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난제, 창의성을 잃어버린 발전
브라질에서 칠레까지, 2차대전 후 빛바랜 진보주의자들의 유토피아
인접 국가들과 통계수치를 비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계산방식도, 이론적 전제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일한 유엔 산하기구에 소속된 중남미 국가들 자료에서는 비교 가능한 수치를 사용한다. 1948년부터 유엔 중남미·카리브 경제위원회(CEPAL)는 무수한 변화들 속에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권고안을 작성했다.
칠레에 자리잡은 대부분의 국제기구들처럼 유엔 중남미・카리브 경제위원회(CEPAL)는 산티아고의 부유한 비타쿠라 구역의 중심인 다그 함마르셸드 가에 위치한다. CEPAL의 특이한 건축양식은 다른 건물들과 구별된다. 도로 끝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은 이 건물은 거대한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성벽처럼 보인다. 그 위로, 웅장한 나선형 구조물이 불쑥 솟아있다. 520명의 CEPAL 위원들이 ‘달팽이’라 부르는 이 구조물에는 위원회의 대회의실이 있다.
“저는 관료주의적 건축물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 정책이 위원회의 중심이 돼야 하고, 따라서 대회의실은 행정 위에 위치하는 구조입니다.”(1) 이 건물을 건축한 현대 건축가 에밀 두하르트가 설명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이기도 하다. 둔중한 건물의 중심에는 12개의 위원회 분과 사무실들이 뒤섞인 거대한 안뜰이 있고, 구름다리가 다양한 지역의 식물들로 구성된 정원들 위에 설치됐다. 1960년, CEPAL의 2대 사무총장인 라울 프레비쉬(재임 1950~1963)는 위원회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반영하는 건축 설계도를 승인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경제학자이자 외교관이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밝혔듯, CEPAL은 ‘중남미 경제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설립됐다. 일차적으로 지역경제를 보다 신뢰할 만하고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통계 자료들을 수집, 통합해 1948년부터 <중남미 경제연구>를 출간했다. 동시에 제안 및 권고사항들도 발표했다. 특히 이 점에서 프레비쉬는 중남미가 ‘중남미 현실에는 부적합한’ ‘북미에서 들여온’ 경제이론의 답습에 그치면 안 된다는 신념을 분명히 밝혔다. CEPAL은 중남미를 위한 ‘현지 발전모델’을 고려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 프레비쉬가 기피하는 ‘무의미한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때로는 진보적인 발상들을 산출해낸 역동적인 아이디어센터로 진화할 수 있었다.(2)
아무도 프레비쉬가 이런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프레비쉬는 토지소유자들을 위해 로비활동을 했고, 독재정권 하의 ‘치욕의 10년’(1930~1943) 동안 행정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전기작가 에드거 도스먼은, 프레비쉬를 “깨어있는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하며, “아르헨티나에서 구 과두제의 상징이었다”라고 저술했다.(3)
“국제무역의 진정한 화폐는 권력”
역설적이게도 프레비쉬는 행정 경험, 특히 1929년 대공황 위기관리를 통해 신고전주의 주장에서 멀어졌다. 경제위기는 중남미 국가들을 급격하게 덮쳤다. 중남미에서 수출된 원자재 가격은 공산품 가격보다 훨씬 더 하락했고, 이는 중남미 경제의 수입 역량을 절반으로 축소시켰다. 아르헨티나에서 프레비쉬가 시행한 전통적 경기부양 조치들은 효과가 없었다. 프레비쉬는 1963년 출간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경제발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국제경제에서 자유롭게 작용하는 시장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러나 국제 대공황을 겪으며, 나는 내가 배웠던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4)
1933년, 세계경제 활성화를 계획하기 위해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회담은 개발도상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세계경제 문제에 대한 앵글로색슨 식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국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다루지도 않았다.”(5) 아르헨티나 대표로 참석했던 프레비쉬는 한탄했다.
아르헨티나의 주된 무역 상대국인 영국은 보호무역 조치를 늘렸고, 식민지에만 몰두했다. 영국이 아르헨티나 육류 수입을 계속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프레비쉬는 상호협정 조약인 로카-런시먼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프레비쉬는 소고기 수출 가격을 세계 다른 공급자들보다 낮출 것을 수락했다. 모욕감 속에서 프레비쉬는 “국제무역의 진정한 화폐는 권력”이라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6)
프레비쉬-싱거 가설과 주요 문제들
후안 도밍고 페론 육군대령이 가담한 장교 집단이 라몬 카스티요의 독재정권을 타도했을 때, 아르헨티나 행정부에서 경제학자로서 일해 왔던 프레비쉬는 1943년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프레비쉬는 1935년 자신이 창설한 중앙은행의 행장직에서 해임됐다. 그는 자신을 모욕한 페론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페론을 몰아낸 1955년 쿠데타를 지지했을 정도였다. 프레비쉬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저작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신생 중앙은행들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49년, CEPAL 초기에 프레비쉬는 ‘중남미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위원회의 1차 보고서 작성을 제안받았다. 그는 이 제안을 자신의 몇몇 견해들을 밝히는 기회로 삼았다. 이때 작성한 이론은 그에게 명성을 선사했다. 동일한 시기에 유사한 견해들을 정립한 독일 경제학자 한스 싱거의 이름을 따서 이 가설은 ‘프레비쉬-싱거 가설’로 불린다.
이 가설에 따르면, 국제무역은 ‘주변부’인 원자재 생산 및 농산물 생산에 특화된 국가들과 공산품을 판매하는 ‘중심부’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형성된다. 프레비쉬는 과거의 경험에 의거해 장기적 관점으로 보면, 원자재 가격은 공산품 가격보다 상대적으로 하락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교역관계의 악화’가 일어나면, 주변부 국가들은 수입품 양을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양을 수출해야 하고, 이는 결국 경제발전을 저해한다.(7) 프레비쉬는 하바나에서 이 보고서를 발표하며, 중남미 국가 대표들에게 ‘주변부’에서 벗어나려면 중심부 국가들로부터의 수입을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기 위한 국가 주도 산업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1929년 대공황 및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무역이 중단되면서 중남미 몇몇 국가들에서 이미 시작된 활동이었다.
도스먼에 따르면, 회의 참가자들이 ‘열광하면서’ 회의장을 떠났다고 한다. 도스먼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레비쉬가 오래된 비교우위론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원자재 생산자로 남은 중남미 농업 국가들이 미래에 번창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은 반박당했다.” 도스먼은 저개발국가들과 선진국들의 생산구조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프레비쉬는 국제 경제발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개시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구조주의’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보고서의 영향력은 경제적 측면을 넘어섰다. 그것은 중남미에서 지역감정을 지지했다. 프레비쉬를 통해 경제는 정치와 만났다. “중남미 경제학자들은 그를 통해 중남미가 지리학적 영역 이상을 의미하며, 중남미 국가들은 동일한 문제들을 공유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과거 그의 협력자들 중 한 명이자 1972~1985년 CEPAL의 사무총장이었던 엔리케 이글레시아스가 말했다. 심지어 브라질 경제학자이자 구조주의 이론의 중심인물인 셀소 푸르타도는 “프레비쉬는 중남미의 발명자”라고 단언했다.
오늘날 ‘CEPAL 선언’이라고 여겨지는 보고서의 성공으로, 프레비쉬는 1950년 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 지명됐고, 원래 임무를 넘어서는 역할을 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프레비쉬는 CEPAL을 ‘경제발전의 현지적 접근을 탐색하는 아이디어 자치센터’로 만들기 위해 보고서가 촉발한 지역민들의 열망을 담고자 했다.(8) 캠브리지 대학의 케인스처럼 대부분 중남미 출신이며 다양한 이념을 가진 경제학자 그룹이 그의 곁에 있었다. 가장 저명한 이들만 언급하자면 셀소 푸르타도, 아니발 핀토, 오스발도 선켈, 알렉스 간즈 등이 있다.
“우리는 우리 중남미인들이 어떤 이론에도 속박되지 않고, 우리 자신의 기준에서 우리의 문제에 접근하기를 원했다.” 1963년 프레비쉬가 이렇게 말했다.(9) 이런 중남미인들의 이념적 자율성은, 미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여러 차례에 걸쳐 CEPAL에 미주기구(The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와 통합하고 워싱턴으로 소재지를 옮길 것을 제안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 CEPAL의 구조주의 이론은 중남미 지역의 다양한 개발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1956년, 브라질 대통령 주셀리노 쿠비체크(임기 1956~1961)는 ‘5년 안에 50년’이라 명명한 야심찬 생산회복 계획에 뛰어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55년까지 후안 도밍고 페론이 엄격한 국가 통제 하에 내수시장과 산업화를 확장하기 위한 경제 국가주의 정책을 추진했다.(10) 이런 국가 행정을 지원하려면 유능한 관리자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CEPAL은 1960년대 초 관리자 양성을 위한 ‘사회 경제계획 중남미 연구소(ILPES)’를 창설했다. 프레비쉬의 예측대로, 산업 발전을 통해 중남미는 역동적으로 성장했다. 중남미의 6개 경제 강대국(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우르과이)에서 산업을 통한 경제 성장 규모는 1945~1972년 농산물 수출 성장 규모의 2배에 달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의 산업화 전략은 정체됐다. 당시 CEPAL의 경제발전 분과 위원장이었던 셀소 푸르타도는 “이제 순조로운 발전 국면은 도처에서 고갈됐다”라고 인정했다. 경제발전 분과는 ‘적색 분과’로 불렸다.(11) 국가주도 산업은 국제시장에 진출하기에는 경쟁력이 부족했고, 대부분 산업화 지속에 필요한 자본금(기계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수입품은 무역적자와 함께 증가했다. 공공지출 부채는 급증했고, 인플레이션 압력은 강화됐다.
정치적 대혼란으로 중지된 점진적 진보화
산업화는 새로운 사회적 긴장을 야기했다. 신흥 산업들은 도시로 대거 이주해온 노동자들을 흡수할 만큼 일자리를 산출하지 못했고, 이는 실업률 증가, 불완전 고용, 도시 빈곤,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다. 중남미의 일부 국가들에서 신 무산계급이 항거하기 시작했다. 1952년 볼리비아에서 노동자들은 군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1959년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독재정권을 몰아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등에 의한 거대 권력으로 중남미가 착취당한다고 고발했다.
CEPAL은 비판적 자기성찰을 해야 했다. 구조주의 이론이 중남미 현실에는 부적합한 것인가? 1963년 프레비쉬가 사무총장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출간한 보고서인 ‘중남미 발전의 역동성을 향해서’에서 그는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구조주의 이론이 아직 충분히 시행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생산구조를 강조하면서, 주변부 국가 상황의 또 다른 문제를 방치했다. 그 문제란, 바로 중남미 내에 존재하는 ‘심각하게 불평등한 사회구조’다.
프레비쉬에 따르면, 이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대중이 국내 생산된 신제품을 소비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지배계층이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기보다 북미의 소비풍조를 모방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중상류층이 사회적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과거 아르헨티나 독재자들 편에 섰던 경제학자 프레비쉬는 이제 단호하게 주장한다. “사회구조의 변화 없이, 경제발전 촉진은 없다.”(12)
위원회는 ‘완전한 토지 개혁’의 옹호자가 됐다. 농부들에게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면서 시골에 머물 것을 권유했으며, ‘산업이라는 모험에 대응하기 위한, 지배 계급의 본질적인 문화의 변화’를 추구했다. 즉, ‘금리소득을 통한 경제적 지배계층’에서 ‘신 기업가 계층’으로의 이행을 장려했다.(13) 1970년에서 2000년 사이에 CEPAL에서 근무한 경제학자 아르만도 디 필리포의 증언이다.
그러나 CEPAL에서 일하는 소수의 학자들은 이를 순진한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그들 중 사회학자 엔조 팔레토와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1995~2003년 브라질 대통령 역임)는 위원회에서 구조주의 이론과 방향을 함께하는 ‘의존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에 따르면 “산업화는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의존관계를 끊지 못했다.”고 CEPAL의 역사학자 리카르도 빌쇼스키가 설명했다.(14)
그들의 저서 『중남미의 발전과 의존』(1969)에서 팔레토와 카르도주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외국 및 다국적기업의 자본 증가는 생산 분야에서 외부 이권이 뿌리내리게 만든다.” “지배 체제는 외부 이권을 촉진하려는 지역 집단과 계층의 사회적 접근을 통해, ‘내부’ 권력으로 다시 나타난다.”(15) 이런 상황으로 인해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에서 경제를 근대화했던 민족주의 및 산업주의 부르주아가 중남미에서 나타나기는 어렵다. ‘의존주의자들’은 구조주의가 너무 개혁적이라고 여긴다.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대학 교수이자 CEPAL 전문가인 페르난도 레이바는 “그들은 구조주의를 반자본주의 혁명이거나 저개발상태로 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CEPAL의 점진적인 진보화는 중남미의 정치적 대혼란으로 중단됐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총사령관은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남미에서 군사 독재정권의 귀환을 알렸다. 피노체트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은 CEPAL의 지적 자유를 잠식했다. 쿠데타 발생 몇 개월 후, 군부가 CEPAL의 한 젊은 위원을 체포했고, 그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1976년, 또 다른 위원이 군부에 의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상당수의 CEPAL 위원들은 망명을 선택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한 일은, 인권단체들에 연락을 취하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1972~1985년 CEPAL 사무총장이었던 엔리케 이글레시아스가 말했다. 국제회의 개최는 현격하게 줄었다. 빌쇼스키에 따르면 “1973~1989년 CEPAL은 더 이상 중남미 지식인들을 불러들이지 못했다. 중남미 지식인들의 존재는 그때까지 CPEAL의 주요 성공요인들 중 하나였다.”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칠레 독재정권은 중남미 권력자들에게 조언하던 CEPAL위원들이 아니라 ‘시카고보이’들에게 경제분야 관리를 맡겼다. 이들은 시카고 대학교에서 수학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다. 칠레는 장차 신자유주의라 명명될 현상들의 실험장이 됐다. 폴 볼커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되자 인플레이션 퇴치를 당면과제로 삼아 미국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이는 남미 국가들의 부채 폭등을 유발했다.
특히 중남미 국가들은 오랫동안 재정문제로 큰 고통을 겪었다. 시카고보이들은 CEPAL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빌쇼스키의 분석에 따르면, “무책임한 국가와 보호주의 산업화 정책을 구실로 부채문제는 모두 국가의 책임으로 비난받았다.” 1989년 ‘워싱턴 합의’로 신자유주의는 완수됐다.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시카고보이들은 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조치 여부에 따라 IMF와 세계은행 대출을 결정했다. 국가재정난과 대출난에 허덕이던 중남미 국가들은 언젠가는 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민주주의가 다시금 중남미에 귀환했을 때, 10여 년간 잠들어 있던 CEPAL의 지성은 변화된 세상에서 깨어났다. 다국적 기업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공기업은 민영화됐고, 경제는 자본화됐고, 불평등은 급증했다. CEPAL은 힘을 되찾기 위해 관념을 쇄신했다. 1990년, 경제학자들인 거트 로젠탈(1988년~1998년 사무총장 역임)과 페르난도 파인질베르 책임하에 작성된 문서인 『공정한 생산으로의 변화』는 신구조주의라는 CEPAL의 새로운 지적 역사의 장을 열었다.(16) 제목에서 보듯, 사회의 ‘변화’는 자취를 감췄다. ‘평등’은 지난 세대의 요구가 됐고, 시장법칙과 양립 가능한 ‘공정성’을 앞세웠다. 동아시아의 산업적 시도에 고취된 이 사상은 1950년대 산업화 시도의 ‘과도한 보호주의’를 비판하고 ‘신 산업화’를 주장한다. 이는 국제무역에 더욱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생산에 더욱 온건한 개입주의를 표방하며, 기술집약적 수출 분야를 격상시킬 것이다.
CEPAL의 역사적 인물인 오스발도 선켈은 “신자유주의 흐름이 시장, 가격체계, 민간주도, 재정규율, 생산부문의 외부지향 등의 중요성을 소환했다”라고 기술했다. “많은 이들이 CEPAL을 사고전환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했습니다. 국가관리주의적이고 부정적인 과거의 유물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1998~2003년 CEPAL 사무총장으로 재임했던 호세 안토니오 오캄포가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신구조주의는 보다 발전적이고 현대적이며 국제화된 경제를 추구한다.”
그러나, CEPAL의 모든 위원들이 이런 사상적 변화를 반기지는 않았다. CEPAL의 경제학자인 가브리엘 포르실은 “우파로 선회하는 듯한 이 문서는 CEPAL 내부에서 비판받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문서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 많은 개념들을 답습했습니다.” 사실상, ‘중심부-주변부’, ‘내부로 향한 발전’, ‘의존’, ‘사회구조’ 등의 용어들을 버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열린 지역주의’, ‘민주적 동의’, ‘노동유연성’ 등의 용어를 취했다. 레이바는 “영향력을 찾기 위해, CEPAL은 악마와 손을 잡았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악마가 요구한 것은, 경제학에서 권력관계에 대한 모든 분석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조주의적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CEPAL 위원들의 사상은 퇴화했고, 이런 현상은 신구조주의자들의 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칠레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협력체(1990-2010)’와 브라질 노동당(PT, 2003~2016)의 ‘사회-민주당 행정부에 대한 통합 평가서’에서 나타난다. “계층 권력의 완강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칠레와 브라질의 신구조주의 담론은 ‘종속’이라는 유사한 길을 택했습니다.” 레이바가 한탄했다.(17)
일례로 칠레에서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 재임 시 교육부 장관이자 모든 이들을 위한 교육을 공개적으로 추구했던 인물, 신구조주의 학자 세르히오 비타르는 민영화에 앞장선 인물들 중 한 명이다. 그는 2005년 수천 명의 학생들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만들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는 경제주권을 대선공약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 역시, 신자유주의의 종속이론을 거쳐 카르도주 전임 대통령의 거시경제학적 개혁에 굴복하고 말았다.(18) 자기 꼬리를 물어 자신의 독에 감염된 독사처럼, 신구조주의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포기해버렸다.
2008년 금융위기와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1999년), 볼리비아(에보 모랄레스, 2006년), 에콰도르(라파엘 코레아, 2007년)의 사회주의 및 반제국주의 정권 도래는 중남미에서 신자유주의 논쟁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평등’을 좀 더 소리 높여 주장한 것을 제외하면, 멕시코 출신인 알리시아 바르세나 사무총장 취임(2007년) 이후 CEPAL은 과거의 창의적인 활동들을 이어가기 위해 이런 호의적인 상황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알리시아 바르세나 사무총장은 우리의 거듭된 인터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오늘날, 환경위기 및 코로나 사태는 경제발전의 의미에 대한 재정의가 얼마나 시급한지 보여준다. 2020년 출판된 주요 보고서인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평등과 지속가능성 속에서의 변화의 재개』에서 CEPAL은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신 발전모델”의 추구를 촉구했다.(19) CEPAL은 구조주의적 유토피아를 다시 주장할 수 있을까?
현재 CEPAL에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은, CEPAL 건물의 건축양식 뿐이다.
글·바티스트 알베르톤 Baptiste Albertone
경제학 박사과정
안도미니크 코레아 Anne-Dominique Correa
기자
번역·권정아
번역위원
(1) Verónica Esparza Saavedra, 『Edificio de las Naciones Unidas para Santiago de Chile de Emilio Duhart』, Universidad del Desarrollo, Chili, 2013.
(2) Raúl Prebisch, 『Hacia una dinámica del desarrollo latinoamericano』, Fondo de Cultura Económico, México, 1963. [à vérifier]
(3),(6),(8) Edgar Dosman, 『The Life and Times of Raul Prebisch』, 1901~1981,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Montreal and London, 2008.
(4),(5) Raúl Prebisch, 『 Hacia una dinámica del desarrollo latinoamericano』, Cepal, Santiago (Chili), 1963.
(7) Raúl Prebisch, 『El desarrollo económico de la América Latina y algunos de sus principales problemas 』, Cepal, Santiago (Chili), 1949.
(9) Raúl Prebisch, 『Hacia una dinámica del desarrollo latinoamericano』, Cepal, Santiago (Chili), 1963.
(10) Renaud Lambert, ‘Qui arrêtera le pendule argentin ? 아르헨티나, ‘페론 유령’ 벗어날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9년 1월호.
(11) Albert. O Hirschmann, ‘The Political Economy of Import-Substituting Industrialization in Latin America’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제 82권 1호, Cambridge (Massachusets), 1968.
(12) Raúl Prebisch, 『 Hacia una dinámica del desarrollo latinoamericano』, Cepal, Santiago (Chili), 1963.
(13) Armando Di Filippo, ‘La Alianza para el Progreso y el desarrollismo en Chile’, <Revista de historia>, Santiago (Chili), 2020.
(14) Ricardo Bielschowsky,『Evolución de las ideas de la Cepal』, Cepal, 1998, 이 저자의 모든 인용문은 이 책에서 인용됨.
(15) Enzo Faletto, Fernando Henrique Cardoso,『Dependencia y desarrollo en América Latina』, Cepal, Santiago (Chili), 1969.
(16)『Transformación productiva con equidad: La tarea prioritaria del desarrollo de América Latina y el Caribe en los años noventa』, Cepal, Santiago (Chili), 1990.
(17) Fernando Ignacio Leiva,『Latin American Neostructuralism』,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eapolis, 2008.
(18) Renaud Lambert, ‘Brésil, ce géant entravé 국제금융의 덫에 빠진 브라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9년 6월호, 한국어판 2009년 7월호.
(19) 『Building a New Future: Transformative Recovery with Equality and Sustainability』, Cepal, Santiago (Chili),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