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언덕, 이름 없는 무덤들

2011-11-11     필리프 레스피나스·스테판 페리

애국주의 영웅담에 원치 않게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이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침묵 속에 외면당한 희생자들의 자리도 크다. 프랑스 지롱드의 모래언덕 밑에 묻힌 아프리카 식민군 936명은 그렇게 이름 없이 묻혀버렸다.

아르카숑 근처 라테스트에서 필라 모래언덕으로 가는 숲 속의 작은 도로 왼쪽을 보면 바다소나무와 고사리풀로 덮인 모래언덕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기억 속에 잊혀진 이 봉분을 두고 일부 주민들은 ‘흑인들의 묘지’라 부른다. 그 밑에는 1천여 구의 주검이 묻혀 있고, 그 주인은 대부분 아프리카 식민군이다.

1차 대전 참전, 폐병으로 집단사

기념관 입구 간판에는 쿠르노의 겨울 부대 주둔지에 대한 역사가 간략히 언급돼 있다. 기념관에서 1km 떨어진 곳에 1916년 세워진 겨울 주둔지의 흔적은 지금은 사라졌다. 단지 묘비 2개만이 그곳에서 수백 명씩 죽어간 비운의 희생자들을 되새기고 있다. 거대한 석판 묘비에는 아프리카 병사들의 얼굴이 조각돼 있다. 언덕 비탈에 서 있는 두 번째 묘비에는 아랍어로 알라신의 위대함을 예찬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이슬람교도였다. 하지만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숫자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세네갈인 940명과 러시아인 12명이 프랑스를 위해 죽다, 1914~18년.’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든, 마다가스카르인이든, 러시아인이든, 혹은 프랑스 인이든 간에 쿠르노의 희생자들이 처음부터 무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쿠르노 주둔지는 소나무 숲과 모래언덕으로 감춰진 곳에 있고, 철로와 수도관이 가까이 있었다. 여기는 보르도에 도착한 아프리카 병사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던 곳이다. 병원도 있었는데, 전방에서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린 군인, 호흡기 질환을 얻은 군인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1916∼17년 프랑스 북동 지역에서 전투가 치열해졌다. 훈련이 채 끝나지 않은 세네갈 식민군 전투부대는 솜 전투, 두오몽 요새 공격, 동부전선에 투입돼 용맹함을 떨쳤다. 쿠르노를 출발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61대대는 포탄과 폭우와 폭설이 난무하는 속에 앙트르퐁 참호를 점령했다. ‘검은 피’가 희생됐고, 샤를 망갱 장군은 슈맹데담에서 ‘흑인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겨울에 접어들면 세네갈 식민군들은 전투 지역에서 철수해 북아프리카 프레쥐 겨울 주둔지나 쿠르노 주둔지로 귀환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휴식을 취하고, 부상을 치료하고, 부대를 재조직해 다시 전방에 투입될 준비를 했다. 이는 부상이나 전쟁 중에 얻은 질병으로 인해 죽지 않았을 경우였다. 1916년 여름 말 조사차 부대를 방문한 의료검사관 블랑샤르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을 우려했다.

“곧 가을 장마가 찾아오면 이곳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호흡기 질환이 유행하고, 흑인 병사들이 대량으로 죽어나갈 것이다.”

그의 우려는 정확했다. 이전 논이었던 이곳은 가을만 되면 늪지로 변했다. 병영 막사를 지으려 배수공사를 했음에도 말이다. “병참감이 물 위에 지을 막사에 쓸 기둥 몇천 개를 사들였다는 소문이 돈다”고 병영 소식지 만평은 그렸지만, 이는 농담조가 아니었다.

폐렴균에 특히 약했던 세네갈 식민군들은 수천 명씩 병에 걸렸다. 동시에 2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던 아드리안식 막사 600개는 약식으로 지어져 외풍을 전혀 막지 못했다. 목탄을 때는 난로로 난방을 했고, 카바이드등과 석유등으로 간신히 불을 밝혔다. 목욕과 세탁은 강가에서 해결했다. 병원을 제외하고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흙 위에 지어진 초라하고 비위생적인 막사는 전투 여건을 더욱 열악하게 했다.

총 50여 부대가 쿠르노를 거쳐 갔는데, 첫 사망자가 나온 것은 1916년 4월 28일이었고, 5월에는 13명이 사망했다. ‘부모의 이름을 알 수 없는’ 42대대 닥페 이등병이 5월 23일 사망했다. 바풀라베 근처 랑바타라에서 태어난 모리 바킬레는 6월 1일 사망했다. 바마코 근처 마니쿠라 출신인 1891년생 이등병 모리바 케이타는 7월 16일 사망했다. 이 3명의 병사는 군번과 이름이 모두 기록된 수많은 사망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사망자가 빠르게 증가하는 가운데 일부 정치인들이 아프리카 식민군의 희생을 우려했는데, 프랑스의 첫 흑인 국회의원인 블래즈 디아뉴가 그중 하나였다. 12월 9일 그는 국회에서 쿠르노의 비위생적이고 궁색한 여건을 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병영 근처에 위치한 ‘흑인 묘지’에는 여전히 무덤이 늘어만 갔다.

1916년 12월 1∼22일에 발생한 사망자 109명에 대한 보고서가 작성됐다. 이들은 모두 폐와 관련한 질병으로 사망했다. 1916년 한 해에만 421명의 세네갈인이 사망했고, 폐 관련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세네갈 식민군은 프레쥐 주둔지로 송환됐고, 1917년 10월 러시아군이 이들을 대체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전 프랑스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징집된 러시아인들은 두 편으로 분열됐고, 전방에서 철수한 뒤 분리됐다. 그중 11명은 쿠르노에서 사망했다. 그 뒤 1918년 1월 미군이 러시아인들을 대신했다.

프랑스 시민권 얻으려 했건만…

1916년 4월∼1917년 10월에만 쿠르노 병원과 아르카숑 병원에서 1천 명 넘는 아프리카 식민군이 사망했고, 이들 중 936명이 라테스트 모래언덕 묘지에 묻혔다. 여기에는 러시아인 11명, 마다가스카르인 5명, 프랑스인 4명도 묻혀 있다.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956명의 군인들은 이름이 남아 있지만, 프랑스 정부가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것을 외면했기 때문에 무명으로 잊혀졌다.

이름은 없고, 성만 판에 새겨진 채 각각 묘소에 묻힌 이들은 1924년 아예 잊혀져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유해들은 한꺼번에 합쳐졌고, 흙과 모래에 파묻혀버렸다. 약식으로 서 있던 묘석은 1967년 현재의 묘석으로 교체됐다. 1961년 건축가 앙리루이 필은 “이들이 쉽게 익명으로 묻히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자들의 이름을 반드시 적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후 희생자들의 신분에 대한 우려가 공식적으로 표명된 적은 없다. 북동부 묘지이든, 프레쥐·렉투르·아르카숑이든 프랑스의 거의 전 지역에 인종과 국적을 떠나 희생자들의 이름이 묘비에 적혀 있다. 가장 많은 세네갈 식민군 희생자가 묻힌 장소 중 하나인 쿠르노만 제외하고 말이다.

세네갈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교수인 마르 펄은 이렇게 말했다. “지역 특수성이라 봐야 한다. 보르도는 정치적 합의에 기초한 도시로 공분을 살 만한 주제는 웬만하면 피하려 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희생된 흑인 군인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보르도의 식민지 시절 과거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는 노예들에게 봉헌된 아키텐박물관의 한 전시관을 유치하는 문제로 보르도를 뒤흔들었던 정치 논쟁을 예로 들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도시인 보르도는 부끄럽게도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역사를 파헤치는 것을 달가워하지도 않거니와, 흑인노예 매매를 연구한 사학자는 보르도 사람도 아니다.”

역사에 대한 외면을 정당화하려 이데올로기적 논리를 펼치는 것인가? 아키텐지역위원회장인 알랭 후세는 “어떤 답변을 드릴 수는 없지만, 매우 부당하고 프랑스의 정신에 반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국방부 소속인 국립묘지 관리 및 중요기념지 관리부처장인 알랭 마르샹도는 “중대한 오점과 부당함이 있다면 조사를 한 뒤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프랑스 시민권을 얻기 위해 군대에 합류한 아프리카 식민군이나 러시아인, 프랑스인, 마다가스카르인 모두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956명은 아마 전쟁 100주년 기념일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희생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글. 필리프 레스피나스 Philippe Lespinasse (영화감독) & 스테판 페리 Stéphane Ferry (언론인)

번역. 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