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을 점령한 히치콕

2022-01-28     프랑수아 알베라 l 영화·미술사학자

평론가는 알프레드 히치콕을 미장센의 명장이라고 칭송했고, 대중은 그를 서스펜스의 대가라고 찬양했다. 이런 열광적인 반응들이 결합해서 히치콕은 오직 예술만을 고민하는 ‘순수한’ 예술가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히치콕은 미국 텔레비전 방송에도 몸담은 전적이 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사회적 담론들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시민 케인>의 감독 오손 웰스를 제치고 엉뚱하게도 ‘신격화’된, 알프레드 히치콕은 시공을 초월한 우상이 됐다(웰스 역시 <전함 포템킨>의 감독 세르게 에이젠슈테인 감독을 제치고 1위의 자리에 올랐다). 히치콕의 작품은 정신분석학자의 학술적 분석 대상이 되기도, 영화광의 맹목적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의 작품은 탄생배경, 맥락, 대립상황 등과의 연관성을 끌어낸다. 박물관은 히치콕의 작품을 전시품으로 삼았고, 할리우드는 그의 성공작들을 리메이크했다(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구스 반 산트 감독 등). 히치콕의 삶은 존경을 담아서 만든 일대기나 ‘추문’으로 뒤덮인 전기를 통해 낱낱이 파헤쳐졌다. 그는 서스펜스 테크닉으로 영화계의 거장으로 불리며, 심지어 형이상학자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1) 이런 학술자료들의 반복적인 특성 때문에, 우디네 대학의 레오나르도 콰레시마 교수는 히치콕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수많은 자료들은 히치콕이라는 영화인의 여정과 그의 작품이 지닌 다양한 면모를 간과하고 있다. 

영국 태생인 히치콕은 영국에서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커리어를 이어간다. 영국에서 만든 초기 영화(1919~1939)를 살펴보면, 한때 폭넓은 취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스릴러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장르를 폭넓게 다뤘다. 아일랜드 극작가 숀 오케이시의 작품을 각색한 <주노와 공작>(1930)에서는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다뤘고, <사라진 여인>(1938)에서는 뮌헨협정의 유화정책을 비판했다. <비밀첩보원>(1936)에서는 나치즘을 고발했다. 히치콕은 공산주의자인 아이버 몬타그와 가깝게 지냈다. 몬타그는 히치콕 영화의 제작자이자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의 공동창립자다(런던 필름 소사이어티는 러시아 감독 브세볼로드 푸도브킨, 지가 베르토프,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히치콕은 2차 세계대전 직전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이후 영국의 요청으로 나치에 대한 저항을 옹호하는 영화 두 편을 프랑스어로 찍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한 영국 다큐멘터리도 감독했는데, 이는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독이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절의 히치콕은 미국 방송사에서 TV시리즈를 제작하며 자신의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1955년부터 시작해서 300여 개의 작품을 제작했지만, 이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2) 히치콕에 대한 위키피디아 문서는 10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TV프로그램 제작에 관한 내용은 단 세 줄 뿐이다. 히치콕은 섐리 프로덕션(Shamley Productions)을 설립한 이후 28분짜리 TV시리즈 <알프레드 히치콕이 소개합니다(Alfred Hitchcock presents)>를 268편 제작했고, 그중 17편을 감독했다. 이어 <알프레드 히치콕 시간>(The Alfred Hitchcock Hour)이라는 1시간짜리 시리즈를 93편 제작(그중 1편 감독)했다.(3) 그리고 1957~1958년에는 <서스피션>이라는 1시간짜리 시리즈를 10편 제작(그중 1편 감독)했다. 히치콕은 이 ‘부업’에서 얻은 수익으로 <오인>(1956) 등의 영화를 찍었다. 

TV프로그램 제작 활동은 그의 장편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예로 <사이코>는 ‘TV영화(Téléfilm)’로도 만들어졌다. 이는 ‘영화로부터’ 시작된 TV용 제작물이다. 이제는 관점을 바꿔서 ‘TV로부터의 시작’을 생각해보자. 먼저, TV영화가 TV라는 장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각각의 에피소드의 본편 앞뒤에 히치콕이 사회자로 출현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삽입됐다(히치콕 자신이 화면에 직접 등장해 시청자와 눈을 맞춰야 한다고 고집했다). 둘째, 평범한 일반인들을 시청 대상으로 삼았다. 셋째, 당대의 흐름과 해당 채널의 다른 프로그램에 맞춰서 픽션, 토크쇼, 현안을 뒤섞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시리즈를 구성한다. 이런 점들이, 영화관 상영과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영화’를 만든다고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모두 제외시킨다면, 작품은 축소되거나 훼손됐을 것이다. 

히치콕이 TV시리즈 제작을 시작할 당시 상황도 흥미롭다. 그의 등장은 영화와 TV산업의 경쟁을 촉발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1950년대 후반에는 TV의 ‘본질’에 대한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할리우드는 화려한 기술혁신(시네마스코프, 3D, 컬러필름, 스테레오 사운드)으로 우위를 지키려고 애쓰는 한편, TV용으로 제작한 영화프로그램의 공급자가 되기를 원했다. 영화프로듀서인 사무엘 골드윈은 제3의 시대를 맞이한 영화계가 TV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심각한 충돌을 면치 못할 거라고 선언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실제로 TV용 영화프로그램이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차츰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TV프로그램 제작산업의 중심도 뉴욕에서 할리우드로 옮겨갔다. 1959년, TV프로그램의 80%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됐다. 월트 디즈니, 데이비드 셀즈닉을 필두로 워너, 폭스, MGM 등이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영화인, 시나리오 작가, 영화배우도 활동영역을 바꿨다. 그런 이들로는 킹 비더, 윌리엄 웰먼, 벤 헥트, 로렌 바콜, 조셉 거튼 등이 있으며, 이후 존 포드, 제리 루이스 등도 그 뒤를 이었다. 

히치콕은 두 영역의 교차점에 있었다. 그는 이 일에 상당히 진지하게 임했다. 그는 프로듀서인 조안 해리슨 등 동료들과 함께 구체적인 기준을 세워 스토리를 선택하고, 극적 구조와 각색을 더했다. 이렇게 탄생한 단편영화들은 제작 속도 측면에서 영화와 전혀 달랐다. 스토리 전개도 달랐다. 대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삶에서 시작해, 예기치 못한 반전으로 끝났다. 직장 동료나 연인, 자녀와의 관계, 자동차 사고, 폭력, 강간, 살인 등 신문의 사회면에 등장할 법한 소재로 ‘동일시’의 최대치를 끌어냈다. 조안 해리슨은 1933년부터 히치콕과 함께 일했으며, 그를 따라 미국까지 건너갔다. 그녀는 특정한 주제를 다룰 때나 신작에 들어갈 때 ‘여성의 관점’을 제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치콕은 생방송을 맡아서 매번 자신이 직접 출현했다. 그는 TV영역에서 일하면서 TV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초창기에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해서 <로프>(1948)를 찍으면서 TV영화의 전형을 만들었다. 이후 이 모델을 버리고 프롤로그·에필로그와 내레이션을 도입함으로서 TV와 영화를 결합시키는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 이 덕분에 그는 TV, 광고 의존도, 미국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할 수 있었다. 히치콕은 나라를 뒤흔들고 사회학자, 정신의학자, 정치인을 들썩이게 만드는 주제들(아동폭력, 가정폭력, 부부폭력, 무기소지, 남녀 불평등, 노사관계, 교통사고, 알코올 중독 등)을 건드렸다. 단, 인종과 정치 문제는 제외했다. <코요테 달>(Coyote Moon)은 강간을 간략하게 다룬 에피소드인데, 히치콕은 에필로그에 사회자로 등장해서 시청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유혈이 낭자한 폭력이나 살인 장면이 없다고 불편하지 않았길 바랍니다. (...) 폭력 장면을 원하는 분이 있다면, 지역신문을 읽거나 당신의 가장 은밀한 생각을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로버트 올트먼이 감독한 <젊은이>(The Young One)는 청소년 범죄에 관한 에피소드다. 히치콕은 원래 대학 축구에 관한 주제를 다루려고 했으나 ‘너무 폭력적’이어서 포기했다고 에필로그에서 말했다. 그는 권총을 들고 “바보도 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한 청년이 아버지의 권총을 발견해서 가지고 놀다가 어머니를 죽일 뻔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히치콕은 방송에서 대중매체가 청소년 폭력성 증가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토론하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이자 사회학자, 정신의학자인 프레드릭 워댐과 논쟁도 벌였다. 이 때문에 상원의 한 소위원회는 공청회를 열어서 <알프레드 히치콕 시간>을 문제 삼은 적도 있다. 

히치콕과 광고주 간의 줄다리기는 이 계약관계에서 중요한 양상을 만들어냈다. 히치콕은 광고가 그의 작품을 방해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광고를 소개함으로써 광고주를 적으로 돌렸다. 이때 사용한 전략 중 하나가 ‘비꼬기’다. “왜 우리가 똑같은 광고를 반복해서 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한 번만 봐서는 절대 그 미묘한 생각과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정면으로 공격할 때도 있었다. “이제 광고시간입니다. 싫증나고, 반복적이고, 시끄럽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유치하고, 재미없고, 우스꽝스러운 시간이지요.” 심지어 죄수처럼 목과 양손에 칼을 채우고 나와서,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라며, 멀리 갈 때도 있었다. 광고 브랜드를 아예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광고주에게 스크립트와 해설을 보여주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광고주는 에피소드를 거부하거나 변경할 수 있었다. 히치콕은 시스템 내에서 묘안을 냈고, 한계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결국 하려던 것을 해냈다. 

 

 

글·프랑수아 알베라 François Albera
영화·미술사학자. 최근 저서로 『Léger et le cinéma 레제와 영화』(2021)가 있다.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Cf. Françoise Barbé-Petit, 『Hitchcock le cri métaphysique』, <Éditions de l’Amandier>, 파리 2013년; France-Culture에서 방영한 ‘Les Chemins de la philosophie’(2018년 2-3월)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히치콕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해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2) Cf. Jean-Loup Bourget, 『Sir Hitchcock, cinéaste anglais』, <Classiques Garnier>, 파리,  2021년 ; Gilles Delavaud, ‘La Télévision selon Hitchcock’,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2021년 (인용문 출처)
(3) <Elephant Films>에서 <Alfred Hitchcock presents>와 <The Alfred Hitchcock Hour>를 DVD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