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헌법주의의 오랜 전통

2011-11-11     사미 고르발

지난 10월 23일의 선거에서 승리한 이슬람 보수당은 두 좌파 정당과의 연정을 도모하고 있다. 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예정이다.

데스투르(Destour·헌법)는 튀니지 정치의 정체성을 알리는 매개체이다. 1920년대 입헌자유당을 창시한 셰이크 압델라지즈 탈비가 처음 대중화하고, 튀니지 독립의 아버지 부르기바가 1934년부터 다시 차용해 발전시켰다. 데스투르는 사법 및 제도적 근대성에 근접하는 수단으로 이해돼, 식민지 질서와 절대권력자인 베(Bey)(1)의 통치로부터 단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권력의 문에 도달한 뒤에야 민족주의자들은 제헌국회에 대한 요구를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부르기바가 1955년11월 창설하고 이끈 신(新)데스투르당의 스팍스주 의회는 지역 및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민주총선을 시급히 실시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에 앞서 그해 6월, 튀니지 왕과 프랑스 총독 피에르 망데스프랑스가 협상을 벌여 튀니지의 자치가 결정됐다. 이는 당시 즉각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며 군사투쟁 재개를 외치던 벤 유세프 정당의 급진세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왕과 총독의 합의에 반발하는 폭동을 막기 위해 부르기바는 의원들에게 제헌국회 선거에 관한 발의안을 밀어붙이도록 했다. 이는 일석이조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의 통치를 과거지사로 규정하면서 독립 문제를 주요 이슈로 다시 쟁점화하고, 동시에 반대파인 벤 유세프 급진세력을 몰아내는 것이다.

식민지 때부터 줄기차게 제헌 추진

남은 문제는 선거에 비협조적인 왕실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튀니지의 베’였던 시디 라민은 ‘헌법주의자’(데스투리앙)가 석권할 국회가 자신의 특권을 빼앗을까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라민은 지연작전을 펼쳤고, 처음에는 의회의 표결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학관계는 민족주의자에게 유리하게 변했고, 12월 19일 구시대의 왕조는 1956년 3월 25일의 선거 시행령에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헌법의 위상을 낮춰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했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명시되길 원했다. ‘튀니지 왕조에 헌법을 도입한다.’(2)

독립 즉시 제헌의회 구성

투표 방식은 1956년 1월 6일 결정됐다. 즉, 18개의 새로운 선거구에서 각 선거구당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다. 1956년 3월 20일 프랑스 정부가 독립 서약에 서명하고 5일 뒤 시작된 선거는 85%에 육박하는 참여율로 국민투표 성격을 띠었다. 국민전선은 98석을 차지하며 의석을 휩쓸었다.(3) 자신의 지지 기반인 모나스티르에서 100% 지지로 당선돼 권력을 쥔 부르기바는 이제 그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근대사회의 기틀을 다지는 방안을 모색하기 전에 우선 문서로만 존재하던 독립을 공고히 해야 했다. 제헌국회가 이에 도움이 됐다.

3년간의 토론과 논쟁

프랑스는 서약에 서명하면서 보호통치를 끝냈다. 프랑스는 튀니지인들이 자신의 내정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데 동의했지만 외교, 국방, 심지어 질서유지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귀국하지 않은 프랑스 공무원 수가 튀니지 공무원 수보다 훨씬 많았고, 이들이 여전히 튀니지 행정조직의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독립 여부와 상관없이 프랑스 군인 5만6천 명이 계속 주둔했다. 따라서 제헌국회의 급선무는 되돌릴 수 없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이토록 끔찍하게 ‘어중간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국회는 그해 4월 8일 바르도궁의 왕실(상징적으로)에서 처음으로 개회해, 부르기바를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다. 국회는 6일 뒤 1조 3항으로만 구성된 ‘1956년 소헌법’에 관한 법안을 채택한다.

국가와 종교의 관계 문제가 광기를 일으키고 정력만 낭비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부르기바는 이와 관련한 논쟁을 피하려 했다. “튀니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권국가다. 튀니지의 종교는 이슬람이고, 언어는 아랍어이다.” 1956년 4월 14일 헌법의 1항은 이처럼 간결함과 모호함의 합작품이었다. 이 조항은 차후 1959년 6월 1일의 헌법 1항에서 다시 채택됐다.(4) 이슬람은 국가의 한 종교이지 국교는 아니다. 즉, 신념의 자유가 ‘인정’되고 종교 숭배의 자유는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보호된다’(3항). 따라서 튀니지는 완전히 세속적이지 않지만,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세속 국가다. 법의 근간이 샤리아(이슬람법)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와 표현의 자유, 절묘한 양립

2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이 헌법이 명시하는 조건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는 베(5)의 특권을 빼앗고, 왕조를 평범한 기관으로 전락시키는 내용이었다.

베로부터 내각 구성과 통수를 위임받은 부르기바는 국회 의장직을 포기했지만 물밑 작업은 계속했다. 제헌국회의 발의자이자 지휘자로서 부르기바는 제헌 작업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몇 주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던 작업은 3년 2개월이나 지속됐다. 1957년 1월 이후 국회의원들은 ‘영국식 모델’에 영향받아 장장 107개 항의 왕조 헌법 초안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투표에 부친 적도 없고, 총회에서 논의한 적도 없었다. 부르기바는 약화되고 흔들리는 왕실에 치명타를 가할 적절한 시점을 전략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1957년 7월, 그는 왕실 부패와 왕자들의 공금 횡령을 고발하며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퇴폐와 수치로 점철된 베의 지난 행적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참을 수 없는 파행을 끝내고 싶었다. 같은 해 7월 17일 신데스투르 지도자는 “때가 되었다”며 협박했다. 25일 특별 의회가 소집됐다. 연사마다 왕실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오후 3시 30분, 부르기바의 발언이 시작됐다. 그는 베에 대해 “치장만 요란한 꼭두각시에 낙오자이며, 왕조에 부여된 사명을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이어서 그는 즉각적인 왕정 폐지를 외쳤다. “건전한 기초 위에 국가를 세우려면 국민의 대표자는 국민과 엄밀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회기 중에 공화국이 선포됐다.

판세가 완전히 변했으므로, 제헌국회는 1956년 4월 14일 중단한 업무를 재개해야 했다. 새로운 지도자에 맞는 대통령 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1958년 1월, 전문이 없는 89개 항의 새로운 공화국 헌법안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전히 미흡했다(체제 성격, 기본권 적용 등). 헌법은 재정비가 필요했다.

당초 공화국의 헌법 공표는 1958년 4월 9일자로 예정돼 있었지만, 프랑스와의 위기가 불거지자 연기됐다.(6) 부르기바와 그의 측근들은 이 짬을 이용해 프랑스의 행정조직 논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또 프랑스가 1958년 5∼10월 4공화국에서 5공화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어, 행정부의 우위를 강조했다. 이때부터 절차는 가속화했다. 1959년 1월 26일 헌법안이 첫 표결에 부쳐졌다. 이어 5월 28일 60개 항목의 헌법이 세 번의 심의 끝에 마침내 채택됐다. 헌법에는 전문이 실렸는데, ‘이슬람의 가르침과 위대한 마그레브의 단결, 그리고 아랍 가족의 일원으로 이에 충실하려는’ 튀니지 국민의 의지를 엄숙히 공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 아버지’의 권력욕… 대통령중심제로

1959년 6월 1일, 부르기바는 헌법의 자유주의와는 정반대의 강력한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헌법을 공표한다. 헌법 전문에 언급된 권력분립 원칙은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었다. 대법관에게 보장된 권한은 허상이었다. 표현·집회·의견·종교의 자유와 노조권 같은 기본권은 원칙에서는 인정됐지만, 이의 적용은 국회의 판단에 맡겼다. 그러나 국회조차 행정부의 들러리였다. 국가수반이자 정부의 최고통치자는 전복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탄핵될 수 없고, 장관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었다.(7)

그렇다면 1956∼59년의 헌법은 그 임무에 실패했는가?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고 권리와 자유를 실제 보장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면에서는 그렇다. 그럼에도 헌법이 그 목적을 충분히 수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즉, 독립을 공고히 하고 튀니지 주권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서구 근대주의의 전유물이던 합리성과 법치 형태의 세속 국가 기반을 세우며 구체제와 단절했음을 뜻한다.


글. 사미 고르발 Samy Ghorbal (언론인)

번역. 박지현 sophile@gmail.com

(1) 튀니지는 1574∼1881년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뒤이어 프랑스 보호령하에 콘스탄티노플의 가신인 ‘베’가 자치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경제위기를 이용해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다.
(2) 1955년 12월 29일 명령은 우회적으로 제헌국회의 법률 제정을 금했다. 그러나 1956년 4월 24일부터 국회는 입법권을 갖게 되고, ‘유세피스트 반역자’를 판결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립된 고등법원의 틀 안에서 사법권도 갖게 되었다. 이제 정부는 국가 사안에 대해 정기적으로 이 기관들에 조언을 구해야 했다.
(3) 국민전선은 전체 투표 중 98.34%, 선거인명부 대비 81.48%를 득표했다. 그러나 튀니스와 제르바(벤 유세프가 태어난 섬)에서는 기권율이 높았고, 이곳에서 국민전선은 각각 전체 명부의 41%, 29%를 득표했다.
(4) “튀니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권국가다. 튀니지의 종교는 이슬람이고 언어는 아랍어이다.” 헌법의 1항은 정치적 합의로, 튀니지 국민은 이를 ‘부르기바식 연금술의 결정체’라고 여긴다. 이전 10월 23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이 내용을 그대로 유지했다.
(5) 몽세프(Moncef) 베(1881~1948)는 ‘애국주의 왕’으로,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즉위한 지 1년도 안 돼, 1943년 5월 15일 프랑스에 의해 축출된 뒤 파우에 유배돼 죽었다.
(6) 1958년 2월 8일, 프랑스 공군은 사키에트·시디·유세프 지역의 튀니지 마을을 폭격했다.
(7) 부르기바를 위해 불완전하게 끼워 맞춘 대통령중심제의 1959년 헌법은 그 뒤 여러 차례 검토를 거쳤다(1976년, 1988년, 2002년 등). 이 과정에서 조항의 3분의 2 이상이 본질적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