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데모스당이 직면한 스페인 개혁의 한계
진보 진영은 때론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는 듯하다. 이기려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덜 급진적’으로 보이려는 노력이 오히려 핵심 지지층을 떠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2014년 스페인에서 마르크스식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을 공략하고자” 새로운 정당이 탄생했다. 포데모스(스페인어로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이름의 정당에 이니고 에레혼과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비롯해 2006년 당시 대학 카페테리아에서 ‘불복종’을 외치며 행진하던 옛 학생들이 한데 모였다. 여기에는 협동조합 서점 마라분타의 경영자이자 극좌파 군소 정당인 반자본주의 좌파당(IA)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미구엘 우르반도 있었다. 특히 2011년 ‘분노한 사람들’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반긴축정책 단체, 반국외추방 단체, 여성운동 단체들이 포데모스에 합류했다. 이들의 목표는 정권을 잡아 기존의 주요정당들을 흘러간 역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78년 체제’의 문제를 지적한 포데모스
6년이 흐르자 페드로 산체스 사회당 정부에서 제2 부통령을 맡은 이글레시아스를 비롯해 포데모스 당원 여럿이 정부 부처에 자리를 맡게 됐다. 그 사이 반자본주의파는 포데모스와의 동맹을 깼으며, 2인자였던 에레혼은 당을 떠나 좀 더 온건 성향을 띤 당을 세웠다. 이 같은 변화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2011년 5월 15일, 수천 명의 시민이 스페인 곳곳의 주요 도시 광장을 점령했다. 부동산 거품이 터지자 긴축정책이 시행됐고, 그 결과 경제위기가 닥치자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분노한 사람들’은 스페인 정치 시스템 근간을 뒤흔들었다. 첫 번째 표적은 오랫동안 국민당(PP)과 사회노동당(PSOE)이 정권을 주고받으면서 유지되던 양당 정치 체제였다.(1)
포데모스 창립자들은 ’78년 체제’의 한계를 폭로했다. 이는 1978년에 제정된 헌법을 빗댄 표현이다. 탈(脫)프랑코 과도기 시절이었던 1978년, 이때 헌법은 과거의 대립과 상처가 앞으로 다가올 성장과 풍요 속에 흐려질 것이라는 전망 하에 만들어졌다. 에레혼은 “기회의 문이 막 열렸다”고 설명한다. “다방면을 아우르며 과거와 결별한 여당, 경제위기의 피해계층으로부터 출발한 새로운 여당의 탄생에 필요한 조건이 갖춰졌다.”(2) 이들이 보기에 다양한 문제로 생긴 불만을 종식하고 “분노를 제도적인 힘으로 승화”(이는 포데모스 초기 선언문 제목이기도 하다)시키려면, ‘분노한 사람들’ 운동이 지닌 수평성을 뛰어넘어야 했다. 다시 말해, 5월 15일 시위에서 나온 요구사항을 진보 진영뿐만 아니라 더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체계적인 계획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같은 계획을 정계에 공개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기꺼이 싸울 각오가 된 정당이 계획을 추진한다.
포데모스가 적용한 ‘포퓰리즘 가설’
‘좌파’라는 용어가 국민당과 마찬가지로 비리 스캔들로 쇠퇴의 길에 내몰린 사회노동당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포데모스는 좌우파 이분법을 버리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지지하는) 과두정치, 그리고 시스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다. 다시 말해, “카스트(특권계급)” 대 “일반 대중”, “그들” 대 “우리”인 셈이다. 이는 포데모스 지도층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이론에서 도출한 ‘포퓰리즘 가설’을 적용한 결과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남미 국가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고려하여 포데모스는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지주로 삼았다. 큰 위기가 닥치면 사회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불만이 나오기 마련이고, 상황과 전혀 무관하거나 심지어 모순된 불만일 때도 있다. 이때 한 인물이 낡은 체제를 전복하고자 이들을 통합하는데 성공할 것이다.(3)
영국 지식인 페리 앤더슨은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날 현실에 충실한 좌파를 만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역사에 기록된 좌파의 실패를 깨닫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4) 포데모스는 분석을 통해 가능한 모든 결과를 도출했다. “소련이 붕괴하고 유럽 공산당의 사회적 기반이 약해지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저평가됐고, 공산주의에 대한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에레혼과 이글레시아스처럼 포데모스의 창립멤버이자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후안 카를로스 모네데로가 설명했다.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을 흔들며 기업의 국유화를 외치고 군주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전통적인 급진 좌파의 코드를 이용하는 것은 생산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던 과거의 상흔을 반복할 뿐이다. “정계에선 우리를 ‘급진 좌파’로 평가하고 관련 상징물을 가져다 붙였어요. 자신들이 쉽게 이길 수 있는 길로 우리를 끌어들였죠. 정계에서 정한 우리의 위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대화에 쓰일 용어’ 때문에 싸우는 게 주된 일이었어요. 정치에선 논쟁의 용어를 정하는 일이 승패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5)
이 같은 관점에서 포데모스는 TV로 방영되는 토론이 “의회 토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6)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이 정당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더 많이 투쟁하기 때문”이다.(7)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장치의 일환으로 2010년 TV쇼 <라 투에르카(La Tuerka)>가 만들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매주 각계각층을 대변하는 다양한 정계 인사들이 출연해 토론하며 자신의 소통 전략을 갈고 닦는다. “<라 투에르카>, 그리고 포데모스는 좌파에서 금기시하던 것을 모조리 하고 있어요.” 2015년, 이글레시아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좌파는 TV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TV 토론쇼에서 논거를 잘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며, 차라리 30분 정도 발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죠. TV를 중심으로 전략을 세우면 안 된다고요.”(8) “2014~15년 정책의제를 마무리한 건 우리였습니다.” 오랫동안 포데모스에서 “연설과 논거”를 담당했으며 현재 마스 마드리드 당원으로서 마드리드 시의원이 된 호르헤 모루노가 설명을 덧붙였다. “부패, 정계 쇄신, 사회 문제 등 우리가 다루던 주제와 전달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정당이 우리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란 매우 어려웠죠.”
이제 집단적 기준의 정당은 무의미
지역방송에서 방영되던 <라 투레스카>는 큰 성공을 거둔 덕분에 전국으로 송출되는 국영 채널로 옮겨왔다. 다른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이글레시아스는 포데모스에서도 미디어 인지도가 강한 인물이 됐다. 에레혼은 모두가 계획된 일이었다며 자축한다. “미디어에서 파블로(이글레시아스)가 보여주는 리더십은 중요한 도구로 작용합니다. (…) 최근 남미 정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분석하며 배운 사실은 (…) 이제 집단적 기준, 깃발, 정당이나 상징은 무의미하며 개인의 이름으로 사람을 인식한다는 점입니다.”(9) 이 같은 의인화 전략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지만, 당을 띄우는데 한몫 했다는 점만큼은 대다수가 인정한다. 포데모스 창립멤버이자, 그 역시 정치학과 교수인 호르헤 라고는 지지층을 응집하는 역량이 어디서 나오는지 설명한다. “파블로는 자신이 누구를 비판하는지, 무엇에 반대하는지, 어떤 것을 제안하는지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예컨대 파블로는 특권계급, 부패에 반대하죠. 5월 15일 시위에 참여한 ‘분노한 사람들’은 각자가 매우 다른 이들이지만 그들 모두 파블로가 자신을 대변한다고 느낍니다.”(10)
2014년 5월, 포데모스는 창립 5개월 만에 유럽의회 선거에서 8%의 득표율을 차지하고 의석을 5석 확보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스페인 정계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국민당(26%), 사회노동당(23%), 좌파 지역정당 연합인 복수 좌파(10%)에 이어 득표율 5위를 차지했다. 이윽고 2015년 총선에 모든 이목이 집중됐지만, 그 사이 포데모스의 열띤 선거 활동은 멈출 줄 몰랐다. 2014년 5월 유럽의회 선거부터 2016년 9월 갈리시아와 바스크 지방 지역선거까지, 포데모스는 7개의 주요 투표에 참여했다. 기반이 아직 다 잡히지 않았지만 수시로 캠페인을 벌였다. 에레혼의 표현처럼 “달리면서 신발끈을 묶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11)
그들은 전격전(Blitzkrieg) 전략의 일환으로 “선거전에서 맹공”을 펄쳤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승리를 거둬야 했다. 당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효율성이었다. 신속하게 움직이기 위해 수직적 구조로 활동하고, 운동가들이 직접 투표에 참여하게 하고, 헌법과 지지층에 기반한 민주적인 방식의 기나긴 의사결정 절차를 삼갈 것을 요청했다.
“학계 출신 당원들과 우리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정치적 대립인 셈입니다.” 포데모스 창립멤버이자 반자본주의 좌파당 소속이었던 우르반이 설명한다. 반자본주의 좌파당은 해체되어 문화 단체 안티카피탈리스타스가 됐고, 포데모스 소속단체로 통합됐다. 군소 정당이었던 반자본주의 좌파당은 강한 정치색을 띤 운동가 수백 명의 터전이었다. 대도시 여러 곳에 거점이 있었던 덕분에 포데모스는 조직망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었고, 세력을 전국구로 확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르반은 포데모스가 수많은 현장투표, 그리고 “운동가나 일반 당원 구별 없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투표 등 막대한 선거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당을 구성하는 지지층이 “단순한 자문용 부록 역할, 혹은 캠페인 위원회”로 전락했다고 여긴다.
안티카피탈리스타스의 수장 테레사 로드리게스는 2020년 2월까지 안달루시아 의회 의원을 역임한 뒤 의원직을 떠나 지역 정당 ‘전진하는 안달루시아’(Adelante Andalucia)를 창당했다. 로드리게스는 “포데모스는 제대로 틀을 갖춘 대규모 운동 단체를 만들 생각을 버렸어요. 동료들과 얼굴을 맞대고 논거의 모순점을 주고받으며 합의점을 찾는 토론 대신 기계에 대고 ‘예’, ‘아니오’, ‘기권’을 연신 눌러야 하죠. 운동가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지지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받아들이십니까? 예 혹은 아니오?’ 같은 식입니다. 모두들 그에게 호감을 느껴 포데모스에 들어왔으니 대답은 언제나 ‘예’가 되죠.”
“포데모스는 지지기반이 필요했음에도 그들을 경시했어요.” 정치 연구원 기예르모 페르난데스가 덧붙인다. 포데모스 지도층에게 우선순위는 실수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실수의 책임이 극좌파에 있다고 여겼고, “쭉 소수파로 남게 될까 두려워 지지층이 바라는 것과 반대로 가려고” 애썼다. 페르난데스는 언젠가 에레혼이 자신에게 말해준 것이 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늘 지지자들과 반대의 길을 택했어요. 안티카피탈리스타스의 누군가, 혹은 트로츠키주의자가 A라고 말하면, 저는 B라고 말하는 식이었죠. 마음속 나침반은 극좌파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 저는 항상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페르난데스는 한마디 보탠다. “포데모스는 지지기반이 필요했어요. 특히 포스터를 붙이거나 캠페인을 활성화하는 등 현장업무를 맡기려면 강한 이데올로기로 뭉친 지지자들이 필요했죠.”
포데모스, 분열을 자초할 발언을 자제
너무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 덕분에 지방선거 당시 포데모스는 폭넓은 동맹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카디스, 사라고사나 라코루냐 같은 주요 도시에서 시장을 배출했다. “우리가 참여했던 모든 선거를 통틀어 가장 큰 쾌거였습니다.” 우르반이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 후 포데모스는 권력의 실제와 직면했다. 연합 단체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고, 빚에 시달리는 시 자치단체들과 타협해야 했다. 관리들은 변화를 주저하고, 전국 단위로 법령이 바뀔 때마다 그 영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됐다. 여타 단체들과 ‘전통적인’ 좌파를 구분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포데모스는 한결같이 분열을 유발할 만한 발언을 피했다. “선거 프로그램 때문에 입장표명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어느 한쪽 편을 들수록 사람들의 반발은 더 커졌죠.” 모네데로가 설명한다.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 제출하려고 만든 문서에는 사회운동에서 비롯된 여러 제안이 담겨있습니다. 기본소득제, 군주제 찬반 대국민투표, 공채 지불유예 등이죠.” 문서 작성에 참여했던 로드리고 아미롤라가 지적했다. “하지만 당이 점점 자리를 잡아갈수록 조금 온건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 더 많은 지지자를 모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스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2015년 여름, 그리스에서 급진좌파 정치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총리로 당선됐다. 그 역시 ‘판을 엎어버릴’ 목적이었다. 치프라스가 채권국들과 다수의 양도계약을 맺자 포데모스의 경제담당 서기관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채무를 재구성하는 과정이 (…) 지금의 스페인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12) 결과적으로 반긴축정책의 실현가능성을 비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유럽연합 내에서 반긴축정책에 부합하도록 정책을 바꾸는 일도 요원해 보였다. 국제 통화 기금(IMF), 중앙은행, 유럽 위원회로 이루어진 3두 체제가 눈 밖에 난 회원국에게 얼마든지 제재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여론의 분위기가 변했다. “차고에서 컴퓨터 세 대와 전화 두 대만 가지고 당을 창립한 이 무해한 청년들을 겨냥한 르포가 쏟아졌어요.”(13) 매일같이 폭로와 스캔들이 터졌다. 포데모스가 베네수엘라나 이란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거나, 포데모스 간부들이 사실 남미 ‘공산주의 독재정부’의 비밀요원이라는 설까지 있었다. 에레혼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대중매체가 등을 돌리자 TV에 기반을 둔 전략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그 여파로 지지자들도 잃었다. 모네데로는 “TV에 총력을 기울이고,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 출연하는 것으로 나라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 그는 현장 경험이 없었어요. TV의 효용을 이해하지 못했죠.” 매체는 포데모스가 무해해 보일 때만 반겨줬다.
2015년 총선거가 다가오는 중요한 시기가 오자, 스페인 제도기관에 대한 포데모스의 연설 내용이 변했다. 운동 초기에는 ‘78년 체제’를 정면에서 공격하며 모든 스페인 국민이 단결해 1978년 헌법에 기반한 체제를 재정의해야 한다며 제헌 의회를 제안했다. 그 후, 이 같은 언급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판을 뒤엎는 대신, 기득권층의 특권을 박탈하기만 하면 모두가 바라던 민주주의가 찾아올 것이라는 내용이 주가 됐다.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지도층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 갈등이 지닌 구조적 특성을 간과한 채 기득권층과 국민만을 외치는 연설은 그마저도 두 개념 사이의 경계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다. 연설은 점차 선과 악, 청렴과 부패에 대한 도덕적 싸움의 형세를 띠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도덕적 흠결이나 불순한 조짐이 보이면 비난의 화살은 연설의 장본인에게 되돌아왔다. 이글레시아스의 정적과 대중매체는 그가 몇 십 년 만기의 주택융자를 받아 마드리드 중산층 지역에 60만 유로에 집을 샀다는 사실을 몇 주 동안 언급했다.
2015년에 스페인 경제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자 포데모스의 반긴축정책은 힘을 잃었다. 포데모스보다 앞서 2006년에 창립됐음에도 “우파의 포데모스”라는 평가를 받는 시민당(시우다다노스)이 부상하면서 당의 전략이 흔들렸다.(14) “시민당의 득세는 시스템의 교활한 술책이었습니다. 대중매체에서 우리가 맡고 있던 자리를 차지했죠. ‘변화’를 외치는 또 다른 정당이 등장한 것입니다. (…) 포데모스는 이제 아웃사이더가 아닌 주류로 보였죠.”(15) 이글레시아스는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 한편, 모네데로가 상황을 요약한다. “낡음과 새로움의 대립 구도가 문제의 본질이라면, 시스템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를 없앨 수 있다고 여깁니다.” 게다가 시민당 때문에 포데모스는 그토록 벗어나려고 애쓰던 좌우파 선상에 다시 놓이게 됐다.
연합전선을 구축한 ‘포데모스 연합’
17개월 동안 열성적으로 선거운동에 매달린 끝에 작은 환경단체와 좌파 지역단체들이 포데모스에 합류했고, 2015년 12월 20일에 열린 총선거에서 20.66%의 득표율을 얻었다. 스페인 하원 총 350개의 의석 중 69석을 확보했다. 국민당과 사회노동당은 사상 최악의 성적을 냈지만, 가까스로 1~2위 자리를 지켰다.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바로 과반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죠. 다른 결과가 나올 경우를 대비한 계획은 없었습니다. 캠페인에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이를 계기로 당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포데모스는 조직구조와 전략을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선거 결과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나오지 않았고 사회노동당 페드로 산체스는 시민당의 자유 중도파와 손을 잡으려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 구성 실패로 이어졌고, 2016년 6월에 조기 총선거가 예정됐다. 포데모스는 다가올 총선을 겨냥해 ‘포데모스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급진 좌파 정당 좌파연합(Izquierda Unida)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이로써 포데모스는 명실상부한 좌파로 자리매김했다. 모호한 태도를 고수하던 포퓰리즘 전략도 그만뒀다. 그렇게 혼란이 가중됐다.
2015년 12월 총선의 실망스러운 결과 이후 몇 달 동안 이글레시아스와 에레혼은 과반수 득표를 위한 전략의 방향성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이는 연합전선을 두고 포데모스 내부에서 벌어진 언쟁을 통해 극명히 드러났다. 언론은 이 동족상잔의 대결을 한껏 즐기며 기사화했다. 두 인물의 충돌과 권력 싸움에 얼룩진 당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됐다.
하지만 내부 분쟁의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글레시아스는 “문제의 핵심은 앞으로 계속 포퓰리즘을 고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16) 단순히 정치 전략을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당의 본질적인 이데올로기에 관한 토론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 계보를 잇는 좌파연합과의 동맹으로 좌파전선을 구축하자, 이글레시아스는 과두정치를 강경히 반대하고 포데모스의 사회 투쟁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아울러 “과거의 블록”을 새로이 구축하고자 운동가들이 “시민 사회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을 장려했다.(17) 반면, 무페와 라클라우를 신봉하는 에레혼은 시민 대다수가 지지할 만한 폭넓은 정책을 만들려면 포퓰리즘 전략을 더욱 파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이 부족한지 찾아 나서야”하며, “과거의 정체성으로 퇴보”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18) 후자는 좌파연합 동맹을 겨냥한 발언으로 보인다.
좌파라는 위치를 받아들이면서도 급진 성향의 “낡은 좌파”와 차별화하고, 동시에 전통적으로 사회노동당을 지지해온 중도 성향 유권자를 포섭하려면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2016년 6월 초, 정당의 선거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글레시아스는 “새로운 사민주의” 리더임을 자처했다. 그는 선거정책의 경제 부문이 비센스 나바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며 그의 연구를 내세웠다. 나바로는 힐러리 클린턴, 토마 피케티, 야니스 바루파키스, 제임스 갈브레이스 같은 저명인사들에게 조언을 해주던 스페인 정치학자이자 사회노동당과 가까운 인물이다. 이글레시아는 “소수의 특권층에 맞서 사회 대다수를 지키는 (…) 사민주의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 같은 행보의 전환은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전 총리의 심기를 거슬렀다. 사파테로는 이를 사회노동당의 정체성을 도용하고 유산을 빼앗으려는 무례한 시도로 간주했다. “누구나 사민주의자가 되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사민주의는 곧 사회노동당이다 !”(19) 총선 결과 포데모스 연합은 13.42%의 득표율을 얻어 사회노동당(22.63%)이나 국민당(33%)과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2017년 10월, 카탈루냐 독립 국민투표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태를 통해 ‘회색’ 전략의 폐해가 드러났다.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스페인 중앙정부가 허가하지 않은 국민투표를 강행했고, 지역 주민들은 분리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사태는 국가 규모의 정치 분쟁으로 번져 몇 달 동안 정치 매체 일면을 장식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입장을 표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포데모스는 국민투표 개최에는 찬성했지만, 투표가 열리자 독립 반대 진영에 섰다. 2014년에 포데모스가 다국적 스페인을 만들겠다고 단언했을 당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지역은 다름아닌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 지방이었다. 그 후 포데모스는 분리 반대파를 언짢게 하지 않으려고 해당 주제를 얼버무리는 모습을 보였다. “포데모스는 징역형을 받고 수감된 자치정부 지도부나 중앙정부의 탄압 등 카탈루냐에 대한 입장을 밝힐 때마다 표를 잃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며 사태가 진정되길 기다렸죠.” 결국, 카탈루냐 유권자들은 등을 돌렸다. 그렇다고 분리 반대파의 표심을 사로잡은 것도 아니었다며 마리아 코랄레스가 설명한다. 코랄레스는 포데모스가 만든 카탈루냐 연합 엔 코무 포뎀(En Comú Podem, 함께라면 우리는 할 수 있다)의 대변인이다.
산체스 정부에 참여한 포데모스연합
포데모스는 기존의 경제모델과 양립할 수 있는 형태의 사민주의를 추진하고자 채무 재구성이나 전략산업 국영화 등 과거 요구사항들을 단념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사회노동당을 몰아내려고 애쓰던 포데모스 앞에 이제 산체스 정부 참여라는 질문이 놓여있다. “진보 연합 정부”는 경제위기와 긴축정책에 시달리는 스페인, 그리고 유럽에서 “극우파에 대항할 최고의 처방”이 될 듯하다.(20) 2019년 12월 30일자 이글레시아스의 발언이다.
2019년 1월, 전략과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당내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초기에 포데모스 마드리드 당원 명단 최상단을 장식했던 에레혼은 얼마전 자신이 창당한 마스 마드리드(Más Madrid) 소속으로 지역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한편, 이글레시아스는 과거 2인자와 맞붙을 다른 후보의 출마를 발표했다. 1년이 지난 2020년 2월, 이번엔 안티카피탈리스타스가 포데모스로부터 분리를 선언했다. 포데모스 연합이 산체스의 연합정부에 참여한 직후였다. 2021년 5월 4일, 이글레시아스는 국민당과 복스(Vox)의 득표를 저지할 심산으로 마드리드 지역선거에 출마했지만 대패했다. 이번엔 이글레시아스 자신이 당에서 맡은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포데모스를 떠났다. 그 후, 그는 자신이 가장 효과적이라 믿는 방식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라디오, TV, 신문·잡지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드는 “비평 저널리즘”이다.
포데모스 연합이 산체스 정부에 참여한 결과 최저임금이 22% 인상됐다. 월세 규제, 그리고 퇴직연금에 물가상승률을 반영하는 물가 연동제가 도입됐다. 그들은 과연 판을 뒤엎었을까? 모네데로는 “이 같은 조치가 자본주의나 가부장제, 식민주의를 없애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삶이 훨씬 나아졌음은 명백합니다.”
글·마엘 마리에트 Maëlle Mariet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기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Raúl Guillén, ‘Alchimistes de la Puerta del Sol ‘태양의 문 광장’ 민주주의 연금술사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1년 7월호.
(2), (9) <In Política, manual de instrucciones>, Fernando León de Aranoa감독 영화, 2016.
(3) Razmig Keucheyan & Renaud Lambert, ‘Ernesto Laclau, inspirateur de Podemos 포데모스당에 영감을 불어넣어준 라클라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9월호. 한국어판 2015년 10월호.
(4) Perry Anderson, ‘The only starting-point for a realistic left today is a lucid registration of historical defeat’ : “Renewals”, <New Left Review>, n°1, 런던, 2000년 1~2월호.
(5) Pablo Iglesias, ‘Understanding Podemos’, <New Left Review>, n° 93, 런던, 2015년 5~6월호.
(6) ‘Militar en los medios de comunicación’, < La Tuerka> 방송, Tele K, Madrid, 2012년 10월 24일.
(7) ‘La crisis del régimen’, <La Tuerka> 방송, Tele K, Madrid, 2013년 2월 21일.
(8) Ana Domínguez et Luis Giménez, 『 Podemos, sûr que nous pouvons! 포데모스, 우리는 분명 할 수 있다! 』, Indigènes Éditions, Montpellier, 2015.
(10) “Jorge Lago : “Ninguna de las reivindicaciones se ha cumplido””, ABC, Madrid, 2021년 5월 15일.
(11) Iñigo Errejón, Con todo: De los años veloces al futuro, Planeta, Barcelone, 2021.
(12) ‘Podemos rectifica y ya no pide una reestructuración de la deuda pública de España’, <Expansión>, Madrid, 14 juillet 2015.
(13) <Política, manual de instrucciones>, op. cit.
(14) ‘Josep Oliu propone crear “una especie de Podemos de derechas”’, <El Periódico>, Barcelone, 2014년 6월 25일.
(15) ‘Understanding Podemos’, op. cit.
(16) ‘Iglesias cree que Podemos tiene que decidir “si seguir siendo populista o no”’, <El País>, Madrid, 2016년 10월 5일.
(17) ‘Oposición transversal o el Podemos que necesitamos’, <Público>, Barcelone, 2016년 11월 21일.
(18) ‘Podemos ganar’, <20 minutos>, Madrid, 2016년 11월 28일.
(19) ‘Sánchez elogia el legado de González y Zapatero: “Son los mejores y del PSOE”’, <EFE>, Madrid, 2016년 6월 17일.
(20) ‘Iglesias : “Será el gobierno del sí se puede y la vacuna contra extrema derecha”’, <EFE>, Madrid, 2019년 12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