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수단으로서의 채무’는 아직 유효하다

2021-12-31     뱅자맹 르무안 l 사회학자

프랑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발레리 페크레스는 프랑스의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까지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행정개혁위원회를 설치해 공공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유럽중앙은행은 채권자들이 위협수단으로 종종 악용하는 금리를 0%까지 낮추기로 했다.

 

2020년 4월,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서구식 사회경제 체제에 돌연 큰 균열이 생겼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각국의 중앙은행이 경제위기를 막겠다며 대대적으로 유동성을 늘리면서 자산 버블이 커졌고 정부는 국공채 매입으로 적자를 보전했다. 그 사이에 시장 논리에서 벗어난 공공서비스와 복지국가 부활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졌다. 재정 취약국들도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현 상황을 극복하겠다”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더 멀리 내다봐야 한다”라며 대뜸 찬물을 끼얹었다. 국제통화기금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인명을 살리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선택이지만, 그 뒷감당도 생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1) 즉, 양적 완화 조처는 이데올로기 차원의 ‘지급 유예’에 불과하며, 한풀 꺾인 신자유주의 체제의 당위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에게 부담을 돌리던 채무의 기능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국가채무를 앞세운 여론몰이가 다소 주춤한 듯 보인다. 국가채무가 증가하면서 GDP 대비 국가채무가 2022년에는 전후 최대치인 144%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나, 이자 비용은 감소하는 추세다(2020년에는 이자 비용이 GDP 대비 평균 1.3%까지 상승).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는 제로금리에 근접했고, 이자 비용은 GDP 대비 국가채무가 20%에 그쳤던 1970년대보다도 낮은 수준이다.(2)

유럽중앙은행은 2016년부터 정기적으로 민간은행에서 국채를 사들여 시중에 돈을 푸는 방식으로 정부 재정에 숨통을 틔웠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유럽중앙은행은 전례 없이 양적 완화 정책을 강화했고, 곳곳에서 물이 새는 경제와 재정의 구멍을 긴급히 메우기 위해 금리를 인하했다. 금리는 투자자가 위험 부담에 대해 국가에 요구하는 일정의 대가, 즉 위험 프리미엄이다. 과거에는 투자 여건과 위험성에 따라 국제금융 시장에서 차입 금리가 정해졌다면, 지금은 유럽중앙은행이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유지시킨다.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절대적 믿음

이렇게 이자 비율과 채무(전통적인 기본 척도인 국가채무 대비 GDP 비율) 간의 연결고리가 깨지자, 기존의 차관이나 구제금융 제도, 구조조정 조처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난색을 드러낸다. 그들은 이런 ‘위협’ 수단조차 없다면(자본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비용을 절감하고 정부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신빙성을 잃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은 또한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에 따른 저금리와 마이너스 금리는 인위적이고 변칙적인 조처며, 이런 정책 기조가 지속되면, “더 이상 채권자들이 채무를 위협수단으로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관점에서 관리 및 통제되는, ‘금리라는 유령’이 배회하는 상황에서 재정자금 조달을 중앙은행에 의존하는 관행도 문제 삼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런 논리는 세상의 ‘정상적인 기능’이라는 정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에게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세상’이란 민간 금융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민간의 규율에 따라 돈을 빌려줄 국가를 구분하고 선별하는 세상이다. 이들은 채권자들이 왕좌를 탈환하고, 부채의 수요와 공급 법칙을 재작동시키기를 원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오직 수요와 공급 법칙만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정치 질서를 바로잡아 사회를 규제한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힘’이 제대로 작동하면 국가마다 적정금리가 매겨진다. 채무를 위협수단으로 삼는 그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유럽중앙은행의 태세 전환에 당분간 친위 쿠데타나 궁중 혁명은 예정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럽중앙은행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의 고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라가르드 총재는 2020년 3월에 ‘회원국 국채 간 스프레드 한도를 정하는 것’, 즉 유로존 차용국 간의 금리 차이를 행정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유럽중앙은행의 역할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었다.(3) 라가르드 총재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유럽중앙은행은 국채 매입에 관한 한 어떤 약속도 하지 않는다. 정책 기조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고, 유럽중앙은행이 나서서 회원국 정부의 재정 운용의 편의를 봐줄 의향은 없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이 이렇게 국채 매입 사유를 상세하고 신중히 해명했지만, 코로나19와 인플레이션 목표치(최근까지 너무 낮았음)라는 이유를 빼면 국가채무라는 작은 세계 속의 기본 장벽은 하나도 무너뜨리지 않았다. 여기에서 기본적인 장벽이란 발행시장(제1차 시장, 채권이 자금 수요자에 의해 최초로 발행되는 시장)과 유통시장(제2차 시장, 이미 발행된 채권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매매되는 시장) 간의 구분이다. 

 

‘국가 신용도’라는 연극, ‘국채’라는 투자상품

사실 유럽중앙은행은 발행시장을 통한 국공채의 직매입 조치를 금지하고 있다. 발행시장에서 국채를 인수하는 것은 유럽중앙은행이 정부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않고, 민간 은행을 거치지 않고 정부와 중앙은행이 국채와 현금을 맞바꾸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 신용도’라는 연극(경쟁입찰을 통한 국고채 발행)은, 중요한 장면에서 막을 내려버리는 꼴이 된다. 중앙은행이 유통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할 경우, 국가의 ‘실제’ 가치, 즉 민간 자본을 빌려줄 가치가 있는지 평가하는 금융시장의 재량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국채 발행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1970년대 말에 중앙은행의 대정부 여신이 사라지고 국채의 직접 인수도 최소화되자 고위 재무 관료들이 국제 투자자를 대상으로 특정 투자상품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민간 자본이 열망했던 이 매력적인 투자상품은 바로 민주주의, 공권력과 연계돼 리스크가 제거된 국채다.(4) 국가 회계감독관과 ‘국채관리청(AFT)’ 청장(2015~2021)을 지낸 앙토니 르캥은 2016년에 “투자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국채관리청은 국고 관리(세입·세출 관리 및 국고금 조달)와 국채 ‘발행’을 담당하는 프랑스 재정경제부 산하 기관이다. 국채관리청의 주요 업무 중에는 뉴욕, 런던, 도쿄, 싱가포르 등 세계 금융 중심지를 돌며 ‘잠재 고객들’을 대상으로 순회 설명회를 열어 ‘민간 부문’ 방식대로 신규 투자상품을 소개하는 것도 있다. 국채관리청 관료들은 시장에서 회합하기 전, 특급 호텔에서 투자자들의 예상 질문을 검토했다. 투자자들은 재정적 요소뿐 아니라 정치적 사안에 해당하는 (국채 이자를 부담할) 정부의 조세 징수 능력, 사회적 의사 결정 능력과 유사시 공권력 동원 능력까지 두루 고려했다.

1987년 뉴욕에서는 ‘프랑스의 인플레이션 정책’과 ‘프랑스의 인건비 인상’ 여부가 도마 위에 올랐으며, “프랑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가능성이 있는가? ‘사회주의’ 금융 정책은 어떻게 보는가? 공산당이 권력을 나눌 만큼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처럼 반자유주의적이거나 반체제적인 정책의 실현 가능성에 관한 의문도 속속 제기됐다.(5) 국채관리청과 투자 설명회에 참여한 여러 시중은행이 제시한 자료들 중에는 프랑스의 파업률 추이, 노조 결성률, 야권의 집권 가능성 등이 있었다. 

체제의 안정을 원하는 투자자들의 눈에는, 노란 조끼 운동이 우려스럽게 비쳤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한 은행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노란 조끼 운동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난장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크롱 대통령이 변화를 추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파리의 브리스톨 호텔 옆에서 한 가엾은 미국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노란 조끼 운동 초기에 난투가 벌어지고 자동차가 불탔던 곳이죠. 그는 프랑스에서 사회 개혁 움직임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걸 보고 믿게 됐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다 영향을 미치죠.”(6) 

유럽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해 금융시장의 채권단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해도, 금융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시장 경제체제는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공적자금에 의존하지 않는) 자율적인 민간 자본이라는 허상과 자신들만이 금융시장에서 신용을 제공하고 정부 정책의 당위성을 평가할 수 있다는 허상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통화 및 부채 분야의 고위 관료들(국채관리청의 요직으로, 최고 인재들은 중앙은행으로 진출함)은 예나 지금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치 아래 ‘자유시장 경제 질서’의 걸림돌을 없애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가치의 지배자로서 자본가와 투자자들이 힘을 회복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국채관리청장(1974~1978), 국제통화기금 총재(1978~1987), 프랑스은행 총재(1987~1993) 등 국가 재정 분야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두루 거치고 현재는 국채관리청의 전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자크 라로지에르는 인과관계를 뒤집어서 더욱 절묘하게 이런 생각을 드러냈다. 시장 감시를 회복하기 위해 유럽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 정책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계속 공급할 수 없으니 금융 투자자들의 기대를 반영하겠다는 논리다.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을 사실상 ‘보장’한다고 해서 시장이 판단과 분석 기능을 상실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중앙은행이 영원히 국채를 매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발행한 국채의 가치는 신용의 기본 요건이기에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잘 관리해야 한다.”(7) 유럽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서 정치권력을 배제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유럽중앙은행이 새롭게 채택한 기조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가의 재정 조달은 정당(부당)한 일련의 행위(설명회나 금융 중심지에서 홍보된 내용처럼), 규칙적 또는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신용행위와 제도적 제재를 기틀로 삼는다. 다음과 같은 조건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현금 직매입은 하지 않으며, 국가는 경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모범 가장’이 집안을 돌보듯이 국가를 관리하며 신용거래는 하지 않는다). 통화와 재정에 민주주의를 결부시키지 않는다. 유럽연합조약을 준수한다. 국가로부터 확실히 독립됐지만, 자본시장에 의존하고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금융 전문 기관(예: 중앙은행과 국채관리청 같은 반자율적인 채권발행기관)을 거친다. 공공성이 사라진 기관들을 금융화한다. 급여 자격과 부과방식 연금(매년 연금 지급에 필요한 비용을 당해 연도 가입자의 연금보험료 수입으로 충당하는 방식-역주)을 폐지하는 등 구조를 개혁한다. 개개인의 변화(적립식 연금 제도를 단행), 대형 자본가의 문화를 공유하는 ‘소규모 자산 관리자’로의 변화 등을 의제로 삼는다.”

하지만 이 조건들 중 한 가지라도 무너진다면 국채는 더 이상 유통되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채무 상환을 위해 자금을 재조달하는 재융자 조건이 달라질 것이란 의미다. 유동성과 투자 매력을 갖춘 국채는 무위험 자산으로 분류돼 자산 피라미드 먹이사슬 최상단에 올라있다. 하지만 사회·정치 상황이 급변하는 순간, 금융시장에서 외면과 제재를 받는 ‘혐오 상품’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8) 

하지만 위와 같은 시나리오를 감내할 필요가 없다. 그 사실이, 이제는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글·뱅자맹 르무안 Benjamin Lemoine
사회학자. 『La démocratie disciplinée par la dette 부채에 의해 규율되는 민주주의』(2022년 2월 출간 예정, Éditions La Découverte)의 저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Keeping the Receipts: Transparency, Accountability, and Legitimacy in Emergency Responses’, Special Series on Fiscal Policies to Respond to COVID-19. Fiscal Affairs,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Washington, 2020년 4월 12일.
(2) Jérôme Creel et al. ‘Dette publique : un changement de paradigme et après ? 공공 부채: 패러다임의 전환과 그 이후?’ OFCE(프랑스 경제관측소), Policy brief, n° 92, Paris, 2021년 10월 6일.
(3) 기자회견, 프랑크푸르트암마인, 2020년 3월 12일.
(4) Benjamin Lemoine, 『L’Ordre de la dette, Enquête sur les infortunes de l’État et la prospérité du marché 부채의 질서, 국가의 불운과 시장의 번영에 관한 조사』, La Découverte, Paris, 2016(페이퍼백 판본은 2022년 2월 3일 출간 예정).
(5) ‘Pourquoi investir en France ? 왜 프랑스에 투자하는가?’, 미국 상업은행인 JP 모건의 발표, 1987년 10월 23일.
(6) 저자가 인터뷰함, 2021년 9월.
(7) ‘La dette et l’illusion monétaire 부채와 화폐적 환상’ in Philippe Dessertine (sous la dir.), 『La Dette potion magique ou poison mortel 부채, 마법의 물약인가 치명적인 독약인가』, Éditions Télémaque, Coll. Turgot, 2020.
(8) 기자인 필리프 마빌의 표현을 따름. 위에서 언급한 『L’Ordre de la dette, Enquête sur les infortunes de l’État et la prospérité du marché 부채의 질서, 국가의 불운과 시장의 번영에 관한 조사』(Benjamin Lemoine)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