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닐과 그녀의 ‘전쟁터’

2021-12-31     마리노엘 리오 l 기자

앨리스 닐(1900~1984)은 생전에는 내내 외면받다가 말년에 이르러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사후 37년이 흐른 현재, 그녀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이제 수많은 대중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소식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놀라운 소식이기도 하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외면받다가 뒤늦게 눈부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1900년 미국 펜실베니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앨리스 닐은 1925년 필라델피아 여성 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그녀는 결혼에 실패하고 아이를 잃은 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여러 남성을 만났다. 이후 두 아이를 낳아 혼자 키웠으며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와 스페니시 할렘에서 30년간 어렵게 살았다. 앨리스 닐은 돈도, 작업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대공황 기간 뉴딜 정책 일환으로 1933~1943년 공공미술품 프로젝트(Public Works of Art Project)와 공공사업 진흥국(Work Projects Administration) 등의 공공예술지원 프로그램이 실시됐는데, 당시 1만여 명의 예술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여성 등 모든 이들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서 공산주의에 동조했고, 1946년부터 <대중과 주류(Masses and Mainstream)>라는 공산주의 월간지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매카시즘이 극에 달했던 1955년에는 FBI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미 그 전부터 앨리스 닐을 감시했던 FBI는 “공산주의 유형의 낭만적인 보헤미안”이라는 평가를 보고서에 남기기도 했다. 그녀는 1953년에 미국공산당(CPUSA)에 가입했는데, 이미 그 전에 완전히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냉전 초기에 CIA는 다양한 모임과 재단(이 중에는 그 유명한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도 있다)을 은밀하게 지원했는데, 이 덕분에 추상표현주의가 유럽에 전파되고 유행했다.(1) 컬렉터이자 오랫동안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화랑 경영자 페기 구겐하임은 1994년에 파시즘과 전쟁 중인 세상에서 현대적인 방식(즉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정치적 행위가 된다고 선언했다.(2) ‘나치 독일이 패배했다’는 슬로건은 예술을 자유세계와 민주주의에 봉사하는 무기로 만들었고 새로운 대상을 찾았다. 바로 문화 냉전이 그 대상이었고, 문화 냉전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닐은 존경했던 발자크의 말처럼 ‘인간적인 희극’을 그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닐은 계속해서 자신과 비슷한 주변 사람들을 그렸고 그들이 지닌 복잡성과 다양성, 생명력, 비극을 표현했다. 그녀는 모델이 돼 준 사람의 개성을 사회적인 존재로 나타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초상화가 성공하려면 문화와 시간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말에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3)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닐은 영웅 내면에 존재하는 가엾은 이를 사랑했고, 가엾은 이 내면에 존재하는 영웅을 사랑했다.

닐은 샤를 보들레르의 말처럼 ‘현대적인 삶을 그리는 화가’였다. 에두아르 마네나 닐의 또 다른 영웅이었던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나 표현주의 대가인 오스카 코코슈카나 게오르게 그로츠, 오토 딕스처럼 말이다. 그녀가 보여준 리얼리즘은 그녀가 보는 것 안에서 작동하는 선택이자 그림 모델과 뉴욕의 거리와 같은 현실을 폭력적이고 단절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닐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저 재현하거나 이상화시키지 않고 그림으로 재창조했다.

지극히 독자적인 구상 표현주의를 보여줬던 그녀의 화풍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했지만, 바로 이 화풍 때문에 닐은 당시 전위적인 분위기의 좁은 미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진영으로 잘못 분류되기도 했다. 월간지 <더 뉴 매서스(The New Masses)>의 창립자이자 편집장이었으며 <데일리 워커(Daily Worker)>라는 공산주의 일간지의 논설위원인 마이크 골드도 ‘미국 미술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전력투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사 기질의 마이크 골드는 닐의 친구로, 닐이 그의 초상화를 두 점이나 그려줬다.

팝 아트 덕분에 구상주의가 다시 유행하자 닐은 새롭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첫 번째 오해가 나왔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닐은 인간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팝아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매끈하고 상업적인 왜곡’을 싫어했다. 그 후로 1976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1550년~1950년까지의 여성 예술가들(Women Artists 1550-1950)>이라는 전시회가 열렸고, 이곳에서 닐의 작품이 소개됐다.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미술관을 고소하겠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압박을 받아 마련된 전시회였다. 여기에서 두 번째 오해가 나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페미니스트 투쟁을 지지한 것도, 시위에 여러 번 참여한 것도, 케이트 밀레트와 메리 개러드, 린다 노클린 등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초상화를 그린 것도 사실이지만, 닐은 어떤 이유에서든 예술 작업을 축소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닐은 여성 비평가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비평가들은 예술가가 자신을 그려줄 때만 존중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사회 계층을 그리는 예술가는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닐은 어떤 대상이 있으면 포장하거나 영웅시하지 않고 그 대상이 지닌 삶의 영광과 비참함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 벌거벗은 몸과 성별, 질병과 노쇠함(이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앤디 워홀의 초상화다)을 그대로 표현했고, 임산부와 피곤에 찌들고 과체중인 여성들, 노인과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 몸이 틀어진 채 안경을 쓰고 손에는 붓을 든 나이 여든의 자기 나신도 그렸다. 닐은 죽기 몇 주 전에 “인생에서도 그랬듯이 나는 정치적으로 항상 루저와 아웃사이더들을 사랑했다”라고 말했다. 2022년 10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릴 예정인 전시회 카탈로그에 적힌 말이 바로 이 말이다.(4)

영국의 미술사학자 제러미 루이슨이 주도해서 2010년부터 휴스턴 순수미술박물관을 비롯해서 런던에서 함부르크까지 유럽의 여러 주요 기관들이 앨리스 닐의 주요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보였다.(5) 2021년 봄에는 미국에서 가장 이름 있는 미술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앨리스 닐: 사람이 먼저다>라는 이름의 회고전이 열렸다. 전시회 제목 ‘사람이 먼저다’는 마이크 골드가 닐을 인터뷰 한 뒤에 쓴 <데일리 워커> 기사에서 나온 표현이다.

<앨리스 닐: 사람이 먼저다> 전시회 카달로그 하단에는 유럽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대한 각주가 몇 개만 달려 있었다. ‘급진적인 페미니즘’과 ‘사회 참여’, ‘휴머니스트 원칙’, ‘공감’ 등 모두 닐의 일생에 대한 것이었다. 카탈로그에는 이런 모습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 정의의 챔피언’에 대한 이야기뿐 그녀의 예술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조금 어려운 표현인 ‘급진적인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는 평가만 있었다.(6) 

작품만 신경 쓴다는 것(미술사 전통이 지나칠 정도로 그렇다)은 특정 예술가가 주어진 시간에 자신만의 언어로 만들었지만 보편적인 언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상징적인 표현과 현실 경험 간의 교류를 외면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예술가를 그 사람의 일생과 당시 사회적 맥락이나 도덕적 가치 척도에 국한시켜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예술을 단순히 이 가치를 보여주는 예시 정도로 축소시키는 일이고 더 나아가 그 안에 담긴 독특함을 부정하는 일이다. 닐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모델에게 없는 모습과 형태를 그 모델에게 주고자 하는 야망이 담긴 전쟁터”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것이 예술적 야망의 특징 아닌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앨리스 닐 전시회 카탈로그를 제작하기까지 다섯 번 넘게 시도했지만 그 기간 동안 닐의 예술과 관련해서는 그저 적당한 이야깃거리로만, 즉 닐이 얼마나 어떻게 어떤 점에서 이 이야기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닐의 작품이 얼마나 어떻게 어떤 점에서 소수자에 향한 그녀의 공정한 입장을 입증해주는지 또는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 등을 점검하는 용도로만 언급했다(여기에서 닐의 작품은 단순히 예시 정도로만 다뤄졌다). 그녀나 그녀의 작품에서 약점이 보이면 정중하지만 부드럽게 지적했다. 

전시회 카탈로그를 보면 14페이지에 걸쳐 (공산주의라고 확실하게 명시하지 않고 암시하는 방식으로) 닐의 인간적인 액티비즘을 소개했고, 페미니스트 운동 참여에 26페이지를, 인종차별 문제에 참여한 행적에 14페이지를, 젠더와 성적 소수자들과의 관계(앤디 워홀과 다른 슈퍼스타와의 관계는 5페이지 걸쳐 다뤘다)에 22페이지를 할애했다. 재미있게도 피에트 몬드리안의 그림과 매우 유사한 닐의 추상기법에 12페이지를 할애했는데, 몬드리안과 닐은 둘 다 재즈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시회 구성과 마찬가지로 카탈로그도 일체감 있게 구성됐다. 작품은 닐의 변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대에 상관없이 테마에 따라 재분류됐다. 아름다움은 당연히 세상을 표현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왜 <뉴욕 리뷰 오브 북스>는 2016년에 우리가 닐의 세계와 예술을 이해하는 방식에 공산주의가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던 걸까?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전문 매체 및 그녀의 공식 전기(傳記)는 닐을 오늘날 소수자 운동을 예견하는 인물로 만들기로 했던 걸까?(7) 이에 대해 비평가 벤 데이비스는 <아트넷 뉴스>라는 24시간 뉴스 사이트에 관련 기사를 게재해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2021년 4월 18일). 

“앨리스 닐의 공산당 활동은 그녀의 예술세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이 ‘전쟁터’라는 사실에서도, 본인의 아들을 무정하게 그린 초상화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그녀의 아들 리처드는 리처드 닉슨의 지지자였고, 팬아메리칸월드항공의 고위 간부였으며 이익을 위해 내셔널 항공(National Airways)을 청산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록사나 아지미는 유럽에서 첫 번째 시리즈로 열린 앨리스 닐 전시회를 다룬 <르몽드> 기사(2017년 12월 28일자)에서 “그녀의 작품에 쏠리는 관심은 분명히 현재 기류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닐의 예술뿐 아니라 그녀가 좋아했던 주제, 그림 모델들에서부터 자연주의에 대한 거부, 그녀의 독창적인 사실주의와 확고한 표현주의, 즉 그녀가 자주 사용하던 색의 범위와 그림을 그리던 방식 등 그녀가 선택했고 다뤘던 모든 것들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고집이 세고 독립적이었던 앨리스 닐은 자신이 살았던 거리와 주변 인물을 그렸다. 계층도, 살아온 인생도, 피부색도, 원하는 것도 다 달랐던 인물들을 그려냈고, 예술을 통해서 확고함과 진실을 찾으려고 했다. 그녀의 ‘인간적인 희극’은 독특하고 인상적이지만 현재의 규범에 따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준비했던 배열 속에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글·마리노엘 리오 Marie-Noël Rio
기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Frances Stonor Saunders, 『Qui mène la danse ? La CIA et la guerre froide culturelle(『문화적 냉전-CIA와 지식인들』, 2016, 그린비)』, Denoël, Paris, 2003. Cf . Emmanuelle Loyer, 『L’art et la guerre froide 예술과 냉전, 『Art et pouvoir, de 1848 à nos jours 예술과 권력, 1848년에서부터 현재까지』, CNDP, Paris, 2006.
(2) Serge Guilbaut, 『Comment New York vola l’idée d’art moderne 뉴욕은 어떻게 현대 미술의 아이디어를 훔쳤는가』(Jacqueline Chambon, Paris 1988) 에서 인용함
(3) Intervention en 1971 au Moore College of Art and Design à Philadelphie, nouvelle appellation de l’institution où elle avait fait ses études. 1971년 필라델피아 무어 미술디자인대학(Moore College of Art and Design)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여함(닐이 다녔던 필라델피아 여성 디자인스쿨 이름이 무어 미술디자인대학으로 변경됨). 
(4) 『Alice Neel, un regard engagé 앨리스 닐, 참여의 시선』, under the direction of Angela Lampe, éditions du Centre Pompidou, Paris, 2020.
(5) Jeremy Lewison (under the direction of), 『Alice Neel, Painter of Modern Life』, Mercatorfonds/Yale University Press, 2016.
(6) Kelly Baum et Randall Griffey (under the direction of), 『Alice Neel: People Come Firs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2021.
(7) Phoebe Hoban, 『Alice Neel : The Art of not Sitting Pretty』, David Zwirner Books, New York  2010 (2021). Cf. Patricia Hills,『Alice Neel』(퍼트리샤 힐스와의 인터뷰), Harry N. Abrams, New York,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