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AS 군사비밀조직, 백색 테러의 삶과 죽음
‘프랑스령 알제리’를 위한 결사대
에비앙 협정이 체결되고 알제리 독립이 승인된 지 60년이 지난 현재, ‘군사비밀조직(OAS)’이 저지른 테러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하지만 극우 단체 ‘군사비밀조직’이 저지른 폭력 행위로 알제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본토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고, 주요 시설이 파괴됐다.
1961년초 마드리드에서 학생지도자였던 피에르 라가야르드와 장자크 수시니 등 ‘프랑스령 알제리’를 신봉하는, 즉 알제리가 프랑스의 영토라고 확신했던 소수의 열성분자들이 ‘군사비밀조직(OAS, Secret Army Organization)’을 결성했다. 우익 단체 ‘군사비밀조직’은 무차별 테러 행위와 표적 암살을 감행하고, 알제리가 독립하기 전에 최고조에 이르렀던 ‘초토화 정책’을 사용하는 등 역사 흐름을 바꾸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탈식민화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군사비밀조직’은 알제리 독립 정책을 반대하며 전방위로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1962년 5월 2일에는 알제 항구에서 폭발 사고가 나서 100여 명이 사망했고, 이어 6월 7일에는 알제 대학 도서관이 화재로 불탔다(장서 60만 권 가운데 40만 권이 소실되거나 손상됐고, 도서관 건물은 복구 공사를 거쳐 1968년이 되어서야 다시 문을 열었다).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군사비밀조직’의 활동 때문에 사망한 사람은 1,600명에서 2,400명에 달했는데, 대다수가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희생자 중에는 교사이자 작가였던 물루 페라운도 있었다. 페라운은 알제 고지대의 벤 아크눈에서 동료들과 함께 1962년 3월 15일에 처형되었다. 처형 전날 페라운은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도시는) 온통 공포에 휩싸여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움직인다. 생계를 꾸리고 볼일을 봐야 해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길거리에서 죽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외출한다.”(1) ‘군사비밀조직’의 표적이 됐던 사회주의자 윌리엄 레비는 1961년 11월 20일 알제의 바브엘우에드 거리에서 암살당했고, 공산주의자 뤼시앵 리에트는 오랑에서 1962년 2월 12일 살해됐다.
독립파인 ‘알제리민족해방전선’과의 대결
당연히 식민지인 알제리는 최우선 활동지였지만, ‘군사비밀조직’은 대척점에 있던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인 알제리의 군사적인 반식민 조직-역주)을 따라 1961년 6월부터 프랑스 본토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은 이미 3년 전에 프랑스 본토에서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같이 단순한 사실이 ‘군사비밀조직’과 알제리민족해방전선 양측 관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두 단체는 상반된 대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내세우는 정당성은 양립할 수 없었지만, 막상 그들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프랑스령 알제리’를 신봉하던 한 열성분자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 소속 무장조직인 민족해방군(ALN) 독립전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하는 그런 존경심이다.(...) 배고픈 늑대 같은 그들은 나와 같은 종족이었으며 내 형제와 다름없었다.”(2)
프랑스 본토에서 ‘군사비밀조직’은 71명을 사살하고 39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3) 공산주의자 알프레드 로퀴솔은 1962년 1월 4일 알랑송에서 습격을 당한 뒤 다음날인 5일에 사망했다. 델핀 르나르는 2월 7일에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의 파리 아파트를 노린 테러 공격에 휘말려 눈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3월 9일에는 이시레물리노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평화운동(Mouvement de la paix)’ 총회장 앞에 주차돼 있던 자동차가 폭발하면서 3명이 사망하고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로제 프레 내무부 장관은 TV 연설을 통해 “히틀러 정권이나 인정할 만한 방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며 비난했다.
그 당시 좌파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서로 대립 중이었지만, 테러나 반사회적인 공격 행위에 대한 흉흉한 소문 때문에 극심한 공포 상황이 촉발되자, ‘군사비밀조직’에 대항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파시즘에 대항하는 일이 그들 모두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그런 상황에서 1962년 1월 프랑스 공산당 잡지 <라 누벨 크리티크(La Nouvelle Critique)>는 “민주주의자들의 목표는 파시스트들이 또다시 폭력 행사를 꾀하는 것을 막고, 내전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일이어야 한다”며 드골 장군의 세력에 압박을 가하고 알제리에 평화가 오기를 응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진실(La Vérité des travailleurs)’이라는 국제공산당기관에 소속된 트로츠키 지지자(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일국(一國) 사회주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영구혁명론을 내걸었다-역주)들은 노동자 단체들이 모여 연합전선을 결성해서 알제리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사비밀조직과의 투쟁에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는 파시스트 조직에 강경하게 대항하기로 결정한 알제리민족해방전선과 힘을 합쳐야 한다.”
공포를 몰고온 ‘군사비밀조직’의 테러 공격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좌파 동원이라는 주제처럼 ‘군사비밀조직’의 테러 공격 때문에 공포가 야기됐다는 사실은 더 이상 현대 토론에서 꼭 있어야 하는 이야깃거리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시 살펴본다면, ‘알제리 독립 이후의 프랑스’ 상황에서 극우파들이 촉발시킨 논쟁을 계기로 제국주의적인 향수를 놓고 충돌하는 프랑스인들의 열정이 본질적으로 어디에서 나왔는지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
“알제리는 곧 프랑스이기 때문에 파리에서 투쟁해야 한다!”(5) 이 원칙에서 출발한 피에르 세르장 대위는 본토 ‘군사비밀조직’을 설립하기 위해 1961년 6월 1일에 마르세유로 떠났다. 하지만 정확한 계획은 세우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대의에 새로운 추진력을 부여하는 것이 세르장의 목적이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샤를 드골은 1961년 4월 11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알제리 독립에 대한 원칙을 재확인했고, 그로부터 10일 뒤인 4월 21일에 모리르 샬, 앙드레 젤레, 에드몽 주오, 라올 살랑 등 알제리 독립에 반대한 일부 장군들이 ‘장군들의 군사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후 주오 장군과 살랑 장군은 지하 활동으로 전환해서 1961년 5월에 알제에서 재건된 ‘군사비밀조직’을 이끌게 됐다.
세르장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아스페 드 라 프랑스(Aspects de la France)>(평론가 샤를 모라스가 창간한 정치 평론지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에서 발간한 주간지-역주)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국가 재건 운동에 열성적인 두 지도자, 피에르 주엘과 루이올리비에 루를 만났고 이들로부터 보급 지원을 받았다. 세르장은 이브 고다르 대령이 작성한 조직도를 모델로 삼아서 본토 ‘군사비밀조직’을 ‘군중 조직(OM)’과 ‘심리학 행동 및 선전(APP)’, ‘정보 운영 조직(ORO)’ 등 세 지부로 나눴다. 1961년 여름이 되자 APP 수장으로 롤랑 로덴바크를 임명했다. 로덴바크는 출판사 <라 타블르 롱드(la Table Ronde)> 대표였고, ‘출판 투쟁’에 참여하고 있었으며,(6) 드골 반대주의자이자 알제리 분리독립 반대주의자였다.
1960년 10월에 프랑스 식민지 전쟁 징집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알제리 전쟁에 불복종할 권리에 대한 선언문’(‘121인 선언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음)을 발표하자, 그에 대항해서 또 다른 100여 명의 지식인들이 ‘단념하기를 저항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선언문’(7)에 발표했는데, ‘군사비밀조직’ 지지자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1960년 12월에 창간된 잡지 <레스프리 퓌블리크(L’Esprit Public)>의 공동편집인이었던 라울 지라르데를 중심으로 장 브뤼노와 롤랑 로덴바크, 쥘스 모네로 등이 있었다.
다니엘 고도 중위의 합류로 더 큰 힘을 얻게 된 본토 ‘군사비밀조직’은 전 하원의원 마르셀 부이에와 같은 남서부 지역의 푸자드주의자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본토 내부 세력을 확장할 방법을 모색했다. ‘푸자드주의’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피에르 푸자드가 이끌었던 상공인 및 수공업자 보호 운동을 말하는데, 장마리 르펜은 바로 푸자드 휘하에서 1956년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됐으며 이후 국민전선을 창당했다. 프랑스 남부의 에로(Hérault) 주에서 본토 ‘군사비밀조직’은 대학생과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군사비밀조직’ 가담자들은 우선적으로 남성이었으며, 전투원들 가운데는 일반 병사(47%)가 많았다. 민간인들 중에는 중간관리자나 사무원들(35%)이 많았고, 이들은 훗날 기소됐다.(8)
내부 인사정책의 마찰, 지방조직 관리 난맥…
‘군사비밀조직’은 ‘프랑스령 알제리’에 동조하는 모든 지방조직을 통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내부적으로 인사정책에서도 마찰을 겪었다. 특히 라울 살랑 장군은 정치인을 여러 명 영입하면서 세르장의 업무를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었다.(9) 영입된 정치인 가운데 파리 이공과대학 출신인 앙드레 르가르가 있었는데, 르가르는 1961년 11월 16일에 ‘뱅센 위원회(Comité de Vincennes)’ 집회를 개최했고, ‘뮈튀알리테’실에서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랑 장군의 이름을 외쳤다. 또 다른 정치 인사로는 ‘외눈 안경’이라 불리던 앙드레 카날이 있었다. 그는 철강 회사 부사장으로 일했으며 1961년에 본토로 발령받았고, 극우파 운동 ‘젊은 국가(Jeune nation)’ 잔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10)
피에르 세르장과 앙드레 카날은 활동의 방법론을 두고 의견이 나뉘었다. 세르장은 표적을 정해서 행동하는 쪽을 더 선호했고, 카날은 1962년 1월 17일 파리에서 18개의 플라스틱 폭탄이 터졌던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테러가 일어나는 ‘야간 작전’ 방식을 선호했다. 평화를 향한 염원에서 시작했지만 실제 전략도 없고, 프랑스 사회에 관련된 확실한 지식도 없었던 ‘군사비밀조직’의 지도부들은 1961년 12월 19일에 파리에서 있었던 반파시스트 시위나 1962년 2월 8일에 있었던 시위에서 내세웠던 자신들의 대의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듯이 여전히 총파업을 포함해서 폭력적이거나 급진적인 수단을 사용하려고 했다. 참고로 1961년 시위는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했고, 2만 명이 모였던 1962년 시위에서는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샤론 지하철역에서 총 9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들은 공산당원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노동총동맹(CGT) 가입자였다.(11)
실패로 끝난 드골 장군 암살계획
에비앙 협정으로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임시정부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다음 날, 장마리 퀴뤼트셰 대위는 3월 20일자 지침에서 ‘전반적인 불안정’을 옹호하면서 “국가 권력을 대표하는 모든 이를 공격하라”고까지 강요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불리했다. 정보부가 ‘군사비밀조직’을 쫓고 있었으며, 알제리에서는 드골에 찬동하는 지하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비밀경찰’까지 정보부와 힘을 합치고 있었다. 결국 ‘군사비밀조직’의 지도부 에드몽 주오와 로제 드겔드르, 라울 살랑이 각각 3월 25일과 4월 7일, 4월 20일에 체포됐고, ‘군사비밀조직’은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봄이 되자 본토 ‘군사비밀조직’의 수장이었던 앙투안 아르구 대령을 비롯해서 아직 체포되지 않은 몇몇 간부들이 모여 전국 레지스탕스평의회(CNR)를 결성했지만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이들은 샤를 드골 장군 암살계획을 세웠지만, 당국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8월 22일에 일어난 프티클라마르 암살미수사건(프티클라마르에서 벌어진 드골 장군 암살 시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 역주)은 ‘군사비밀조직’과 간접적인 관계밖에 없었다.) ‘피에 누아(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역주)’들도 불안정한 상황을 우려해 집단으로 알제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역사 속에 묻힌 극우 세력의 폭력들
극우파 세력들은 역사학자 도미니크 베네르가 그랬던 것처럼,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했다. 베네르는 1962년에 『긍정적인 비평을 위하여』라는 소책자에서 프랑스령 알제리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결집시키지 못한 ‘군사비밀조직’의 무능력을 인정했으며, 그 방법도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관리인들의 창문 아래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지만 프랑스령 알제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알제리라는 짐’을 덜고 싶은 유혹이 커졌다. 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1960년대 초에 극우파 세력이 내놓은 다양한 출판물을 읽어보면 알제리 문제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변호사 장루이 티시에비냥쿠르가 1965년 프랑스 대선에서 보여줬던 성과(그는 5.2%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다)를 통해서도, 사람들이 결집해서 ‘군사비밀조직’ 가담자들의 사면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68년 5월 혁명이 끝나고 실시된 총선에서 우파가 압승을 한 후인 7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몇 가지 법안이 채택됐다. 그 가운데는 앙투안 아르구와 라울 살랑을 석방하는 법안과 피에르 세르장과 조르주 비도 등 추방된 이들의 귀환을 허용하는 법안도 있었다. 과거 ‘군사비밀조직’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1981년에 알제리전쟁 초기에 내무부 장관을 거쳐 사법부 장관을 지낸 사회당 후보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눈길을 돌렸다. 라울 살랑도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겠다며 미테랑에게 투표하라고 촉구했다. 1965년에 티시에비냥쿠르는 피에르 세르장처럼 2차 투표에서 드골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촉구한 바 있었다.
1982년 가을, 새로 취임한 미테랑 대통령은 사면을 받은 몇몇 사람들(그들 가운데에는 과거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들도 있었음)의 복권을 추진하면서 여당에 ‘알제리전쟁으로 야기된 결과를 삭제’하라는 법안을 강요했다.(12)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은 테러 주모자들에 대한 한없는 관용을 생각하면, 극우 세력의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역사 속 페이지가 왜 프랑스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글·네지브 시디 무사 Nedjib Sidi Moussa
정치학 박사, 『Algérie, une autre histoire de l'indépendance. Trajectoires révolutionnaires des partisans de Messali Hadj 알제리 독립의 또 다른 역사. 메살리 하지(알제리 민족운동의 아버지-역주) 지지자들의 혁명 궤도』(PUF, 파리, 2019)의 저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Mouloud Feraoun, 『Journal. 1955-1962 일기(1955~1962)』, éditions du Seuil, Paris, 1962
(2) Alex Nicol, 『La bataille de l’O.A.S. 군사비밀조직의 전투』, Les Sept couleurs, Paris, 1962.
(3) Arnaud Déroulède, 『L’OAS. Etude d’une organisation clandestine OAS라는 비밀 조직에 대한 연구』, éditions Jean Curutchet, Hélette, 1997.
(4) Cf. Todd Shepard, 『1962. Comment l’indépendance algérienne a transformé la France 1962년 알제리의 독립은 프랑스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Payot, Paris, 2008.
(5) Olivier Dard, 『Voyage au cœur de l’OAS 군사비밀조직 중심부로의 여행』, Perrin, Paris, 2011.
(6) Cf. Guillaume Gros, ‘Roland Laudenbach et La Table ronde, Jacques Perret et Aspects de la France 롤랑 로덴바크와 <라 타블르 롱드>, 자크 페레와 <아스페 드 라 프랑스>’, 『Maurrassisme et littérature 모라시즘과 문학』, Volume IV, Presses universitaires du Septentrion, Villeneuve d’Ascq, 2012.
(7) Jean-Pierre Rioux et Jean-François Sirinelli (under the dir.), 『La guerre d’Algérie des intellectuels français 프랑스 지성인들의 알제리전쟁』, éditions Complexe, Bruxelles, 1991.
(8) Anne-Marie Duranton-Crabol, 『Le temps de l’OAS 군사비밀조직의 시대』, éditions Complexe, Bruxelles, 1995.
(9) Cf. Rémi Kauffer, ‘OAS : la guerre franco-française d’Algérie 군사비밀조직: 프랑스와 프라스인들만을 위한 알제리전쟁 », in Mohammed Harbi et Benjamin Stora (under the dir), 『La guerre d’Algérie 알제리전쟁』, Robert Laffont, Paris, 2004.
(10) Cf. Jean-Paul Gautier, 『Les extrêmes droites en France de 1945 à nos jours 1945년부터 현재까지의 프랑스 극우파세력』, Syllepse, Paris, 2017.
(11) Cf. Alain Dewerpe, 『Charonne 8 février 1962. Anthropologie historique d’un massacre d’État 1962년 2월 8일 샤론. 국가 학살의 역사 인류학』, Gallimard, Paris, 2006.
(12) Cf. Stéphane Gacon, ‘Les amnisties de la guerre d’Algérie (1962-1982) 알제리전쟁의 사면(1962~1982)’, <Histoire de la justice 정의의 역사>, n° 16, La Documentation française, Paris,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