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는 마침내 노무현을 부른다

2011-11-11     이영주

인터넷 라디오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의 주인공은 네 명의 남성이다. 시골 장터나 술집 한구석에서 펼쳐지는 떠들썩한 정치 뒷담화로 이들은 ‘음성(音聲)의 광장’을 만든다. 사람들은 음성 광장 주변에 걸터앉아 정치 뒷담화가들이 쏟아내는 정치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분노하다 정치적 저항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이 음성 광장에서 전면적인 대항 정치의 주체들이 손을 맞잡는다. 이명박 정부의 집권 초기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 수입에 맞선 촛불의 정치가 4년을 흘러 <나꼼수>라는 팟캐스트의 정치로 부활했다.
 
네 명의 마초 전사가 연 음성 광장

누군가는 <나꼼수>가 진정한 한류 콘텐츠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나꼼수>가 제대로 된 정치의 근원지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나꼼수>가 젊은 세대의 정치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뉴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최고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가장 제대로 된 평가처럼 보이는 말도 있다. “이 시대 가장 핫한 오락, 나는 꼼수다.”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추든 지금 한국 정치 무대의 주인공은 <나꼼수>이자 네 명의 정치 뒷담화꾼이다. ‘입 터진 대로 막 씨부리면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가장 강력한 ‘똥침’을 날린다. 주류 언론들이 슬슬 피하거나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폭력적 통치와 비리, 수수께끼처럼 꼬여 있지만 이 정권이 지나가면 금방 드러날 것 같은 정치적 사건들과 온갖 꼼수 정치를 자신 있게 파헤치고 까발린다. BBK 주가 조작 의혹, 저축은행 비리 사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정치적 행보, 나경원 의원의 개인 비리 의혹, 고 장자연 사건, 서울 내곡동 대통령 사저 사건 등에 대해 주류 언론들이 권력 앞에서 주저하거나 오히려 권력의 선전부대가 되어 있을 때, 집요한 수사력을 갖춘 전사 4인방의 음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해대고 걸쭉한 욕설을 내뱉어가며 비장한 전투 의지로 가장 무서운 상대들을 실실 웃으며 무대로 끌어내고 다루는 방식은 매우 마초적이다.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확립하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그들의 떠들썩한 풍자와 웃음 속에 짙게 스며 있다. <OK목장의 결투> 같은 서부극의 팟캐스트 버전이랄까. 우리는 네 명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애써 기다리며 그들의 음성 신비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 지금 우리에게 그들은 ‘웃음’이고 ‘정치’이며, ‘수사반장’이고 ‘탐정’이다. 또 지금 우리에게 그들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쥐어터지고 한 맺힌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들의 정치적 분노와 저항을 조직하는 ‘무당’이다. 4년 이상 참고 견디며 이제 남은 1년 동안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생명줄을 끊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 화(火)와 한(恨)을 씻어주는 씻김굿판의 무당이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통치와 지배를 위해 자신과 다른 것과 대립하는 것의 출현과 표현을 진압하고, 이들 간의 소통을 억압해 자신들만 존재할 수 있게 하려 했다. 그들이 그토록 외치는 소통은 사실 ‘과잉 선전·선동’ 행위였고, ‘일방적인 명령·강제·요구·겁박’인 경우가 많았다. 언론과 미디어를 장악하고, 학자들을 동원하며, 검증되지 않는 가설로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학의 일방통행은 지속됐다. 이들은 자신이 불안해하고 증오하는 대상(어느 때는 좌파, 어느 때는 북한, 어느 때는 세계경제, 어느 때는 일본, 어느 때는 네티즌, 어느 때는 노동자 등)을 정확한 실체와 분석 없이 나열하고, 이데올로기적 수사의 일방통행로에 전시하며 공격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방통행로 옆에 길게 늘어서서 침묵과 냉소를 선택했다. 가끔씩 투표장에 갔고, 몇몇 여론조사에 응답했다.
 

정권에 대한 복수·응징의 ‘정서 구조’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정당성 확보와 동의의 사회적 과정에 취약했다. 폭력적 강압과 개발 전략을 내세웠고, 사람들의 강력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정치적 대립을 제어하고 상징적 조작에 몰두했다. 이들은 생활 세계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동원 측면에서 접근했고, 정치적 정당 간 자유로운 경쟁의 장이 아니라 생산자원과 매스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지배하면서 강권으로 사회를 결집하는 ‘괴물’이 되었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전근대적 관료사회 조직과 유사한 신가산국가(Neo-patrimonialism) 체제를 만들었고, 정치행정 체계가 개인적 충성이나 뇌물, 친족 중용주의에 토대해 사적 목적을 위해 공권력을 이용하는 식의 행태로 오염됐다. 이 상황에서 대중적 조직은 독립적 시민사회의 제도가 아니라 정권과 집권 여당의 요구가 전달되는 통로가 되었고, 대통령과 정치적 지도자들의 시혜가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대통령과 정치적 지도자들의 개인화된 정치와 통치가 부각되면서 정치적 ‘두목-부하’ 관계, 즉 정치적 클라이엔텔리즘(Clientelism)도 심화됐다. 누구의 사람인지가, 누가 뒤에서 보살펴주는지가 정치인의 능력과 생명력을 평가받는 잣대가 되었다. 비판은 무시와 궤변, 선전과 폭력으로 되갚아졌다.
사람들은 답답했고, 짜증났다. 분노했지만 맘놓고 대들 수도 없었다. 참기 혹은 포기하기. 그리고 사람들은 응징과 복수의 시간을 기다렸다. 이 묘한 상황에서 <나꼼수>는 출현했고, 사람들은 응답했으며, 이어 서울시장 선거가 치러졌다. 짜증나고 답답하고 보기 싫은 정권과 여당에 대한 응징과 복수의 정서 구조는 이미 존재했고, <나꼼수>는 명확히 이 정서 구조가 어떤 정치적 선택과 대항으로 옮겨가야 할지를 제시하고 조직화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치 영역 변화는 일관되고 잘 짜인 정치적 신념이나 의식,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 의해 일어나기보다, 순간적으로 형성·공유되는 정서 구조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정의를 둘러싼 토론과 관심이 커진 것도 최소한의 정의로움이나마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들의 집합적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정치는 사람들의 감각적 경험과 정서 구조와 공명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Marxism and Literature)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현재 순간의 생생한 문화적 경험을 포착하기 위해 ‘정서 구조’(Structures of Feeling)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즉 사회적 실천이나 제도 등과 같은 고정된 형식들로 환원되는 문화 분석이 아닌, 개인과 사회 간의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문화 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개념을 제안한 것이다. 윌리엄스는 이데올로기같이 더 고정돼 있거나 학문적인 개념에서 탈피하려 ‘정서’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 정서와 경험들이 완전히 무작위적이지 않고 내적으로 관련된 묶음(Set)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정서 구조는 역동적이며 항상 변화 속에 있다. 정서 구조는 진행 중인 사회적 경험의 하나로,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으로 간주되지만, 사실은 서로 연결돼 있고 집단화된 생각이나 느낌이다. 윌리엄스는 인간의 문화적 경험에 대한 관심을 ‘실제로 활발히 체험되고 느껴지는 의미와 가치’에 둘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정형화된 개념이 아닌, 덜 정형화되고 유동적이지만 사람들의 체험과 행위에 압력과 제약을 발휘하는 정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정서 구조는 ‘경험 구조’(Structure of Experience)라는 다른 대안적 표현으로 대치될 수 있다. 충동·억제·경향 등 특수한 정서적 요소는 생각과 대비되는 감정이 아니라 ‘느껴진 생각’(Thought as felt)이고 ‘생각된 느낌’(Feeling as thought)이다. 정서 구조는 살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서로 작용하는 연속적 흐름 속에 놓인 현재적인 것에 대한 실천적 의식이다. 윌리엄스는 “한 세대나 한 시대 속에서 정서와 느낌의 요소나 이들의 연관관계를 이해해보려는 방법적 시도로서 이 개념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노무현의 대리 복수전이 열릴까

<나꼼수>는 한 편의 영화이자 드라마이다. 답답하고 짜증나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지만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응징과 복수의 정서 구조와 공명한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 정권과 여당에 대한 앙갚음을 꿈꾸는 사람들의 집결지이자, 복수를 향한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인터랙티브 드라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헌정하는 방송 <나꼼수>의 제작자 김용민은 말한다. “무엇보다도 국민 속에서 뜨겁게 고양되고 있는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 이것이 방송의 밑천이요 종잣돈”이라고. <나꼼수>가 말하는 정치 개혁의 열망이란 ‘말도 안 되고, 해도 해도 너무하는’ 정권과 다수당의 교체를 말한다. 네 명의 마초전사들이 꿈꾸는 정치 개혁이기도 하다. 이들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대침몰을 소망한다. 이 대침몰은 필연적으로 노무현과 닿아 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최대 업적은 노무현을 끊임없이 부활시키면서 정치적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가산제와 정치적 두목-부하의 정치체계를 심화하고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권력을 오·남용하고 있을 때, 항상 거기엔 노무현을 위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정부의 민주적 개혁과 행정 시스템의 정착, 자의적 권력 작동의 최소화, 대통령 권위의 수평화, 소박함, 폭넓은 소통 시도 등 이 모든 것이 이명박 정권과 대비된다. 사람들은 그에 대한 증폭된 애정과 향수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에 대한 향수를 더욱 강렬하게 자극한 촉매제가 되었다.

<나꼼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가신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파헤친다. 명탐정 주진우의 수사 저널리즘이 빛을 발하고, 이 시대 최고의 정치 레토릭과 감각의 종결자 정봉주는 주저 없이 사건을 정리하고 브리핑한다. 김어준은 추임새를 넣고 통쾌한 욕설과 똥침 한 방을 날리며 상대방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김용민은 이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생기는 구멍을 훌륭하게 메우고 정리한다. 이 네 명의 활약은 응어리진 노무현 세대를 불러일으키며 노무현의 정치를 부활시키자고 제안한다. 정치를 오락처럼 즐길 수 있게 한 것도 이들의 업적이지만, 그것은 사실 노무현 세대의 (좀더 발전된) 부활을 요구하는 엄숙한 오락이다. 팟캐스트를 자신들의 정치적 공간으로 만들어내고 여기에 맞는 스타일과 말투, 구성력을 제대로 선보이면서 불구가 된 주류 미디어를 조롱해 주류 미디어에 의해 처참히 밟힌 노무현의 대리 복수를 수행한다. <나꼼수>의 복수와 응징은 계속될 것이고, 사람들은 여기에 응대할 것이다. 적어도 내년 총선과 대선은 ‘하나의 메타포’로서 <나꼼수>가 만드는 정치 구도 위에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의 부활과 노무현 세대의 궐기는 박원순과 안철수, 문재인이라는 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이동할 것이며, 이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노무현의 살아 있는 대리자인 이 세 사람의 정치에 혼란스러운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노무현과 이명박의 1라운드 경기는 2011년 <나꼼수>의 열풍과 함께 이명박과 부활한 노무현 간의 2라운드 경기로 이어진다.


덧붙이기

1. 그럼 진보정치는? 2라운드 경기에 노회찬·심상정·조승수는 노무현 세대와 결합하려 하고, 홍세화는 경기장 자체를 바꾸려고 한다.
2.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책은 <Rethinking Critical- Theory: Emancipation in the Age of Global Social- Movement>(Ray, L. J.·Sage Publications·런던·1993)와 <문학과 문화이론>(Marxism and Literature·레이먼드 윌리엄스 지음·박만준 옮김·2003)이다.


글. 이영주
지역공공성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