급진좌파' 부상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는 대부분 1968년 창설된 '국내파' 공산당 출신이다. 이들은 젊은 층과 소통하는 법을 보다 잘 알고 있다. 시리자의 높은 인기도도 이로써 설명된다. 2007년 9월 총선에서는 5.04%의 미미한 지지율을 얻어냈으나, 그로부터 6개월 후 치러진 여론조사에서 시리자의 지지율은 13%로 예상됐다.
 선거에서 좌파 및 진보세력 연합을 선두로 이끈 주인공은 33세의 젊은 정치인 알렉시스 치프라스였다. 그는 이처럼 당의 위상이 높아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현 문제에 대한 당초 그의 입장 때문만이 아니라 (대통령 접견시 젊은 이민자 여성을 대동하는 등) 언론 플레이 또한 훌륭히 펼친 덕에 그는 일부 젊은 층의 지지를 받게 됐다. 거품이 빠지고 '정상화된' 여론조사에서도 급진좌파연합은 현재 8%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공산당 지지율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공산당으로선 이해불가의 상황이다.
 반체제 성향의 좌파 내부에서 패권 경쟁이 일어남에 따라 공산당 측은 신민당 정권 및 인민당(LAOS, 극우)이 좌파연합을 두고 '난동 패거리'라며 공개적 비난을 하고 나섰을 때, 우파 진영의 손을 들어준다. 문제의 진원에 관한 논의로부터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희생양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사회당은 조기 재집권의 욕심에서 침묵 노선을 취한다.
 정부의 책임도 막중하다. 2004년, 투명성 확립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처음으로 집권에 성공한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총리 진영은 이전 정권보다 더욱 심각한 정치 스캔들에 발목이 잡혀있다. 뇌물수수, 호화생활, 족벌주의 등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최근에는 아토스 산 수도승들에게 국영지를 불법 매각한 것과 관련하여 정치 스캔들이 불거졌으며, 그 책임자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부패가 만연해있는 이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그 어떤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두건이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복면대'라고도 불리며 깨부수고 불지르는 급진적 성향의 시위대는 알렉산드로스가 목숨을 잃은 아테네 중심가 엑사르치아 광장에 즐겨 모인다. 그리스판 '그리니치 빌리지'인 엑사르치아 지구가 1973년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과감한 시위를 벌인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 옆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경찰 당국은 이들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이곳에서 아나키스트와 공권력 사이의 대치는 이미 오랜 전통이다.
 
 부패한 정권, 정당에 대한 분노 폭발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된 소요 사태의 모습은 특히 이들 두 세력 간의 불꽃 튀는 대치 장면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아마 이번 소요사태가 평소의 광경과는 현격히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우선 '난동을 부리는' 군중의 수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게다가 시위는 아테네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라 일군의 도시 전체에서 일어났다. 더욱이 도심지에서의 폭력사태는 수일간 지속되었다. 이는 그 때까지만 해도 무정부주의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학생들 대다수가 시위에 참여했음을 뜻한다. 도심 곳곳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너머로는 13세~14세 중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정부는 '복면대'를 들먹이며 '민주주의 침해론'을 펼쳤다. 시위대 입장에선 '대관절 무슨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반박하기 십상이다. 물론 중고생들이 파출소에 돌을 던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은행 건물 여러 곳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며칠 앞서 그리스 정부는 수십만 그리스 국민들이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 은행들에게 280억 유로의 돈더미를 갖다 주지 않았던가? 더욱이 은행들은 채권추심업체에 사주하여 갖은 모욕을 다 주고 협박하며 기어이 돈을 뜯어내서 소액 대출금을 상환시킨 장본인이다.
 격렬히 표출되는 학생들의 분노가 그렇다고 해서 정치화된 건 아니다. 하지만 극좌 세력을 제외하곤 정당들 자체가 시위대의 요구에 귀를 막고 있는 상황인데, 학생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대화 창구가 열린 것도 아니요,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며, 하물며 결론도 나지 않고 있다. 마치 소요 사태가 끝장이 날 때까지 학생들이 더 깨부수고 난리치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다."고 파나라스는 지적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수많은 시위 참가자들은 다음 도발 건수가 있을 때까지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과격 집단의 불씨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직 기자 출신으로 한때 프랑스·스페인·그리스 등지에서 열성 무정부-공산주의자로 활동하던 알렉산드르 요티스는 "미칼리스 칼테자스 사살 사건 이후가 그랬다."고 주장하며 "특히 11월17일 테러 조직의 대오를 늘려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선에서 물러난 요티스는 그러나 집회에서 휘날리던 깃발들 대부분은 붉은색 및 검은색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굶주리고 성난 시민·학생들 참여
 언론, 특히 TV에서 보도되는 정부 선전 내용 가운데에서는 두 가지 요소가 눈에 띤다.
 첫 번째는 소요 사태에서 이민자들이 담당하는 역할과 관련된 부분이다. 불에 탄 상점을 털어간 게 굶주린 이민자들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TV에서는 특히 아시아에서 "시위하고 깨부수고 훔치는 행위 등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격한 행동을 보여준 건 무엇보다도 부패한 정치 제도에 반기를 든 그리스 본토박이 주민들이었다. 집시들이 약탈행위에 참여했다면, 이는 특히 자신들이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집시들 그 자신 또한 경찰 진압의 잊혀진 희생양이 아니던가.
 약탈자 무리에 끼어든 건 굶주린 군중들이었으며, 그 가운데 대다수는 그리스인이었다.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새로운 현상이다. 예전에는 시위대 내에서 대학생과 노조가 선봉에 선 뒤 그에 뒤이어 정당들이 행진했고, 좌파연합은 후미에서 따라왔다. 그 다음에 오는 게 아나키스트들이었고, 열기가 달아오르면 아나키스트들은 좌파연합의 대오에 합류했다. 그리고 모두가 얻어맞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아나키스트 뒤에 새로운 무리가 형성됐다. 바로 굶주린 시민들이다. 이민자들, 마약중독자들,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은 집회에 오면 먹을 게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권력과 언론의 두 번째 합작품은 '성난 군중'이 집결하여 법을 수호하고 난동 패거리들을 퇴출시킬 것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이 보안기동대를 몰아내려 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게 주인들이 꺼지라고 소리치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뛰어들어 붙잡힌 중학생들을 풀어준다. 아이들을 집에다 붙잡아둘 수 없게 되었음을 인식한 부모들이 함께 거리로 나와 이들을 보호해주고 있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그리스 소요 사태는 국외로 '수출'되거나 다른 사회운동과 결합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모보다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가 없는 세대가 나타난 게 그리스에서만의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