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란 무엇인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한국의 감독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매우 폭력적이다. 다양한 문법과 의도를 지닌 영화들이 폭력이라는 소재에 집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메리칸 나이트메어(American Nightmare)>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제임스 드모나코 감독의 2013년 영화 <더 퍼지(The Purge)>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2007년 영화 <퍼니 게임(Funny Games)>과 다소 비슷한 사회적 시선을 보여준다. 사회는 물리적이거나 윤리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폭력적인 사회 질서를 통해 개개인의 타고난 폭력성을 억제하려 한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홉스, 루소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이 3세기 전부터 씨름했던 철학적 질문,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또한 우리는 권력의 핵심인 사법기관이 실질적 정당성을 지녔는지, 개인도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많은 영화들이 복수를 다룬다. 심지어 복수를 환호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 사실에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도덕적 원칙보다도 이윤추구와 부의 축적을 최우선시하는 초자본주의 사회에서 몇몇 영화들이 보여주는 복수는 궁극적으로는 자기중심적 복수라기보다는 부패한 사법기관을 향한 사회적 복수에 더 가깝지 않을까?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나홍진은 현재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개성적이고 대단한 감독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수월하거나 유쾌하지는 않다. 나름 영화전문가라는 이들 조차, 이들의 영화가 보여주는 과도한 표현 앞에서 이 영화가 스릴러인지, 드라마인지, 호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의 영화가 감정의 분출구에서 걸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이유는, 해체된 사회에서 파괴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최대한의 복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 감독은 각각 자신만의 코드로 그런 복수를 그려낸다. 봉준호 감독이 극사실적 설정 안에서 저돌적인 상황전개를 통해 서사를 풀어나간다면, 박찬욱 감독은 관객을 가장 깊은 불안과 금기까지 몰고 가는 ‘경계선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 네 명의 감독이 멜로드라마, 코미디, 초현실 판타지, 호러, 고어 사이를 오가며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한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극도로 불평등하고 내면화된 계급관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회와 공공서비스는 제 역할을 못하고, 가장 약한 자들은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며, 범죄자는 처벌받지 않는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서 억눌린 자는 다시 일어서는 방법으로 복수를 택한다. 그 복수의 목적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복수의 주역이 영웅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방어가 아닌 개인적 복수를 다룬 한국의 ‘자경단 영화’에서 복수의 주역은 <추상(Le Vieux Fusil)>의 필립 느와레나 <드라이브(Drive)>의 라이언 고슬링과는 달리, 별로 선량한 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고용된 무명의 킬러거나, 포주, 스토커, 사기꾼이다. 삶과 생존을 위해 종종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수십 년 간 타인에 대한 증오와 부패로 얼룩진 반도의 절반에서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내려 애쓴다.
새로운 한국 영화는 역사를 박탈당한 사회에서 상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영화기법 상으로도 극도로 폭력적인 작품들을 통해 정치 영화, 좌파적 비판, 상황적 한계를 창조해낸다. 한국 영화가 그려내는 생생하고 오싹하고 잔인한 복수는 강제적으로 이뤄진 미국화와 ‘한국의 기적’을 향한 분노의 표출과 다름없다. 이 ‘미국의 위성 국가’는 산업화와 성장을 추구하고 북쪽에 있는 이웃을 능가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그 결과로 얻게 된 것은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사회 환경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폭력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없을까? 이들 한국 영화는 엘리트주의적 일탈의 허울 아래 삶을 탕진해야 할 상품으로 미화하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나, SNCF 샌드위치보다 훨씬 빈약한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에로티시즘을 남용하는 가스파르 노에 감독의 영화보다 훨씬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보여주는 노골적인 폭력 앞에서, 관객은 폭력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극한에 이른다. 걸작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적대자는 연인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주인공의 그림자에 쫓긴다. 이 영화에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며 관객은 판관이 되지만, 코드가 계속 뒤집히면서 관객은 자신의 입장에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영화와 한국의 복수 영화 대부분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관객은 처음에는 주인공을 옹호하지만 이 선택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실패한 정의는 복수를 정당화하고, 이런 복수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관객은 영화가 총구를 돌려 자신들의 관자놀이를 겨냥하는 것을 깨닫고, 흥미진진하게 느꼈던 폭력이 역겨워진다. 그 순간, 관객은 이 부도덕하고 과도한 증오를 유발시킨 주동자가 된다. 즉, 정의를 재차 부정한 책임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복수의 순환 고리는 이런 식으로 종결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진정한 반전영화를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방심하지 않는 한국 영화가 그들의 ‘영웅’과 그들의 목표를 미화하고 적대자를 악마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아주 독특한 하위 장르에는 필사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이미 스스로를 살해한 사회에는 범죄가 있고, 밤이 있고, 사람이 죽고, 더 이상 미래는 없고, 도피와 대결이 있고,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가 죽임을 당하고, 복수와 죽음이 있다.
글·에티엔 셰르슈 Étienne Cherchour
영화평론가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