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세계관은 어떻게 자리잡는가?

부르디외의 미발간 글 최초공개

2021-12-31     피에르 부르디외 l 사회학자

20세기 후반에 정립된 부르디외 사회학은 한때 ‘이단’으로 취급되며 배척 당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고등학교 정식 교과목으로 자리잡았다. 무수한 지식을 쏟아낸 이 사회학자의 연구에서는 특히 ‘장(場, champs)’이라는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 때때로 그 의미가 왜곡되기도 하며,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장’ 개념에 대해 1995년 11월 부르디외가 설명을 제시했다.

 

정치, 사회과학, 언론. 이 3개의 장은 각각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 영역이다. 가령 선거일 개표 방송에는 이 3개의 장이 각각 인간, 전문가의 형태로 등장한다. 정치학 연구소장, 역사학자, 기자는 각각 그가 맡은 장의 전문가로서 선거결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들은 여론조사 기관에서 내놓은 각종 통계자료를 근거로 언급하지만, 그 기관에 자문을 준 것 또한 본인이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점적으로 부각하며) 상호작용론 관점에서 설명하기도 하고, 후보가 사용한 수사학이나 선거운동 방식 및 전략 등에 대한 담론 분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장(場, champs)’을 중심으로 한 분석 모델에 따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장’ 기반의 분석 모델에서는 위 개표 방송에서의 상황을 단순히 개인 3명의 대담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가 기자에게 말을 걸 때, 이는 한 역사학자가 한 기자에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니다. 장 개념을 통해 본다면 이는 사회과학 학문장에서 결정적인 위치에 있는 한 역사학자가, 언론장에서 결정적인 위치에 있는 기자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즉, 언론장과 사회과학장이 대화를 나누는 셈이다. 또한 기자가 (정치적인 논의보다 상위의, 포괄적인 견해를 듣기 위해) 역사학자와 함께 상호작용을 한다면, 언론장과 사회과학장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특성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앞의 경우처럼) 역사학자에게 보다 높은 지위가 부여된다면 이는 역사학자 자체의 자질이나 특성이 기자보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속한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장이 (특정 측면에 있어) 언론장보다 상징적 차원에서의 객관적 우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는 언론장이 사회과학장보다 상징적 차원에서의 객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가령 대중과의 친밀성 측면에서는 언론장이 사회과학장보다 우세하다.) 따라서 ‘장’ 개념으로만 본다면 선거 개표 방송에서의 TV 토론 무대는 특정 장이 지닌, 직관적이지 않은 무수한 속성들을 쏟아낸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의 ‘장’에 대해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율성의 정도’다. 일례로 언론장의 자율성은 수학장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사회학장에 비해서도 현저히 낮다. 그러나 아무리 자율성이 낮다고 해도, 그 자율성으로 인해 언론계의 일부 상황은 우리가 ‘언론’이라는 ‘소우주’를 그 자체로서 인식할 때, 그리고 그 소우주에 속한 이들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장의 작동 구조와 논리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장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젠가 마르크스는 ‘의회주의’라는 정치영역이 사회의 계급투쟁을 소재로 한 공연을 선보이는 일종의 ‘연극 무대’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다만 이 무대에서는 사회 내의 투쟁이 그다지 진지하게 펼쳐지지는 않는다. 진지한, 진정한 계급투쟁이 펼쳐지는 무대는 다른 곳에 있기에, 이곳에서의 ‘투쟁’이라는 것은 다소 현실과 거리가 있다. 여하튼 마르크스는 이를 통해 정치장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지적한다. 아무리 자율성이 떨어지는 정치장이라 해도, 약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치장 안의 사람들을 단순히 해당 분야의 ‘노동자’로 묘사하는 데 그친다면, 정치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입지와 영향력이다. 정치장 내에서의 그의 입지가 얼마나 자율적인지, 소속 정당의 자율성은 어느 수준인지, 그가 당내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가졌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장은 자율성이 높은 편인 만큼, 장의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측면이 강하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제약이 많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국민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끝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유권자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장은 이런 국민의 요구에 별로 얽매이지 않는다. 실제로는 자기폐쇄적 성향을 보이며 자신들의 문제만 가지고 다투기 바쁘다. 정당끼리, 그리고 당내에서 권력을 쥐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장 내부의 일들은, 대개 정치장 내부의 공모관계에서 비롯된다(그리고 바로 여기에, 포퓰리즘의 덫이 도사린다). 의회주의나 민주주의와 적대 관계에 있는 파시스트 정당의 언어로 바꾸면, 이런 공모관계에 가담하는 것은 일종의 부패 놀이에 동참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실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이상 모두가 공범이고, 장의 지배적인 관점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장 내부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이는 장이 작동하기 위한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장 내부의 투쟁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적대자조차 장을 작동시키는 전제조건을 일정 부분 수락한다. 서로 싸우려면 대립관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치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회과학장 및 언론장과의 공통점을 딱히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3개 장은 사실 서로 비슷하다. 셋 다 자신들의 세계관이 가장 올바르다고 믿으며, 아울러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구분하는 그 주된 원칙을 인정받기 위한 내부 투쟁 공간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내에는 기본적으로 인식적 범주가 존재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나누는 원칙이 작용한다. 이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융합된 조직체이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가령 사회에는 남성과 여성, 높고 낮음, 희귀함과 보편적임, 남다름과 저속함 등 대개 서로 짝을 이루는 형용사를 통해 분류되는 범주가 존재한다.  

사회학자나 역사학자, 정치인, 기자 등 습관적으로 의사를 표명하고 전달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나누는 실질적인 원칙을 표출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이 같은 인식과 구분의 원칙을 부과하고, 아울러 사회를 구성하는 적법한 범주로서 이를 인정받게 하기 위해 싸워나간다는 점이다. 가령 어떤 주교 하나가 일간지 인터뷰에서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이 무슬림 프랑스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20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자기 견해를 표명할 경우, 그의 이 같은 예측은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다. 

이는 인식적 범주를 적법하게 조작하려는 것에 대한 적절한 예시이자 암암리에 은근히 특정한 인식적 범주를 강요하는 상징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다. 하나의 인식적 범주가 권위에 더해 적법성까지 얻었으니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이슬람 신도가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그리고 다시 이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테러리스트와 은연중에 연계된다.

따라서 현실을 구성하는 각 범주를 겉으로 드러내어 이를 자리잡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도식 구조를 (겉으로 보이는) 외연적인 범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어 ‘kategorein’에서 온 ‘범주Catégorie’라는 표현은 ‘공공연히 비난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행하는 범주화 행위도 대개는 모욕적 처사에 해당한다. “너는 그저 ~~한 사람일 뿐이야”라고 하거나 “교수 나부랭이”라는 식으로 상대를 범주화하는 것은 대부분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깎아내리는 행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종차별적인 모욕도 대상을 범주(Catégorèmes)에 따라 구분하는 행위에 속한다. 즉, 별다른 기준이나 일관성 없이 대개 암묵적으로 작용하는 범주화 원칙에 기초한 분류 행위인 셈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L’Ontologie politique de Martin Heidegge)』에서 시도한 철학장의 분석에 따르면, 하이데거 연구의 주된 철학적 명제 몇몇에서는 상반된 상식적 개념이 범주화돼 등장한다. 가령 ‘유일한 것’ 혹은 ‘희귀한 것’의 개념이 ‘보편적인 것’이나 ‘통속적인 것’과 대비되고, ‘고유한’ ‘실재적 주체’ 등이 ‘대다수’의 ‘세인(世人)’, 범인(凡人) 등과 상반된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고귀한 이들’과 ‘저속한 자들’이라는 차별적 대비는 이를 교묘한 철학적 대비로 둔갑해, 철학 교수자의 눈도 속인다. 제아무리 민주적인 교수자도, 고도의 인종주의가 그 기저에 교묘하게 깔린 표현임을 미처 지각하지 못한 채, ‘실재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주체 ‘세인(世人)’에 관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글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3개의 장에 속한 사람들은 대상을 규명하는 암묵적인 원칙을 겉으로 명확히 드러내고 이를 체계화해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또는 종교장에서처럼 즉각적인 원칙으로 자리잡게 하고자 노력한다. 그 다음 단계는 이 같은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합법적인 상징 폭력을 독점하기 위한 투쟁은 곧 ‘왕권(royauté)’에 준하는 절대적인 상징 권력을 점유하기 위한 싸움이다.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Émile Benveniste)는 『인도-유럽 사회의 제도 문화 어휘 연구』라는 저서에서 ‘왕(Rex)’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왕(Rex)’은 ‘지배하다(Régir)’, ‘다스리다(Diriger)’는 뜻의 동사 ‘Regere’와 같은 어족에 속한다. 왕의 주된 역할이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쟁기로 도시 성벽의 경계를 그은 것처럼 국경을 확정하고 경계를 다스리는 일(Regere fines)이기 때문이다. 

분류를 하는 이유도 기실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정쟁의 한 비극은 국민전선이라는 신참자의 난입에 따라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는 원칙이 정치장 내의 모든 주체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부자와 빈자를 구분하던 기존의 지배적인 분류 원칙이 그 힘을 잃었다. 이야말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할 이유다. 

 

개인적인 생각과 주도적인 사상

이들 장의 공통분모 외에 각 장 고유의 논리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장의 경우,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자기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수치를 인용하며 싸우는 두 정치인의 토론에서 관건은 자신의 정치적 세계관을 관철시키는 데 있다. 각자가 제시하는 세계관은 실질적인 기준 자료를 갖춘 만큼 객관성이 확보되며, 해당 세계관을 따르는 사람들을 토대로 사회적 차원에서의 지지 기반을 마련한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사변적인 생각이, 해당 세계관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동원함으로써 하나의 주도적인 이념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결집 행위로, 역학관계를 강화하거나 변형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나의 관념이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원칙으로 인정받으면 힘을 얻게 되고, 결국 하나의 주도적인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개인의 사적 소견이라면 반박하기 쉽지만,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힘을 가진 이념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주도적인 이념으로써 맞설 수밖에 없다. 반대 세력과 시위를 동원할 만한 힘을 갖춘 이념이라야만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주로 시청률에 발목이 잡혀 정치적 경제적 제약에 점차 구속됨으로써 보다 더 타율적이 돼가는 언론장은 (사회과학장, 철학장 등의) 문화생산장이나 정치장을 비롯해 다른 모든 장을 구속하려는 속성을 보인다. 그런데 장이란 내부에 다수의 힘이 존재하고 상호 간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투쟁을 벌이는 공간으로서, 이 투쟁의 주된 목표는 힘의 장에 변형을 가하는 데 있다. 즉, 하나의 장에서는 장내 투쟁의 쟁점이 되는 것을 정당하게 점유하기 위한 경쟁이 존재한다. 

언론장에서의 쟁점은 다름 아닌 대중의 관심이다. 대중을 얻기 위해,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들(속보, 특종, 독점 정보, 유명 인사 등)을 점유하기 위해 내부에서 끊임없이 경쟁한다. 재미난 점은 ‘자유의 전제조건’이라는 이 경쟁으로 인해, 상업적 통제 하의 문화생산장에서는 오히려 장의 획일화와 검열, 나아가 보수화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일례로, 프랑스의 유력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 <렉스프레스>, <르푸앙>은 더 이상 서로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속보성에 집착하며 각축전을 벌인 결과, 차별화되기는커녕 닮은꼴이 돼버린 것이다. 이들은 서로 상대의 1면 기사, 논객들, 주제를 탈취하고자 애쓴다. 이런 언론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은 다른 장으로도 확대된다. 

 

 

글·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사회학자(1930-2002). 이 글은 1995년 11월 14일 리옹2대학에서의 강연회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부르디외에게 바치는 오마주

 

2002년 1월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망한 지 꼭 20년이 되는 오늘날, 그의  변덕스러운 후손들은 이 프랑스 사회학자의 우려를 현실로 만들었다. 그의 핵심 개념을 남용한 나머지, 지식인 행세를 하기 위한 도구로 주류 저널리즘 언어에 통합시킨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칼럼니스트, 여론 조사 전문가, 법률 저술가 등은 사회운동과 급진적 언론 비판을 지지한 이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를 끊임없이 폄하했다. 부르디외가 ‘헛똑똑이들’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20년 후 자신들의 주장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디외의 ‘장(場, Champ)’, ‘아비튀스(Habitus)’, ‘자본(Capital)’ 등으로 채운 글들을 발표했다.

미덕에 대한 악덕의 이와 같은 오마주에 응답하는 두 저작이 발간됐다. 하나는 사회학자가 수행하는 정치적 역할을 조명하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부르디외의 사상적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책(1)이다. 원래 2002년에 출간됐지만 이번 달에 증보 개정판으로 재출간된 『개입(Interventions)』은 부르디외의 사회 참여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연분홍빛으로 변하면서 개량주의로 변질해가는 정치 제도를 의혹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부르디외를 발견하게 된다. 

또 다른 저서 『마이크로코스모스(Microcosmes)』는 독자를 이 사회학자의 작업실, 인간 실천의 상징적 경제가 총괄적으로 개발되는 실험실로 초대한다. ‘장(場) 이론’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이전에 출판된 사례 연구들과 출판되지 않은 원고들을 함께 싣고 있다. 오뜨 꾸뛰르에서부터 문학, 국가, 법률에 이르기까지 특정 사례에 대한 각각의 연구는 일반 모델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재료를 다듬고 재구성하면서 각 사회적 공간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고, 자율성의 개념을 재검토하고, 경제 논리의 영향력 확장을 관찰한다. ‘장 이론’은 하나의 이론에 그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인 연구 프로그램이다.

 

 

번역·김루시아


(1) Pierre Bourdieu, 『Interventions, 1961-2001. Sciences sociales et action politique 개입, 1961-2001. 사회과학과 정치적 행동』, 개정증보판, Agone, Marseille, 2022년 1월 14일; Pierre Bourdieu, 『Microcosmes. Théorie des champs 마이크로코스모스. 장 이론』, Raisons d’agir, Paris, 2022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