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르 쾨닉, 자유주의 수호자

관료주의와 법규에 반대하고 우버 기반의 자유에 찬성

2021-12-31     앙투안 슈바르츠 l 정치학자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우파 후보들은 소속 정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권위적 공약들을 앞다투어 제시한다. 이제 자유주의 우파는 사라졌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러나 몇몇 대중매체에 기대어 자유주의 우파는 여전히 영향력 강한 몇몇 지식인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행정의 단순화를 위해 싸운다.

 

지난 11월 15일, 파리 대로변의 바리에테 극장 입구에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남성들인 관객은 공연이 아니라 정치 집회를 관람하러 몰려들었다. 자유주의의 중심인물인 가스파르 쾨닉의 모놀로그가 길게 이어졌다. 다른 초대 손님도 없고 관객들과의 토론도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이 모임은 ‘Simple’로 불리는 새로운 정치운동을 알리기 위한 집회였다. 쾨닉이 때때로 언성을 높였다. “저를 움직이는 것은 관료주의적 압제라 불려 마땅한 것들에 대한 참된 저항입니다.” 그는 이 민감한 문제가 ‘은행가부터 불법체류자까지’ 모든 사람, 모든 계층에 관련된다고 주장했다. 1시간 30분 동안 그는 개인의 자유와 프랑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골칫거리들, 즉 불합리하고 복잡한 행정의 결함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쾨닉은 “스스로를 감시하는 갇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 행동으로 옮기자고 촉구하면서 끝을 맺었다.

 

부의 재분배는 폭력을 생산한다?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이미 19세기부터 자유주의 사상의 주장이었다. 중앙집권화의 문제를 다룬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은 1856년에 출판됐다. 쾨닉은 ‘진정한 자유주의’를 향한 근원으로 돌아갈 추진력이라고 주장하면서 ‘단순화’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어떤 이들은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강조가 너무 부정적이고 잘못된 이미지를 부여한다고 판단한다. 그로 인해 자유주의의 적들이 가진 자유주의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개념이 강화된다고 본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집중된, 좀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심지어 도덕적이기까지 한 측면이 있다. “휴머니즘의 유산을 되찾는 여정은, 자유주의자들이 영예롭게, 후회 없이 신자유주의를 폐기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합니다.” 쾨닉은 고정필자로 참여하는 <레제코(2019년 12월 18일)>에서 주저 없이 주장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항상 불만으로 가득하다. “불행하게도 진정한 자유주의 정치는 존재한 적이 없다. 단지 좌파 혹은 우파의 사회주의가 있을 뿐이다.” 파스칼 살린은 프랑스에서 정권을 계승하는 정부들을 거론하며 한숨지었다.(1) 그의 발언이 웃음을 유발할지는 몰라도 그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1939년생인 살린은 자유주의 투쟁의 노장이다. 도핀 파리 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보수 언론에 기고하곤 했다. 또한 경제학자로서 전 방면으로 사회주의와 싸우기 위해 1947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창설한 단체인 ‘몽페를랭 협회’에서 1994년~1996년에 회장직을 역임했다.

 

구소련 강제노동수용소로의 귀결

지식인인 살린은 나름 급진파다. 그의 저서 『자유주의』에 따르면, 공권력에 위임해야 할 사회적, 경제적 삶의 영역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대로 모든 규제는 유해한 것, 심지어 처단해야 할 악의 근원이다. 실업은 사실상 “국가 개입주의의 결과물” 아닌가? 부의 재분배는 폭력을 생산하고(“사회적 정책은 서로에 대한 전쟁”), 결국 구소련 강제노동수용소로 향할 수도 있다. 심지어 쓰레기 분리수거마저도 각자의 자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훼손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집집마다 “대학 졸업자들, 예술가들, 기업가들인 가족 구성원이 마치 노동자처럼 일하게 될 쓰레기 분리수거 공장시설”을 설치해야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일이다.(2) 

살린은 급진적 자유주의로 쉽게 넘어간다. 그러나 스스로를 자유주의자, 온건주의자 혹은 급진주의자로 규정하면서도, 이들은 동일한 지적 학파에 속하고, 동일한 저자들의 의견을 따르고,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제적 자유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에서의 자유를 요구하는 일련의 원칙들을 주장한다.

그들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승리는 확고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속박의 길』에서 근절하기 어려운 집산주의자들과 여러 지도자들(케인즈 학파, 사회주의자, 계획경제주의자)에 대항해서 맹렬하게 비난했던 냉전 시대는 이제 멀어졌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계획경제는 폐기됐고, 유럽통합과 공기업의 민영화는 국가 개입 영역을 새롭게 규정했다. 경쟁 패러다임은 공공 서비스 영역에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는 자명했다. 심지어 2008년 금융위기 때에도 그 어떤 근본적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했다.(3)

그러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상황은 다르게 해석된다. 우선, 이런 ‘성공’은 부분적이고 불확실할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낸 ‘집산주의적’ 조치 전체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제도, 연금제도, 공무원 신분 등이 그렇다. 국가의 확장은 저지되지 않았고, 행정은 ‘자발적 행동들’을 계속해서 방해하고, 세금은 공공지출의 낭비를 가져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교리의 특성들 중 하나는 바로 비타협성이다. 최대한의 프로그램을 제안하지만,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이론과 현실 사이의 심각한 격차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우파의 레닌, 대처를 소환하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자유주의 교리가 인기가 없다며 고민한다. 비지니스 영역에 대한 노골적인 관심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파에서와 마찬가지로 좌파에서도 격렬하게 공격당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자유주의자들은 조직화된 정치적 세력을 구성하지 못했다. 정치 영역에서 알랑 마들랑이 대표였던 자유민주당이나 에두아르 필리아스와 사빈 헤롤드가 창립한 자유대안당과 같은, 자유주의 기치 아래 있었던 정당들은 사라졌다. 물론 프랑스 현 대통령을 포함해 선두에 선 인물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내세운다. 그러나 프랑스에 절실한 개혁 정책들을 과감하게 주도해야 마땅한 정부는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다. 컨설팅 전문가인 마티외 렌이 말한 ‘대처리즘이 급박하게 필요’한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4)

그러나 공론장에서 자유주의의 영향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다. 전 세계에서 자유시장에 우호적인 단체들을 연합하고 있는 아틀라스 네트워크는 프랑스에서 6개의 조직을 모았다. 오랫동안 자크 가렐로가 회장직을 역임하다 최근 살린이 바통을 이어받은 ‘경제자유와 사회발전 협회(ALEPS)’는 신자유주의 확산에서 선구적인 조직이다. 코페 연구소는 렌이 회장이며, 지적 자산을 되살리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인터넷 사이트인 libéraux.org는 <콩트르푸앙(Contrepoints)>이라는 인터넷신문을 게재하는데, ‘자유주의 지하출판신문’을 표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성 산출을 위해 설립된 3개의 싱크탱크가 있다. 몰리나리 경제연구소와 경제연구유럽 연구소는 각각 경제학자 세실 필립과 피에르 가렐로가 운영한다. 세 번째는 제네라시옹 리브르 정책연구소다. 보다 상당한 재원을 소유한 몽테뉴 연구소를 비롯한 다른 연구소들 또한 이 목록에 포함될 만하다.(5)

 

수많은 논설위원들의 지원

학술적 측면에서 자유주의 학파의 활발한 활동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분야의 전문서적 출판이 이를 보여준다. 특히 벨레트르 출판사에서 알랭 로랑의 감수 하에 발간된 책들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경제학 고전의 위력 혹은 토크빌의 정치적 지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다수의 저작들을 통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엑상프로방스 경제포럼은 만석을 이루고, 미시경제학 강의에 참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게다가 자유주의 관점은 대중매체에서 유력한 중계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일간지 <로피니옹(L’Opinion)>을 비롯해, 국가의 태만과 사회보장제도의 부정행위에 대해 항상 똑같은 어조로 비난할 수 있는 상당수의 논설위원들도 확보하고 있다. 

이 광대한 집단 속에서, 제네라시옹 리브르 정책연구소는 자유주의 투쟁을 재활성화하는 자유전자가 되기를 원한다. 정책연구소는 설립자인 쾨닉이라는 인물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자 철학 교수인 쾨닉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집권 당시 크리스틴 라가르드 경제부 장관실에서 일했다. 이후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다가 그만두고 교수, 활동가로 일했다.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선에 실패한 뒤, 30세 때 2013년 자유민주당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의 상징적인 최초의 모금운동은 영국 사업가인 안토니 피셔에 의해 설립된 싱크탱크 중 하나인 정책연구센터(CPS)의 마가렛 대처 초상화 앞에서 행해졌다.(6) 이곳에서 철의 여인은 일종의 아이콘이 된다. 우파의 레닌이라 할 수 있는 대처는 집요함, 지적 단호함, 그리고 정치적 성공을 통해 사람들의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정치적 성공을 통해 영국 안팎으로 보수주의 개혁의 길을 열어 준 권력을 획득했다. 

대처의 기운에 힘입어 쾨닉은 대중매체와 유력인사들을 상대로 자유주의 여론 형성을 위해서 싸우기 위해 정치 무대로부터 물러났다. 몇 년 사이에 조직은 비약적 발전을 이뤄냈고, 연속적으로 보고서들을 출판했으며, 대중매체를 통한 개입도 계속됐다. 자금력이 제한되는 경우(2020년 예산은 33만 2,454유로로 증가함) 적은 인원으로 노선은 유지하면서 공적 토론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30대의 새 소장 크리스토프 셀처는 자유지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미국 조직인 자유학생운동의 프랑스식 조직인 “아프랑쉬”를 이끌었다. 자유학생운동은 보수주의 억만장자들과 지구온난화에 인간이 미친 영향을 부인하는 이들이 연루된 카토연구소의 후원을 받아서, 모든 형태의 공적 연대에 적대적인 프리스테이트 재단을 추종하는 학생 동아리다.(7) 

 

프랑스식 프리드먼 프로그램

이 연구소의 야심은 부유층 청년, 기업 컨설턴트, 철의 여인 대처의 열성 지지자들의 좁은 궤도를 넘어서서 여론을 주도하는 것이다. 연구소는 자유주의가 모든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철학이며,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제네라시옹 리브르를 선도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핵심 논거들 중 하나다. 그들은 삶의 선택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북돋우고 장기비소득자 정부 지원금(RSA)과 같은 모욕적인 사회복지 정책을 끝내기 위해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기본소득 금액은 많지 않을 것이고 (500유로 이하로 추정됨)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체제에 따라, 음의 소득세 형태로 국가에서 지불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제네라시옹 리브르 정책연구소는 공적 자유의 수호에 매우 적극적이다. 연구소가 설치한 ‘격리당한 자유 관측소’는 코로나 사태의 관리를 위해 공적 자유와 기본권에 대한 정부의 제한사항 전체를 조사한다. 그리고 이런 제약을 철회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철저하게 추적한다.(8) 연구소는 IT 공룡기업들에 의한 인터넷상의 감시 혹은 개인정보 이용 등과 같은 영역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 영역에서 쾨닉은 자신의 진영 인사들을 공격하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대중교통에서 안면인식장치를 도입하려는 일드프랑스 도지사 발레리 페크레스의 프로젝트를 공격하면서 “베이징-쉬르-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일간지 <레제코>의 논설위원인 쾨닉이 비꼬았다. 

사립학교, 대마초 합법화, 국가규제 하에 있는 직업들의 경쟁 개방, 전적인 자유무역, 중앙정부보다 지방자치단체에 권한 위임, 탄소세 설치 등. 쾨닉이 지닌 젊은 무정부주의자의 이미지 이면에서 싱크탱크가 권장한 조치들은 ‘프랑스식 프리드먼 프로그램’을 분명하게 표방한다.(9) 자유주의 프로젝트의 핵심용어는 개인의 자율성에서 시작되는 ‘자율성’이다. 자신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고, 자신의 ‘책임’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안전추구의 (나쁜) 성향으로 인해, 사람들은 위험이나 경쟁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개념은 경제적 문제들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조직의 모든 측면들과 관련된다. 따라서 선택의 자유라는 표현은 소비, 학교, 퇴직(“내가 원할 때 하는 퇴직”) 등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세금에 대해서도, “대체 왜 세금을 폐지하고 기부금으로 대체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까지 던진다. 

자유주의는 국가의 유용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자. 국가는 단지 개인의 권리, 재산소유권을 보호하고 경쟁 규칙을 세우고 지키도록 존재하면 안 되는 걸까?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것은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제한이다. 마찬가지로 유해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공공재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에 의해 이뤄지는 집단해결책이다. 가령, 환경문제의 해결책은 시장에 대한 불간섭 원칙에 확고하게 근거해야 한다. 우대조치를 이용해 당사자들의 행동과 ‘음의 외부성’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탄소세다. 우대조치 체제보다 더 나아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계획경제가 회귀하고 기업의 자유 침해로 이어진다. 

 

대리모 출산은 페미니스트적?

마찬가지로 IT 공룡기업들의 지배력에 대항하는 일종의 ‘강제징수’로서, 그들이 제시하는 개인정보 수집을 고발할 수도 있다. 정치적 해결책은 단순히 개인정보의 소유권을 개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현금화하면서 이런 수집을 허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이민 문제에 대한 해결책 또한 시장이 제시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비자를 팔면서 ‘이민 시장’을 만들어내면 어떨까? 

사회도덕 관습과 관련해,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 원칙을 통해 자유롭게 매춘을 하고, 부르카로 몸을 가리고, 처벌 없이 타인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제네라시옹 리브르 정책연구소는 대리모출산을 옹호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타인의 신체를 포함한 모든 게 돈벌이 대상이 아닌가? 법학자 다니엘 보릴로는 말했다. “대리모는 출산의 가장 페미니스트적인 형태다. 여성들이 자기 몸을 사용할 권리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무료로 행해진 일에 이제 보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10) 진정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정책연구소는 패러다임의 변화, 공공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티핑 포인트(급속도로 바뀌는 순간)를 만들 수 있는, 실행 가능한 조치들을 밝혀내고자 한다. 예를 들어 공공단체에 지불하는 보조금 폐지나 심지어 단순히 공무원직 자체를 폐지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11)

이러한 구상 속에서, 공무원 혹은 정규직 직원이 노동자로서 개인을 좀 더 자유롭게 해주는 개인 해방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물질적 불안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자신의 고용주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보다 ‘자율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행의 공공정책은 단순히 장애물들이고, 지난 과거의 유물들이다. 혜택 받은 새로운 영역은 ‘독립적’이며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영역이다. 혹은 이런 노동자에게 햄버거를 배달하려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찬양할 만한 1인기업이다. 이것이 바로 우버식 자유다. 

2021년 초에 출간한 소설 『지옥』에서 쾨닉은 프리드먼의 제자인 한 경제학자를 조롱한다. 그는 천국으로 가는 대신에 공항에서 떠돌아다닌다. 소설에서 공항은 상점들과 안전요원들로 축소된 세계인 신자유주의의 오점들을 상징한다. 그것은 ‘하이테크’ 악몽이다. 

이런 비판적인 영감은 쾨닉이 몽테뉴의 자취를 따라 보르도에서 로마까지 말과 도보로 몇 달간 여행했던 점과 연관된다. 몽테뉴는 16세기 페스트가 프랑스를 강타했을 때 비슷한 장거리여행을 했다. ‘사람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난 철학자 쾨닉은 주로 시골의 다양한 외진 지역들을 횡단했다. 그리고 늘어만 가는 디지털 기기들로 소외된 도시의 소란스러운 삶을 비판하고, 자연에 보다 열린 윤리적 삶의 장점들을 높이 평가하는 내적성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경제적 자유의 몇몇 폐해들도 언급했다. 추함이 공허와 서로 다투는 번창하는 상업지구와 관련해서 쾨닉은 생각의 변화를 인정했다. “나는 주민들이 스스로 도심의 상점들을 떠나기를 선택했음을 25세 때 확언했어야 했다.”(12) 그러나 쾨닉은 이런 문제들의 원인과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수정정책들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관료주의적 가학증과 지옥

그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어떤 정치적 구상을 끌어냈을까? 쾨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묵묵히 일하는 정직한 사람들이었으나 실현 불가능한 규정들에 압도당했다. 과중한 조치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웨스트 프랑스(우에스트 프랑스>, 2021년 7월 17일자). 여행 이야기는 전형적이라고 할 만한 일련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한 포도 재배인이 포도 수확 노동자들을 위한 규정에 맞는 수의 샤워기를 설치하지 못했다. 한 정육점 주인은 냉방시설에 대한 새로운 법령으로 위협 당했다. 한 민박주인은 한 잔의 술을 대접했다고 처벌받았다. (13) 그들에게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일종의 힘겨운 내기와도 같다. 철학자이자 현지 특파원인 쾨닉은 모든 사람들이 법의 틈새 사이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쾨닉은 ‘Simple’이라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2021년 5월, 주간지 <르푸앙(Le Point)>을 통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국가. 관료주의로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세간에 알려지는 혜택을 누렸다. 또한 쾨닉은 유리한 상황의 덕을 봤다. 사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정부 관리는 이해할 수 없는 규정들의 부조리, 수없이 많은 적용 불가능한 매뉴얼과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들을 고발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쾨닉은 이 문제를 규정하기 위해 ‘관료주의적 가학증’에 대해 말했다. 

가장 놀라운 사례는 임시이동허가증이었다. 목표는 법의 간소화를 위해 정치적 일침을 놓는 것이었다. 그의 시도는 그룹 ‘아지르(전 LREM 프랑스 정당)’ 소속 의원들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국회의원 발레리 프티가 이끄는 국회 그룹으로 프랑스인들의 ‘행정 번아웃’을 공략하는 진영이다. 대중매체 또한 이를 크게 다뤘다. 니콜라 드모랑과 레아 살라메가 진행하는 ‘프랑스 앙테르’ 아침뉴스의 게스트 출연을 시작으로 여러 대중매체들이 이 운동을 보도했다. 

이후 ‘Simple’은 11월 ‘포르탈리스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이 프로젝트는 ‘관료주의 지옥’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법규 전체를 ‘100으로 나눌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프랑스 법에서 제시된 모든 것을 ‘망치로 내려쳐서’ 단순하게 줄이고자 하는 굉장한 시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 법의 핵심인 유럽연합 법규의 매우 까다로운 사안들은 거의 착수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14) 그들은 언론을 통해서, 아니면 ‘망치’를 통해서 법규 적용으로부터 벗어날 계획인 것일까?

여러 방면으로 고발은 정확했다. 이론상으로 공공부문 및 민간부문에서 너무 많은 규정들과 강압들이 있다. 그러나 실행 측면에서 정치적 담화는 너무 빨리 다른 국면으로 돌아섰다. 그저 ‘관료주의적 억압’만을 문제시할 뿐이었다. 11월 15일 회담을 통해 쾨닉은 너무 많은 규범들 속에서도 “민간부문은 확실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해버렸다. 그리고 이후 아무 소식이 없다. 이 주제는 교묘한 방식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정치적 영역에서는 앞서나가지만 지적으로는 기만적인 보수주의의 오랜 습성으로 되돌아가버린 것 같다.

 

‘자유의 수호자’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들은 기업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 쾨닉은 평가와 통제 수단인 보고서들이 넘쳐나는 이 싱크탱크들에는, 관료주의의 결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공공부문 법규들의 증식에 민간부문의 이익집단이 개입했다는 점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민간부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과 규정을 함께 작성했다. 

그러나 이 점은 쾨닉이 높이 평가하는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 저작에서 제시된 분석의 핵심적인 요소다.(15) 그레이버는 관료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맺은 관계를 설정했다. 병원 관리부터 시작해서 배송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이를 간파할 수 있다. 사회생활에서 품위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은 ‘협력’이지만, 이것을 ‘경쟁’과 ‘성과’가 대체해버린 것이다. 자신의 일상생활과 사적 영역에서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성과를 계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개인 자신이 아닌가?(16)

인공지능에 대한 저서를 저술하면서, 쾨닉은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소외를 잘 알고 있었다. 기술은 어처구니없는 서류작성들, 일상을 침범하는 어플들, 자동응답기와의 대화들에 의해 숨막히는 일상의 감정을 양성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됐다. ‘속도를 늦추어야’ 하고, 절도 있게 인터넷을 사용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심지어는 어린이들에게 SNS 사용을 금지시켜야 하고, 개인이 자신의 정보에 책임지도록 해야 하고, 더 잘 살기를 원한다면 덜 소비하는 법을 자유롭게 배우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자기 기만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매혹적인 세상에서, 자유는 기업 앞에서만 항상 멈춘다. 이미 19세기에 자유주의 저술가들은 노동자로서의 개인을 해방시킬 수 있고 착취를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적 개입에 반대하면서, ‘일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가차 없이 맞서 싸웠다. 사회주의자들이 이 시기부터 평등과 연대의 가치들을 중요시하면서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해서 투쟁했지만, 그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의 자유 개념을 위해서였다. 평등의 추구는 모두를 위해서 자유에 실체적 내용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열망을 실현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이 개념은 냉철함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이 우리 자유의 수호자로 자칭하는 것을 좌시해야 할까? 

 

글·앙투안 슈바르츠 Antoine Schwartz 
정치학자. 저서로 『Le libéralisme caméléon. Les libéraux sous le Second  Empire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자유주의. 프랑스 제2제정 시대의 자유주의자들』(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he-Comté, Besançon, 2022년 1월 13일 발간예정) 등이 있다.

번역·권정아
번역위원


(1) Pascal Salin, 『Le vrai libéralisme. Gauche et droite unies dans l’erreur 진정한 자유주의, 좌파와 우파 모두 틀렸다』, éditions Odile Jacob, Paris, 2019.
(2) Pascal Salin, 『Libéralisme 자유주의』, éditions Odile Jacob, Paris, 2000.
(3) Eric Dupin, ‘Pour les vrais libéraux, la meilleure défense, c’est l’attaque 진정한 자유주의자에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9년 2월호.
(4) Margaret Thatcher, 『Discours 1868-1992 담화 1868-1992』, Les Belles-Lettres, Paris, 2016.
(5) Grégory Rezpski, ‘Ces viviers où prolifèrent les “experts” médiatiques 미디어 ‘전문가’ 양성기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2월호.
(6) Kevin Brookes, ‘L’engagement dans un think tank néolibéral 신자유주의 싱크탱크에서의 참여’, Quaderni, Paris, n° 97, 2018 가을호.
(7) Stéphane Foucart, Stéphane Horel, Sylvain Laurens, 『Les gardiens de la raison: enquête sur la désinformation scientifique 이성의 수호자들: 과학적 정보조작 조사 』, La Découverte, Paris, 2020.
(8) www.generationlibre.eu
(9) Milton Friedman, 『Capitalisme et liberté 자본주의와 자유』(Flammarion, Paris, 2016)에서 Gaspard Koenig의 서문. 
(10)  Génération libre보고서의 Daniel Borrillo 서문, ‘Pour une GPA responsable en France 프랑스에서 책임감 있는 대리모임신을 위해’, septembre 2018,  www.generationlibre.eu 
(11) ‘Servir l’État demain 미래의 국가에 봉사하다’, Génération libre, Paris, 2014 년 11월호.
(12),(13) Gaspard Kœnig, Notre vagabonde liberté 『방랑자 같은 자유』, Éditions de L’Observatoire, Paris, 2001.
(14) Gaspard Kœnig, Nicolas Gardères, 『Simplifions-nous la vie ! 단순하게 삽시다!』, Éditions de l’Observatoire, 2021.
(15) David Graeber, 『Bureaucratie 관료주의』, Éditions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5.  
(16) Isabelle Bruno, Grégory Salle, ‘Bureaucratie néolibérale 신자유주의적 관료주의’, in Antony Burlaud,Allan Popelard,Grégory Rzepski(대표저자), 『Le nouveau monde 새로운 세계』, Éditions Amsterdam, Paris,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