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층의 사금고, 카불은행은 불사조

2011-11-11     루이 앵베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외국 군대가 점진적으로 철수할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만약 미국과 파키스탄 정부가 전쟁을 벌인다면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 편에 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분쟁으로 얼룩진 아프간의 미래는 불투명한데, 카불에서는 상식을 넘어선 부정부패가 판을 치며 아프간의 재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난 6월 압둘 카디르 피트랏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 총재가 미국 워싱턴 근교의 한 호텔에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총재직에서 물러나 미국에 피신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에 앞서 피트랏 총재는 지난 4월 아프간 의회에서 사상 초유의 금융 비리 사건을 폭로했다(그는 명단과 액수까지 정확히 제시했다). 비리의 주인공은 카불은행이었다. 아프간 최초의 민영은행인 카불은행은 2010년 8월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GDP의 8% 규모 손실

최근 중앙은행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카불은행 경영진은 불과 6년 만에 5억7900만 달러에 이르는 대출 손실을 입었다. 식비와 행정비 등으로 속인 대출금과 이자까지 합한다면 총손실액은 무려 9억14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1년 아프간의 국내총생산(GDP)은 70억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이런 경제 규모에 견줘보면, 카불은행이 입은 이번 대출 손실액은 세계 금융 역사상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카불은행 비리 사건은 현재 아프간 사회에 고질적 부정부패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잘 보여준다. 또한 미군 철수를 3년 앞둔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이 부정부패 척결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 아프간 기업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국제사회의 지원이 넘쳐날 때 기회를 잘 활용하겠다는 것뿐이다.

윌리엄 버드 세계은행 전 지사장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행 부문은 아프간 재건의 보기 드문 성공 사례로 인식됐다. 그렇기에 이번 카불은행 사태는 더욱 비극적이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카불은행의 두둑한 인심 덕을 본 사람 가운데 카르자이 대통령의 형 마무드와 모하마드 카심 파힘 부통령의 형도 포함돼 있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조사 결과 불법대출에 연루된 혐의자는 의원에서 장관, 주지사, 예술가, 축구 선수, 선거운동원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207명에 달했다.(1)

피트랏 총재가 사직을 발표한 지 30분이 지난 뒤, 카르자이 대통령실은 총재의 사직을 ‘반역 행위’로 단정했다. 인터폴과 주아프가니스탄 미국대사관에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아프간 검찰청이 1년 넘게 발표를 미뤄온 용의자 명단 맨 꼭대기에는 피트랏 총재의 이름이 올라 있다. 처음에는 카불은행 창립자 셰르칸 파누드와 은행장 칼리룰라 페로지까지 감옥에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들은 여전히 카불 시내를 거의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녔다. 반면 시민들은 열릴지 확실하지도 않은 재판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대통령 형부터 중앙은행 총재까지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감독평가위원회(MEC)는 불법대출금을 반환하는 조건으로(마무드는 2200만 달러, 파힘이 주주로 있는 3개 회사는 총 1억8200만 달러에 달하는 특혜 대출을 받았다) 카불은행의 두 주주 마무드 카르자이와 압둘 하신 파힘의 죄를 사면해줬다. 그 뒤로, 마무드 카르자이는 전 동료 파누드를 “오래전 단죄해야 했던 범죄자, 도둑” 등으로 몰아세우며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늑장 대응에 지치고 신물이 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카불은행을 빌미로 아프간 정부와 힘겨루기에 나섰다. IMF는 지난 3월부터 아프간 정부에 대한 일부 국제 지원금 지급을 중단해버렸다.(2) 정부가 알아서 은행의 손실을 메우라고 요구했다(지난 7월 7천만 달러가 회수됐다). 은행 시스템을 개혁하고, 쇼가 아닌 진짜 재판에 나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 의회 산하 연구기관 미국평화연구소(USIP)의 앤드루 와일더 연구원은 “몇 달 뒤 유동성 부족을 겪지 않으려면 아프간 정부에 이 돈이 매우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10월 중순 아프간 의회가 중앙은행의 리파이낸싱(Refinancing·조달한 자금을 상환하기 위해 다시 자금을 조달하는 일) 계획을 승인하는 한편, 1차로 53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에 IMF는 중단했던 국제지원금 지급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의 고위층이 국민 1300만 명이 예금한 돈을 마치 사금고처럼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은 카불은행 창립자 파누드다. 그는 맨몸으로 자수성가한 일종의 모험가다. 북부의 빈민층 가정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포커 선수 파누드(월드포커투어 웹사이트에 그는 2005~2008년 40만 달러를 딴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산업·금융 재벌의 창립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성인이 된 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냈다. 처음에 발을 디딘 곳은 모스크바였다. 1980년대 파누드는 모스크바 기숙사에서 러시아로부터 아프간의 섬유 수입대금을 송금하는 전문 업체를 차렸다. 아프간 주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에서 근무한 한 직원에 따르면, 파누드는 불과 15년 만에 중앙아시아에서 파키스탄, 이란, 중국, 유럽, 캘리포니아까지 사업망을 크게 늘렸다.

은행가로 변신한 돈세탁업자

파누드는 ‘하왈라’라고 부르는 이슬람 전통 송금 시스템을 활용했다. 송금, 대출, 은행 간 환전과 관련한 전통 시스템인데 거래 기록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미국마약청(DEA)에 따르면, 1990년대 파누드는 두바이에서 합법적인 무역업자를 위해서도 돈을 송금했지만 탈레반, 마약 밀매업자, 알카에다 등을 위해 돈을 세탁하는 일도 맡았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친미주의자인 파누드는 현대적 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아프간에 현대적 은행이라고는 기껏해야 다 쓰러져가는 국영은행 2곳이 전부였다. 버드 세계은행 전 지사장은 “금융감독기구는 카불에 진짜 은행이 생기게 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외 기부단체들도 이제부터 아프간 은행이 국제 규범을 따를 것이라 여겼다”고 말했다. 파누드가 가장 먼저 민영은행 설립 허가를 신청했고, 2004년 허가가 떨어졌다.

당시 중앙은행 총재이던 누룰라 델라와리는 “비로소 ‘믿음의 행위’(Acte of Faith)를 통해 믿음(프랑스어로 ‘신용’이라는 뜻도 있다)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파누드는 아프간 시민들이 침대 밑에 돈을 넣어두던 경제적 관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금융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홍보 감각을 발휘했다. 먼저 TV 광고에 인도의 두 여배우 디비야와 시타를 출연시켜 신용카드를 홍보하도록 했다. 또 카불은행에 100달러 이상이 든 계좌를 갖고 있는 예금자를 대상으로 결혼식장에서 ‘바흐트’(Bakht·아프간의 다리어로 ‘행운’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대형 경품 추첨 행사를 열었다. 현 무역부 장관 안와르 울 하크 아하디는 “파누드는 사람들에게 경품으로 차량, 아파트, 현금 등을 나눠줬다. 그는 다른 중동 국가에서 널리 사용하는 홍보 전술을 벤치마킹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줄 알았다”고 말했다.

2년 만에 비로소 민영은행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 파누드는 정부 고위층의 측근들을 새 주주로 모집했다. 하미드 카르자이의 친형인 마무드 카르자이에게는 600만 달러를 대출해주며 땡전 한 푼 내지 않고도 은행 지분 7%를 소유할 수 있게 해줬다. 델라와리는 “파누드는 소속 부족이 없었다. 그를 밀어줄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마흐무드 카르자이를 끌어들이는 것을 무슨 든든한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땡전 한 푼 안 내고 지분 챙긴 그분

지난 7월 아프간 검찰청 차장은 “카불은행이 주주들을 중심으로 무이자나 상환 기간 제한 없이 413회에 걸쳐 불법대출을 해줬다”고 밝혔다. 대개는 경호원, 정원사, 가정부 등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로 대출했다. 카불은행은 2005년부터 탈레반 세력이 다시 득세하고 있는 남부 파슈툰을 비롯한 지역들에 은행 창구를 여럿 개설했다. 게다가 아프간 정부도 군인과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 임금을 카불은행을 통해 지급하고 있다. 2009년 카르자이 대통령이 부정선거 의혹을 받으며 재선에 성공한 이후, 카불은행과 임금 지급 서비스 계약을 맺는 부처가 더욱 늘어났다. 와일더 연구원은 “공무원 임금 지급 통로로 선정된 것은 카불은행에는 큰 기회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에게 줄 임금 입금을 미뤄 더 많은 이자를 불리거나, 혹은 예금된 돈을 각종 분야에 재투자하는 식으로 카불은행은 금고로 들어왔다 나가는 돈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금고를 채운들 소용없었다. 흘러 들어온 돈은 금고 속에 결코 오래 잠들어 있는 법이 없었다. 생기는 족족 파누드가 제국을 건설하는 데 사용됐다. 그는 마무드 카르자이와 함께 시멘트 사업에 투자했다.(3) 그 밖에 방송(180만 달러), 휘발유 판매, 카불의 부동산 등에 널리 투자했다. 특히 파미르 항공을 빼놓을 수 없다. 카불은행 창립자는 ‘믿음(신용)을 갖고 비행하라’를 모토로 내걸고, 2009~2010년 파미르 항공에 98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때부터 파누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두바이까지 여행할 때마다 자기 소유의 항공사를 이용했다. 경쟁사를 침몰시키기 위해서는 출혈경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때 카불∼두바인 간 항공료는 50달러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그의 모험은 2010년 5월 돌연 막을 내렸다. 파미르 항공사 소속 항공기 안토노프 24가 힌두쿠시 산맥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승객 44명이 사망했다. 서류를 위조해 비행에 나섰던 항공기가 화근이었다.

이때 제2의 인물이 등장했다. 2008년 카불은행장으로 부임한 칼리룰라 페로지였다. 추락 사고 이튿날 페로지는 제대로 보상금을 받은 일부 피해자의 아내들을 언론에 출연시켜 “파미르 항공은 무죄”라고 말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과부가 된 것을 NATO 소속 관제사들의 탓으로 돌렸다. 페로지도 오랜 기간 러시아에 체류한 인물이었다. 바슈키리 우파경찰학교를 다녔고,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적·종교적으로 다른 7개 분파가 연합해 결성한 단체)을 위해 에메랄드 밀매에도 가담했다. 이후 보안책임자로 카불은행에 입사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무원 임금 입금

2010년 5월 아프간 수도에서 취재진은 시인의 아들인 페로지를 만났다.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 보이는 라코스테 폴로셔츠를 입은 그는 취재진에게 은행가라는 직업에 꽤나 파격적인 견해를 늘어놓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모든 사업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시간이 없다. 매일같이 권력 판도가 뒤바뀌고 있다. 더욱이 미군이 떠나고 나면 사업에 투자할 자금이 훨씬 부족해질 것이다.”

페로지가 무대 전면에 나선 뒤로 좀처럼 파누드를 카불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그는 두바이에 은신한 듯했다. 과거 NATO에서 일했던 한 미국인 관계자에 따르면, “파누드는 2여 년 동안 더는 은행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은행은 계속 폰지 피라미드처럼 움직였지만,(4) 파누드는 합법적 사업을 끌어들여 난관을 벗어나려 했다. 반면 페로지는 마무드 카르자이나 하신 파힘과 의기투합해 대규모 대출을 남발했다. 그는 예금이 들어오는 족족 돈을 꺼내 대출에 사용했다. 약탈 행위는 2010년 내내 이어졌다. 최근 파누드와 페로지가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계속됐다. 2010년 8월 말 중앙은행이 두바이의 부동산 등에 투자해 3억 달러를 날린 파누드와 페로지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은행이 파산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기겁한 고객들이 카불은행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2010년 9월 중앙은행이 어쩔 수 없이 몇 차례에 걸쳐 카불은행에 8억2500만 달러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설립자보다 한 술 더 뜬 후임자

검찰청 차장은 “아프간 정부는 3억 달러에 달하는 카불은행의 아랍에미리트 소유 자산을 매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페로지는 그림 같은 팜 주메이라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호화주택 35채를 1억6천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지난 9월 페로지와 은행장 파누드를 석방했다. 아직까지 매각 가능한 다른 재산의 출처를 밝히는 데 모종의 협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그들은 고작해야 징역 2개월에 처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AP)의 콜린 쿠크맨 연구원은 거의 파산에 가까운 이번 사태의 깜짝 놀랄 만한 결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불은행의 추락은 아프간 경제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카불은행 사태는 심각한 위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카불은행이 아프간 경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불은행은 실질적인 생산과 관련된 투자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일종의 ‘외환 사냥꾼’으로만 활동해왔다. 요컨대 카불은행은 흡사 돈을 길어내는 펌프와 같았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해외 금융감독기구를 비난하면서도(해외 금융감독기구는 실제로 이상하리만치 무능력했다),(5) 너무 깊이 개입하는 것은 피했다. 사건이 불거지자 카르자이 대통령은 중앙은행과 평가감독위원회(MEC·반부패사무국)의 카불은행에 대한 조사를 허가했다. 하지만 이내 말을 바꾸었다. 그는 카불은행 주주들이 중앙은행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증언하도록 하는 대신, 개인적으로 대출받은 돈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의 아프간 재건을 위해 총감독관이 제출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카르자이 대통령은 중앙은행에 외국인 자문관을 두지 못하도록 했다.

파산 직전, 정부가 팔 걷고 지원

세계은행은 아프간 은행 시스템의 건전성 제고를 위해 주요 민영은행 10곳에 대한 감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려 한다. 하지만 아프간 민영은행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아프간의 제2의 금융기관 아지지 은행도 2008년부터 두바이 투자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카르자이 대통령이 2009년 초 아지지 은행의 대주주들을 카불은행장과 함께 불러다 각자 얼마 정도의 손실을 입었는지 캐물었다. 하지만 둘 다 대통령을 안심시킨 뒤 유유히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사업을 재개했다.


글. 루이 앵베르 Louis Imbert (언론인)

번역. 허보미 jinougy@naver.com

(1) 앨리사 루빈·로드 노드랜드, ‘Kabul Bank is Portrayed as a private A.T.M. for Afghanistan’s Elite’, <뉴욕타임스>, 2011년 3월 29일.
(2) 이 협상과 관련한 분석은 2011년 6월 마틴 반 빌저트의 <Afghan Analyst Network> 참조. http://bit.ly/aankb620.
(3) 미르 세디크 살리크, <아프가니스탄 투데이>, 2011년 7월. http://bit.ly/r72350.
(4) 기존 투자자에게 받은 돈으로 신규 투자자에게 대출해주는 사기술로, 특히 미국인 버나드 메이도프가 이 방법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5) 2011년 미국의 아프간 재건을 위한 특수 총감독청은 한 보고서를 통해 ‘중대한 감독상의 허점’을 지적했다. http://bit.ly/aankb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