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좌파가 공포에 임하는 자세

2011-11-11     이승원

공포영화는 항상 두 단계 시놉시스에 기반한다. 전반부는 원인 모를 기이한 현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 ‘도대체’라는 말과 자지러지는 비명뿐이다. 공포의 원인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공포를 자아내는 ‘그것’의 정체가 드러나기 직전이다. 무지에서 발생한 궁금증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의 정체가 드러나면 영화는 다음 단계로 들어간다. 이제 ‘그것’에 대응하고 처리하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후반부의 두려움은 무지로 인한 두려움이 아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찰나에 죽음의 사신이 어느 쪽을 피하는지에 달린 아슬아슬한 사투 뒤 공포영화의 막은 내린다.

지금 한국의 좌파는 공포영화를 보고 있다. 이 영화의 공포는 웬만한 공포영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제한된 러닝타임도 없고, 언제 후반부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두렵다 못해 진이 빠진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짧은 쾌거조차 또 다른 공포를 위한 밑밥이었다. 2008년 갈라진 민주노동당의 의석은 반으로 줄고, 진보신당은 원내 진출마저 실패한다. 진보신당은 한발 더 나아가 지난 9월 신자유주의 세력과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또 다른 분당 사태 속에 존폐 위기의 사투를 벌인다. 이제 한국 좌파의 패배와 고립은 ‘인민의 보편적 해방’을 주창하기 무색할 만큼 악화일로를 걷는다.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의 이탈은 차라리 애교다. 노동운동에 대해 일언반구 없던 지식인이 진보의 대안이 되었고, 기업모금식 사회운동의 대부는 어느날 서울시장이 되었다. 이제 좌파 자신만의 의제도 없는 듯하다. ‘도대체’라는 탄식의 러닝타임은 끝날 기미가 없다. 그럼에도, 진보신당은 좌파가 처한 공포의 순간을 탈출하려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한국 좌파

그 모색의 길에서 진보신당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장석준은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펴냄·2011)을 통해 한국 좌파 정당이 공포에 임하는 자세를 마련한다. 그는 20세기 전세계에 전개된 구조개혁의 좌파운동을 역동적으로 서술하면서 공포의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 영화 후반부로 나아가려 한다.

그가 밝혀낸 공포의 ‘그것’은 의외로 좌파 외부의 적이 아니라, 좌파 자신이다. 알고 보니 자신들이 귀신이었던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와 유사하다. 좌파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1947년 스위스 몽펠르랭에 모인 하이에크와 그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 케인스식 체제에 대한 전투를 선포했지만, 그건 오로지 좌파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그들의 진단과 처방은 정확했다. 공포의 원인은 좌파, 그 처방은 국가를 넘어 지구 질서를 재편하고 생활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1968년을 기점으로 솟아오른 전후 정치경제 체제의 문제가 1970년대 세계경제 위기로 심해졌을 때,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때론 금융자본의 거대한 초국적 동맹으로 세를 과시하고, 때로는 직접 테러로 좌파의 벽을 허물었다. 이후 전투는 결국 신자유주의 지구화로 종결됐다.

진단 측면에서 장석준은 신자유주의자들과 동일했다. 공포의 ‘그것’은 바로 좌파 자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첫 작업은 ‘좌파’를 정의해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에게 좌파란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현 사회의 변화 추구 △기득권자가 아닌 배제된 자들의 권리 인정이라는 출발선 △사회문제에 대한 개인·집단이 아닌 사회관계 및 구조적 접근 △모든 인민의 보편적 해방을 위한 사회변화. 중요한 건 어느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하면 유사 좌파만이 아니라, 나치즘·파시즘 같은 포악한 변종까지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좌파란 누구인가’라는 자기 고백에서부터 공포에 의연하게 임하기 시작한다.

공포의 ‘그것’은 좌파 자신이었다

이제 저자는 공포의 그것, 즉 ‘좌파’ 자신에 대응하기 위해 과거 유럽과 남미에서 진행된 임상실험 결과들을 분석한다. 1920~30년대 대공황 이후 ‘좌파 정치의 1차 구조적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케인스식 해법으로 다행히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세계경제 위기와 함께 찾아온 ‘좌파 정치의 2차 구조적 위기’는 유럽과 남미에서 진행된 ‘탈자본주의 구조개혁’ 실험의 실패 속에 여전히 위기로 남아 있다. 그 위기의 원인은 분명했다. 바로 자신들의 정치적 고향인 ‘생활 세계’를 떠나 ‘국민국가’에 과잉 집중한 좌파 자신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좌파의 유죄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문제는 좌파가 ‘국가’에 주력하면서 생활 세계와 이를 규정하는 자본주의적 ‘지구 질서’의 영향을 간과한 것이다. 인민의 노동과 휴식의 생활 세계는 좌파를 출산·양육한 고향이자 진지이다. 반면 지구 질서는 생활 세계를 생산과 소비 공간으로 구성하면서 자기 질서를 진화시킨다. 둘 사이에서 국가는 상호대립적 생활 세계와 지구 질서를 임의적으로 연결하는 ‘전달 벨트’다. 그런데 국가 중심을 강조할수록 생활 세계의 자기 통제권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런 국가를 강조할수록 생활 세계는 더욱 지구 질서에 무능한 수동적 공간이 되고 만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은행(World Bank), 자유무역협정(FTA) 등이 제시하는 국제 규범을 지구적 표준으로 국가가 받아들이는 순간, 좌파의 정치적 선택은 축소되고 생활 세계는 지구 질서의 한구석으로 사라진다. 생활 세계를 파괴하는 세계 질서에 ‘조응’하는 좌파는 더 이상 좌파가 아니다. 반면 자신의 진지인 생활 세계를 떠난 채 세계 질서에 ‘대응’하지 못하는 좌파 또한 더 이상 좌파로 살아남을 수도, 국가권력을 잡을 수도 없다. 장석준은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의 ‘인민 연합 강령’, 영국 노동당 정부의 ‘대안 경제 전략’, 프랑스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의 ‘공동 정부 강령’의 탁월함에도, 좌파가 생활 세계에서 진지전에 실패하고 지구 질서에 대한 조응과 대응 사이에서 방황하다 좌초된 좌파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그는 생활 세계에서 강력해진 노동조합력으로 지구 질서에 맞서 끝내 복지국가 골격을 유지한 스웨덴 사례를 하나의 희망으로 소개한다.

생활 세계 벗어나 국가 주변 배회

한국의 좌파는 여전히 공포 속에 있다. 장석준은 그 공포의 실체가 생활 세계라는 자신의 육체를 잃은 채 ‘국가’ 주변에서 떠도는 좌파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선거 시기만 되면, 좌파는 합종연횡으로 방황하고, 생활 세계 속 수많은 정치들은 유실된다. 어제 걷던 길과 오늘 걷는 길의 방향이 다르고, 내일 어느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르는 사이, 좌파는 생활 세계로부터 육체 이탈 뒤 스스로 목을 조르는 공포 그 자체가 된다. 그사이 지난 10년간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탄생시킨 정치세력은 재집권을 위해 ‘좌파’와 손잡으려 하고, ‘그’ 좌파는 자신의 손을 건네주고 있다. 여기서 좌파가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찾아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생활 세계 정치의 재가동과 국가를 넘어선 탈자본주의적 연대로 정리한다. ‘민중의 집’과 지역 노동조합의 결합은 전자의 좋은 실험일 것이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한 동북아 의제는 한국 좌파가 도전해야 할 후자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아직 다루지 못한 기이한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쓰러져가는 인민들이 좌파에서 등을 돌릴 뿐 아니라,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품에 익숙해져 떠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이제 장석준과 좌파는 자신들이 처한 공포를 넘어 인민을 가두는 욕망에 임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글. 이승원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에 재직 중이며, 민주주의와 ‘쉼’에 대한 글쓰기와 고민을 함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