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엔 고리채, 금융자본엔 화수분

2011-11-11     앙투안 뒤미니·프랑수아 뤼팽

민주적 의사결정에서 독립돼 있는 유럽중앙은행(ECB)이 통화안정에만 주력하는 동안 유로존은 해체 직전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경제위기 덕분에 ECB의 권한은 오히려 강화됐다. 유럽 임금노동자들의 운명은 이제 ECB 본부가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클로드 트리셰 총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ECB) 본부 2층에서 진행된 임기 마지막 기자 브리핑 자리에서 지금까지 입에 달고 다니던 ‘구조개혁’이라는 말을 영어로 되풀이했다. 발표문을 읽지 않고도 내용을 훤히 꾀고 있을 터였다. 그는 8년 전 ECB 총재로 처음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노동시장의 구조개혁’을 주장해왔다. 후렴구처럼 되풀이되는 이 주장이 (반드시) 그 한 개인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전임 총재 빔 다위센베르흐 역시 거의 매달 같은 말을 주문을 외우듯 반복했다. 유로화 출범 직후부터 모두 귀가 따갑게 듣던 말이다. <<원문 보기>>

지난 9월 8일, 같은 주장이- 다소 난해한 구석이 있지만- 더욱 구체화된 형태로 제기됐다. “인플레이션에 자동 연동되는 임금 산정 의무를 없애고, 개별 사업장 단위의 임금협상 방식을 강화함으로써 임금과 노동조건이 각 기업의 고유한 필요에 부합해야 한다. 이 조처들은 구조개혁과 함께, 특히 서비스 산업의 개혁- 국내인에게 독점된 직업의 개방 조처 포함- 과 적절한 수준에서 공공부문 민영화를 통해 생산성과 경쟁력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유럽 녹색당 소속 의원 파스칼 캉팽이 말한다. “소련이 몰락하기 몇 달 전의 공산당 정치국에 와 있는 기분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동일한 견해, 동일한 표현의 반복일 뿐이다.”

유럽의회 금융·경제·사회 위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캉팽 의원이 말을 잇는다. “위기의 원인은 전혀 건드리지 않는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어젠다다. 노동시장 유연화, 공공서비스 축소, 기업의 노동권 협상 자율화 등의 조처가 금융 규제 완화에서 야기된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ECB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계획을 그대로 따라할 뿐이다. 이미 실패가 드러난 계획인데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PIGS의 제2정부

같은 말만 되풀이되는 프랑크푸르트의 하늘 밑에 정녕 새로운 것은 없는가? 있다. 말이 아니라 사실 속에 있다. ECB는 이제 통화정책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현실화할 수단을 거머쥐게 되었다. ECB의 전문가들은- ‘트로이카’의 나머지 두 형제, 즉 IMF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함께- 그리스와 아일랜드, 포르투갈에서 제2의 정부를 자처하고 있다. 그들은 이 국가들의 장관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들이 작성한 ‘15계명’을 강요한다. 부분실업제 확대, 농업 종사자 연금 삭감, 공공지출 축소 등의 내용이 여기에 포함된다.

<르피가로>는 트리셰 전 총재와 마리오 드라기 새 총재가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보낸 서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ECB는 해고 과정을 더욱 유연화하도록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부문별 협약에 따르는 방식보다 사업장별 임금협상 방식을 채택하고 지방자치단체 소유 기업들(대중교통·도로관리·전기공급)을 민영화하도록 요구했다”. 민주주의 제도를 염려하는 ECB 회원국의 두 중앙은행장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이 조처들은 행정명령을 통해 즉각 시행하는 편이 좋다. 법안을 제출해 국회 통과를 기다리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르피가로>는 ‘ECB, 사실상 이탈리아를 통치하다’라는 기사 제목을 뽑았다. 전 EU 집행위원 마리오 몬티는 ECB가 ‘외국인 행정관’(Podesta)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

이는 조언 혹은 강한 권고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그렇다고- 직책상 완곡어법을 즐겨 쓰는 ECB 관리들이 주장하듯- 단순한 ‘메시지’는 더욱 아니다. ‘명령’ 혹은 ‘일방적 강요’라고 봐야 할까? 정확히 말하면, ECB는 조건들을 제시한 것이다.

정치학자 클레망 퐁탕은 “지금까지 ECB는 실제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ECB가 말하면 정치 지도자들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당연하지, ECB는 보수적이니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고 기분을 맞춰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위기가 불어닥쳤다. ECB는 처음엔 그들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독립과 불개입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지고 정부와 은행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하자 급기야 마음을 바꾼 것이다.” ECB는 결국 어려움에 빠진 국가들의 채무를 사들여야 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해당 국가들은 이제 ECB가 예전부터 주장해온 구조개혁 제안을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1990년대 말 IMF가 아르헨티나에 한 일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채권자는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고 간주되는 개혁안을 채무자가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결국 금융위기는 ECB에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ECB에 대한 논평을 보면 이 ‘절호의 기회’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심지어 가장 비판적인 논평가들조차 트리셰가 ‘훌륭한 정치가’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반대자들은 그를 ‘유일한 유럽의 지도자’라고 비아냥거린다. 그가 역사가 만들어준 ‘절호의 기회’를 붙잡아 자신과 ECB의 권력 강화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유로타워의 꼭대기층에서 이 위대한 은행가를 기다리고 있다. ‘은행의 도시’ 혹은 ‘방크푸르트’(Bankfurt)로 불리는 독일 금융의 중심지, 프랑크푸르트의 건물들이- 코메르츠방크, 드레스드너방크, 도이치방크의 트윈타워- 창 너머로 내려다보인다. ECB 본부가 이곳에 위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 아침 바로 이곳 37층 회의실 원탁에서 17개 회원국(프랑스·독일·슬로바키아 등)의 중앙은행장들이 모여 기준금리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ECB 총재가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기자회견이 끝나는 대로 곧장 자리를 뜰 기세다. 마치 회의 개시를 알리듯 그가 앞에 놓인 작은 종을 울린다.

완곡어법의 명령, ‘초긴축’

한 기자가 묻는다. “조금 전 언론 브리핑에서 기업별 임금협상, 공공서비스 민영화, 임금 유연화 등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직접적인 정치적 개입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혹시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려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트리셰 총재가 웃으며 대답한다. “나와 내 동료들은 유럽의 경제성장과 고용촉진을 위해 그런 조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총재님이 주장하시는 구조개혁은 개방, 규제 완화 등 1980년대 IMF가 추진했던 구조조정 계획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한 IMF식 개혁이 오늘날 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 등에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증세·임금인상 대신 노동 유연화

ECB와 IMF의 비교를 거부하기는커녕 트리셰 총재는 우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논리를 내세운다. 그는 IMF의 계획이 효과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국가들이 현 위기에 가장 잘 버티고 있나요?” 트리셰 총재가 반격에 나선다. “신흥국들과 남미 국가들입니다. 이 국가들의 강한 위기 대응력은 구조조정 덕분입니다. 현재 아프리카 경제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혁 덕분에 생산력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자도 말년에는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2003년 이 자유주의 사상의 대가는 아르헨티나 위기에 대해 “IMF가 이 사태에 책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2)며 한풀 꺾인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르헨티나가 현 위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은 오히려 IMF의 권고를 따르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3)

질문이 이어진다. “왜 법인세 인상을 요구하지 않는 겁니까? 1980년대에는 50%였던 세율이 지금은 33.3%로 떨어졌습니다. 더욱이 CAC40 상장 기업들에 적용되는 실제 세율은 7%에 불과합니다.”

“항상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관계를 따져봐야 합니다.” 트리셰 총재는 기자들의 순진한 질문에 다소 지쳤다는 표정이다. “프랑스 내에서 이뤄지는 경제활동에 다른 곳에 비해 많은 세금을 걷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투자자들은 철수하고, 프랑스인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사회정의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가령 신흥국들보다 세금을 더 많이 걷는다고 해서 프랑스에 일자리가 많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한 더 높은 차원의 이해관계가 부유층의 이익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다면 그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우연일 것이다.

지난 2월 20일 트리셰 총재가 <유럽 1> 방송에 출연해 흥분해서 한 말은 단지 상식적 차원에서였을까? “유럽에서 임금을 올린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당시 주주들이 13% 인상된, 총 400억 유로가 넘는 배당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말이었을까? 그는 2006년 청년들의 반대시위에도 아랑곳 않고 도미니크 드빌팽 정부의 최초고용계약제(CPE)(4)를 지지하면서 형평성을 들먹였고(유럽 전역을 돌며 ‘노동시장 유연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금융계의 보너스 지급 관행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불안한 직종에 근무하는 이들이 그만큼 높은 수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엄청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트레이더들을 걱정해주는 이 배려심!). 프랑스·아일랜드·포르투갈 등에서 퇴직연령을 연장할 때 지지를 보낸 것 역시 사회정의에 대한 그의 철학에서 나온 행동이었을까?

정치적 독립성? 경제적 편파성!

그러나 그는 이런 비판이 지나치게 정치적 기준에 의한 것이라며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는 ECB가 ‘비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17개 회원국 정부, 3억3200만 시민,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치적 주제와 관련한 질문은 삼가달라”고 주문한다.

1978년 발레리 자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 엘리제궁 고문으로 활동했고, 1986년 에두아르 발라뒤르 정부에서 경제 및 민영화 장관 밑에서 일한 경력을 보건대,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파로 분류된다. 그러나 ECB의 총재가 된 그는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미명 아래 ‘과학’으로 포장된 판결들을 내리면서 자주 여론의 비판을 피해왔다. 지난 10월 15일 수천 명의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하라’ 시위대가 유로타워 앞에 운집하기 전까지 카이저슈트라세 29번지의 건물을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사회학자 프레데리크 르바롱은 “ECB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힘을 키워왔다. ECB는 정당과 정부들 위에서 전문가적 위치를 고수해왔다”고 말한다.(5)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항상 겉으론 복잡해 보이는- 혹은 복잡하게 만든- 문제들만 다루다 보니 시민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예전부터 ECB의 통화정책은- 강한 유로화,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 정치적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예산·조세·복지와 관련된 결정까지 ECB의 전문가들 손에 넘어가고 있다.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로 자신들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그에 대한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계가 아니라 금융계 내부에서 제기됐다.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제지 기자들은 트레이더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들은 포르투갈에서 실업률이 치솟고, 그리스에서 당뇨병 치료약이 의료보험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아일랜드에서 퇴직연금이 삭감된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트리셰 총재를 화나게 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9월 8일 기자회견에서 독일 경제일간지 <뵈르센차이퉁> 기자는 그에게 ‘ECB가 위기에 처한 국가들의 부채를 사들이면 경제 안정을 담보할 임무를 띤 ECB가 배드뱅크(Bad Bank)가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기자회견 다음날, ECB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독일인 수석 경제학자 위르겐 스타르크가 사표를 제출했다. 지난 2월에는 악셀 베버가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 총재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동시에 ECB 이사회를 떠나겠다는 의미로, ECB가 추진하는 정책- 그의 눈에 너무 느슨해 보이는- 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그는 10월 31일 임기가 끝나는 트리셰 총재의 후임 자리 제안도 거절했다. 참으로 어이없게도, 충분히 보수적이지 않다는 게 그가 ECB 총재를 비판한 이유였다.

민간은행은 쌈짓돈 쓰듯 대출

방문증 스캔을 받고 유로타워 2층에 들어서자 트레이딩룸이 눈앞에 펼쳐진다. 별로 화려하지 않은 방에 100여 대의 컴퓨터가 줄지어 놓여 있고,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그 앞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큰 화면 위로는 주가 차트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곳에서 상업은행에 대한 대출 업무가 이루어진다.” 폴 메르시에 금융 자문위원이 설명한다. 정확히 말해 유럽 각국으로 유동성을 투입하는 곳이다.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 대규모 대출 입찰이 이루어진다. 그 뒤 ECB 이사회에서 금융시장에 얼마를 내놓을지 결정한다.”

메르시에 자문위원이 설명을 계속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각 은행이 스스로 필요한 금액을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금융위기 때문에 도입한 특별 조처이다.” 이방 프레샤르가 옆에서 말을 거든다. “간단히 말해, 은행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만큼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다. 고정금리 완전배정(Full Allotment) 방식이다.”

완전배정? 한마디로 ‘질릴 때까지’ 실컷 퍼주겠다는 것이다. 유럽의 각 정부는 가장 가혹한 조건으로 돈을 꿔야 하는 반면, 은행들은 거의 셀프서비스로 돈을 가져다 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트리셰와 드라기 신임 총재는 소시에테제네랄, HSBC, BNP파리바 등의 은행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조세천국에서 발을 빼고, 국가 부채를 투기 대상으로 삼지 말고, 실물경제에 투자하라고 권고한 적이 없다. ECB의 어떤 관리들도 크레디아그리콜이나 코메르츠방크를 방문해 장부를 조사하거나 (그리스 보건부에 대한 조사에서 보여준 엄격한 태도와 달리) 오만한 태도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손수건·우산·커피잔·초콜릿 등 기념품을 판매하는 ‘유로부티크’ 앞 의자에 앉아, 파스칼 캉팽 의원이 현재의 상황을 요약해줬다. “ECB는 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유동성을 투입하려고 그동안 잠겨 있던 수도꼭지를 열었다. 문제는 유동성이 흐르는 파이프가 새고 있다는 것이다. 유동성이 투입돼도 실물경제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그 사이에 있는 상업은행들이 아직도 투자보다는 투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ECB의 역할은 이 유동성의 흐름을 바로잡는 데 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ECB는 이를 위해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 돈은 실물경제로 가지 않는다

미구엘 포르타스 유럽의원(GUE·유럽통합좌파)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 문제를 비판해왔다. “그들은 포르투갈 국민에게 자신의 구제계획을 강요했다. 그러나 ECB가 빌려준 780억 유로 중 540억 유로가 채권자에게 흘러 들어갔다. 사람들은 ‘국가빚을 짊어진 은행들에 우선권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돈을 대기 위해 임금을 내리고(최저임금이 485유로에 불과하다) 연금을 삭감해야 했다(평균연금이 300유로를 넘지 않는다). 물·가스·전기 요금이 각각 17%·18%·20% 인상됐다. 현재 부가가치세(VAT)는 23%에 달한다. 이 모든 게 투자자들을 붙잡아야 한다는 핑계로 대자본을 구제해주는 동안 일어났다.”

아일랜드에서도 ECB는 본색을 드러냈다. “지난봄 총선에서 노동당은 ‘우리 식으로 갈 것인가, 프랑크푸르트식으로 갈 것인가’라는 슬로건을 반복해서 외쳤다.” 역시 유럽통합좌파 소속인 폴 머피 유럽의원이 설명한다. “노동당은 은행과 민간 채권자들도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ECB는 채권자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선거에서 승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일랜드의 자칭 사민주의자들은 다른 유럽의 사민당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금융시장과 ECB, IMF, EU 집행위원회 트로이카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투기자본그룹에 취업하는 간부들

ECB는 공식 석상에서 지금도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마스트리흐트 조약 107조를 근거로 내세운다. “ECB와 모든 회원국의 중앙은행 혹은 산하 결정기관들은 EU 기관이나 회원국 정부, 그 밖의 기관들의 지시를 요청하거나 따르지 않는다.” ECB는 정치권력에서 완전히 독립된 기관인 셈이다. 금융계는 트리셰 전 총재와 마찬가지로 드라기 신임 총재가 자신에게 우호적임을 잘 안다. 드라기는 골드만삭스가 그리스 재정 상황을 조작하던 당시, 골드만삭스 유럽 지사 부사장으로 국가 부채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던 인물이다.

1998~2006년 ECB의 수석 경제학자이고 유로화의 정신적 대부로 알려진 오트마어 이싱은 드라기와 반대로 공직을 떠나 골드만삭스의 국제자문이 됐다. 분데스방크 총재이자 ECB 이사회의 독일 대표이던 악셀 베버는 대학 강단으로 돌아가는 대신- 조세회피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스위스 은행 UBS의 부사장이 되어 170만 유로의 연봉과 스톡옵션을 받았다.

이들 중 누구도 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금융조사기관에서 일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이렇게 끝까지 ‘독립’을 고수하고 있다.


물가 지킴이에서 은행 지킴이로

유럽중앙은행(ECB)은 1998년 6월 ‘물가 안정 유지’(유럽연합 운영 조약 2조 282항)라는 유일한 목표를 위해 창설됐다. ECB의 모든 업무는 이 목표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고용 극대화’라는 공식적 목표 아래 움직이는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ECB는 “물가 안정이라는 목표를 벗어나지 않는 틀 안에 자유경쟁에 기초한 시장경제 원칙을 존중하면서 유럽경제 공동체의 경제정책을 지원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다. 장기적 관점에서 소비자가격 상승률(혹은 인플레이션율)이 2%를 넘지 않는다면 물가가 안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ECB는 유럽 내 화폐 발행을 담당한다. 유로존 17개 회원국에서 유통되는 화폐가 이곳에서 발행된다. 유로존 내 각 지역은행들에 신용을 제공하는 일도 하고 있다.(6)

ECB의 최고결정기관인- 영어로 ‘보드’(Board)라고 불리는- 이사회는 각 회원국 중앙은행장과 이사 6명(회원국 정상들의 공동 합의로 임명)으로 구성된다. 매달 두 번 소집되는 이사회는 상업은행에 자금을 대출할 때 적용되는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사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다.

‘물가 안정’에 주력하던 ECB는 ‘금융 안정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ECB는 2010년 봄 그리스와 아일랜드 국채를 사들인 데 이어 2010년 말과 2011년 초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2011년 여름에는 이탈리아의 부채를 매입했다. ECB가 ‘증권시장 플랜’(Security Market Plan)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까지 투입한 금액은 10월 현재 1650억 유로에 달한다(8월 초에는 740억 유로에 불과했다). ECB의 이런 조처에 독일의 정치지도자들은 ECB가 악성 채권을 대신 처리해주는 ‘배드뱅크’가 되어가는 것 아니냐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글. 앙투안 뒤미니 Antoine Dumini / 프랑수아 뤼팽 François Ruffin (언론인)

번역. 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Richard Heuzé, ‘ECB, 사실상 이탈리아를 통치하다’, <Le Figaro>, 파리, 2011년 8월 8일자.
(2) ‘자유주의의 승리’, <Politique internationale>, n°100, 2003년 여름호.
(3) 세실 랭보, ‘아르헨티나의 부부 대통령, 페론 흉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0월호.
(4) 2006년 기회균등법에 의해 도입됐다가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지자 다음달 폐지된 제도다. 26살 이하로 첫 직장에 취업한 직원들을 처음 2년간 특별한 사유 없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5) Frédéric Lebaron, <통화 질서 혹은 사회적 카오스?: ECB와 신자유주의 혁명>, Editions du croquant, collection <Savoir/Agir>, 벨콩브앙보주, 2006.
(6) ‘세기의 강도’, <Manière de voir>, n°119, 2011년 10~11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