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 이념 과잉의 ‘검증쇼’

2011-11-11     이항우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지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설명하는 데도 꽤 잘 들어맞는다. 이번 선거는 진보개혁 진영의 단일후보 박원순이 좀처럼 지기 어려운 선거였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며 중도 사퇴한 오세훈 전임 시장은 물론이거니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정권의 총체적 실정에 대한 심각한 민심 이반이 최근의 각종 선거에서 뚜렷이 표출되는 상황에서, 시민의 정권 심판 의지를 등에 업은 박원순 후보의 승리는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박 후보 쪽은 주도권을 한나라당의 보수 세력에게 넘겨준 채 힘든 선거를 치러야 했다. 투표 종료를 불과 서너 시간을 남겨놓고는 각종 매체에 비상 상황을 알리며 긴급 투표를 호소해야 할 정도로 박 후보 진영의 선거운동은 취약했고, 승리는 위태로웠다.

박원순은 왜 ‘힘겹게’ 이겼을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나경원 후보와 한국 보수가 자신들에 대한 광범위한 민심 이반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후보에 대한 대대적인 검증에 초점을 맞춰 선거를 자신의 구도대로 만드는 것에 비교적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 나경원도 오세훈도 이명박도 한나라당도 아닌, 마치 박원순인 것처럼 몰아가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였음이 분명하다. 한나라당은 13살짜리 박원순이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 작은할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양됐다는 억지를 부렸다. 대기업의 사회적 기업 활동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유도하고 조직한 박원순의 노력을 검은돈과 결탁한 것인 양 호도하거나, 아예 ‘협찬 인생’으로 비아냥거리는 자가당착도 개의치 않았다. 천안함 사건, 국가보안법, 심지어 ‘평양시장’ 발언 등으로 그들의 ‘전가의 보도’라 할 수 있는 ‘빨갱이론’을 들먹이는 전체주의자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처럼 정치 구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가는 데 능숙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극렬한 흑색선전을 일삼는 한국 보수와 한나라당의 정치 행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보수는 흔히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라고 자처하지만, 사실은 전체주의적 반공주의자에 가깝다. 그들은 대개 자유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양심·표현·집회의 자유 등과 같은 개인적 기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념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곧잘 드러낸다.

이런 한국 보수의 반(反)자유주의 성향은 권위주의 혹은 전체주의 정치 이론가 카를 슈미트의 정치사상과 친화성이 높다. 슈미트는 자유주의가 공통의 정치 정체성과 무관한 시민 관념을 주창하고, 정치를 사적 이해관계의 조정과 타협으로 한정한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은 동일한 인간이라는 추상적 동질성이 아니라 어떤 실질적 동질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실질적 동질성에 바탕을 둔 평등 관념은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슈미트는 동등한 것은 동등하게 다루고 동등하지 않은 것은 동등하지 않게 다루는 것이 모든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동질성이 필수적이고 이질성은 제거돼야 한다. 이런 자유주의 비판은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 관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은 민주주의적 평등이 항상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라는 정치적 계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은 동시에 전체주의적이다. “다른 모든 독재와 마찬가지로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반자유주의적이지만 반드시 반민주주의적인 것은 아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본 반면, 민주주의는 다원주의와는 양립 불가능한 모순관계에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란 시민의 동질성을 위협하는 이질성을 배제하는 토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본 슈미트에게, 공통의 실체를 공유하는 인민의 정치적 통일성과 그에 바탕을 둔 국가 정체성을 파괴할 수 있는 다원주의는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 슈미트에게 인민의 동질성과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는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인민은 다양한 욕구와 신념을 지닌 개인과 집단의 이질적 집합체가 아니라, 언제나 고정된 하나의 동질적 통일체다. 그리고 인민과 비인민의 구분은 다양한 정치적 실천과 투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이미 존재하는 인민·비인민 경계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이 친구와 적의 구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정치적 순진함과 무능력을 적절히 비판했지만, 동시에 그런 정치를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전체주의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유주의에 적대적인 ‘자유민주주의’

슈미트 정치사상의 전체주의적 성격은 그가 ‘우리-그들’의 대결을 정치적 ‘좌-우’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내-외’, ‘상-하’, ‘선-후’의 문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근대 민주주의에서 ‘좌-우’의 정치적 대립은 상대방을 절멸해야 할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려 애쓰는 동등하고도 정당한 존재로 인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조직된다. 따라서 ‘좌-우’의 대립은 ‘선-악’의 양자택일 투쟁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힘의 균형을 찾는 작업, 즉 개방적 헤게모니 실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슈미트에게 ‘우리-그들’의 대립은 이미 실체로서 존재하는 ‘인민-비인민’ 경계의 확인과 강화에 불과하다. 이런 대립은 폐쇄적이고 조정 불가능한 ‘내-외’, ‘상-하’, ‘선-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들에게 진보는 비정상적 타자

그러면 한국 보수의 사회정치 담론에서 권위주의 혹은 전체주의 논리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우선, 전체주의적 ‘내-외’ 논리는 국가적·민족적·인종적으로 동질적인 ‘내부’를 강조하고, 개인과 집단의 다양성을 내부의 동질성을 위협하는 이질적 ‘외부’로 간주하고 적대시한다. 한국 보수에게 이런 ‘내-외’ 논리는 반대세력에 대한 비판의 초점을 거의 언제나 특정 개인을 포함한 반대 집단 전체에 맞추고, 그들을 이른바 ‘주변부적 별종’이라고 낙인찍는 것으로 드러난다. 한국 보수에게 진보개혁 세력은 ‘세상의 작동 원리를 알 턱이 없는 운동권 3학년 수준의 미숙한 아마추어’이며, ‘정당 뒷골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해 뜰 날을 기다려온 게 세상살이의 전부’인 ‘특정한 직업이 없는 재야 활동가들’이며, ‘구멍가게라도 책임지고 꾸려본 적이 없는 미숙하고 주변적인 집단’이다. 이처럼 아마추어적이고 주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떼쓰고, 비명 지르고, 잘나가는 사람의 발목만 잡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비정상적 타자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권위주의적 ‘상-하’ 구분의 논리는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 혹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동일성 논리에 토대를 둔다. 여기에는 국가에 대한 인민의 충성과 복종이 강조되는 반면,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억압, 정치적 자유 등의 이슈는 논의될 여지가 별로 없다. 한국 보수의 권위주의적 ‘상-하’ 담론은 ‘일류 삼성론’, ‘낙수효과론’, ‘이율배반적 권력집단’, ‘포퓰리즘’ 담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오늘날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시돼 삼성의 무(無)노조주의, 기형적 지배구조, 편법 상속 등에 대한 어떤 비판도 별 소용이 없다. 오히려 1명의 천재가 10만 명의 대중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지경이다. 또한 한국의 보수는 ‘국가 전체의 파이를 키움으로써 민생의 전반적 향상을 꾀할 수 있다’는 낙수효과론을 더 밀고 나가,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의 피해자는 오히려 서민’이 되고, ‘부자를 위한 정책이 곧 서민을 위한 정책’이 된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고용 없는 성장, 양극화, 비정규직 노동이 증대됨에도 ‘기업을 도와주고 키워주면 서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와 소득이 돌아갔다’는 말로 기업 우위의 권력관계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을 시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 보수는 진보개혁 세력을 이율배반적 권력집단으로 표상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상-하’ 관념을 강화한다. 한국 보수에게 진보개혁 세력은, 자신을 마치 도덕성의 화신인 양 지배집단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지만, 실상은 도덕적으로 전혀 나을 것이 없는 이율배반적 존재에 불과하다. 진보개혁 세력이 한반도의 근본 문제가 미국에 대한 예속에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미국적 배경을 탐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허수아비 만들기’를 통해, 한국 보수는 사회적 강자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나아가 한국 보수는 ‘보통 사람들의 희망과 요구를 대변하려는 정치사상과 행위’ 혹은 ‘다원주의와 자유주의를 용인하지 않는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리더십’ 대신에, 그 어떤 유력 백과사전이나 정치학 논문에서도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대중영합주의’라는 말을 포퓰리즘의 참뜻으로 특허를 냈다. 그 ‘특허’로 정치·경제·복지·사회·문화·외교·국방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시민들의 정당한 민주주의 요구들에 침묵과 굴종의 빨간 딱지를 남발하고 있다.

‘상하’ ‘선후’의 논리로 배제하기

마지막으로, 전체주의적 ‘선-후’의 논리는 ‘우리’가 전통이나 소속감, 그리고 공통의 운명을 가진 계보의 한 부분이라는 동일성의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동일한 운명을 지닌 하나의 공동체이며, 미래를 위한 우리의 선택은 이미 과거에 의해 운명적으로 결정돼 있다. 이런 전체주의적 ‘선-후’ 논리는 한국 보수의 ‘선진화론’과 ‘색깔론’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선진화론’은 현대사를 1940~50년대의 건국 시대, 1960~70년대의 산업화 시대, 1980~90년대의 민주화 시대로 규정한다. 한국 보수는 ‘건국’과 ‘산업화’라는 명분으로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지만 2000년대를 김대중·노무현과 같은 ‘반선진화’ 세력에 의한 ‘분열과 갈등, 혼돈과 좌절의 시대’로 규정한다. 한국 보수에게 진보개혁 세력은 산업화와 민주화와 선진화라는 대한민국의 운명적 경로를 위협하는 ‘반선진화’ 세력이다. 나아가, 한국 보수는 자신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거의 습관적으로 ‘친북좌파’ 혹은 ‘대한민국 정체성 부정’으로 규정하는 이념 과잉의 반응을 보인다. 한국 보수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미 동맹,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 반공주의, 자유시장과 같은 요소로 구성된다. 반면 과거사, 독재와 인권탄압, 분단체제 해소,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 중소기업과 농촌에 대한 차별, 소득 양극화 등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친북좌파 활동과 곧잘 연결된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설정한 대한민국 정체성을 강요하고, 그에 대한 다양한 반론과 이견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 세력의 전체주의적 성향이 자리잡고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이 승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원리 확산과, 그에 따른 대중의 사회·경제적 삶의 곤궁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 의지, 20대를 비롯한 전 인구 집단의 보수화 등과 같은 요소들에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둔 지금, 신자유주의로 인한 대중의 삶의 곤궁화는 다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 의지 고양과 20~40대의 진보화를 촉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적 삶의 조건이 곧바로 대중 정치의식의 진보화·보수화를 초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꿸 줄 아는 지혜, 즉 집요하고 끊임없는 사회정치 담론 실천과 투쟁이 절실하다.


글. 이항우 (충북대 교수·사회학) 
정보사회학과 정치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Privacy, Publicity, and Self-Presentation in an Online Group’(Sociological Inquiry)와 ‘사이버폭력의 사회적 구성과 인터넷 실명제’(<경제와 사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