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물결칠 때, 우리는?
지난 주에 한 친구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내용인즉, 대형상점의 정육 판매대에서 일하는 이 친구가 새 업무시간을 할당받았는데, 관리자가 일방적으로 일과 중간에 3시간의 공백을 끼워 넣는 바람에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물으며, 부당한 일이 있으면 노동조합에 도움을 청해보라고 조언했다.
“우린 노조가 없어.”
“종업원이 250명이나 되는 대형상점에 노조가 없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파악할 수도 있었지만, 그 친구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친구가 내게 원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 자기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의 분노에 내가 귀 기울여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들어줬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친구의 태도가 영 미덥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상황의 원인을 알아볼 생각조차 없다는 점이 몹시 거슬렸다. 친구가 당한 일이 얼토당토않은 일로 비칠수록 부당함이 커지고,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클수록 만족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불의를 향한 분노는 만족감을 준다. 왜일까? 그렇게 하면 스스로 정의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불행 때문에 대의명분을 세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분노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한 편에 서는 기쁨을 감추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 나는 그에게 마트에 노조가 없는 이유를 한번 알아보라고 권했다. 물론, 그가 그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로부터 이런 답장이 왔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력이 없어.”
“분노 때문에 생각할 힘이 없어”
분노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서 상황을 따져볼 여력조차 없다는 말이다. 친구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고통을 토로하고 분노를 쏟아내는 데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 비통함을 생생한 표현으로 전했다.
“유감스럽게도, 분노가 마음을 가득 채웠거든.”
분노가 생각을 마비시킨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생각을 가로막는다. 생각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 싶은 것이다. 대신 부당함과 불쾌감을 알리고 싶어 한다. 아무리 도의를 내세워도 도의가 생각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분노는 생각을 마비시키고 책임을 전가한다. 책임을 지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나쁜 인간이 필요하며, 부당한 처사는 최대한 부당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가 최대한 나쁜 인간이 된다. 친구에게 그 나쁜 인간은 그의 상사들이었다.
분노는 도의적인 감정이며 정치성을 띠지 않는다. 분노에 휩싸이면 문제를 정치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해결 방안도 고민하지 않는다. 친구는 분노에 휩싸이는 바람에 감정이 정치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으로 옮기는 법이기에 감정 없이는 정치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편 감정은 냉철한 분석이라는 거름망을 거쳐야 정치화된다.
분노가 있어야 정치적 언쟁이 생겨나지만, 분노를 정치 에너지로 바꾸려면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감정이 식은 후에야 비로소, 분노의 화살은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향한다. 친구는 불의, 직장에서의 굴욕, 권력 남용, 형편없는 업무시간 같은 우발적인 상황에 빗대 직장의 사회 구조를 설명했다.
정치에서 나쁜 놈이란 별다른 의미가 없다. 나쁜 놈들은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다. 어디에나 해악, 악의, 악인은 있을 수 있다. 불순한 기쁨과 불온한 존재가 있다. 개구리가 강을 건너도록 부추기고는 뒤에서 독침으로 개구리를 찔러 물에 빠져 죽게 만드는 우화 속 전갈과도 같은 인간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현상을 탐구하는 수많은 소설이 있으며, 8세 소녀를 살해한 노르달 를랑데 같은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사유에는 악이 깃들 자리가 없다. 친구는 잠시 정치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금세 생각을 멈췄다. 망각의 힘을 빌려 생각을 털어버렸다.
적을 상정해야 정치가 가능하다는 논리는 전쟁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자유주의 마초들에게나 해당할 일이다. 좌파 카를 슈미트란 있을 수 없다.(1) 우리에겐 적이 없고 계급의 적수만 있다. 적이란 섬멸하고 싶을 만큼 사적 원한이 사무치는 존재다. 반면 적수는 원한의 대상이 아니다. 나를 그만 곤란하게 만들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대다.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상대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지 상대라는 존재가 아니다.
분노를 식히면, ‘적’은 ‘적수’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 섬멸시키고 싶은 마음은 정치적 에너지가 되고, 분노가 생각으로 바뀐다. 생각은 큰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현상의 규칙성을 따지는 생각은 상황에 따른 일종의 기질에 가깝다. 생각은 놀랄 일이 없다. 규칙성이란 수없이 반복되기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흔히 ‘정상’이라는 불리는 사회적 강요를 사례로 들곤 한다. 이런 강요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듣기에는 무척 거슬리는 말이다. 그들은 우선 이렇게 묻는다. “정말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지극히 정상이죠.”
그러면 상대는 이렇게 대꾸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정상이 아니라고 봐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는다.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에서 휴가를 냈는데 거절당하면, 그건 정상이고요?”
그러면 상대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그건 정상이 아니죠.”
‘먼발치’에서 주시할 권리
이런 촌극은 도덕적인 판단과, ‘정상’에 대한 통계적 판단의 불일치를 따라 이어진다. 도덕적 기준으로는 사람들이 길에서 잠을 자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수백 년 된 시장경제의 야비한 관습에 따르면 정상적인 일이다. 통계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주주들이 종업원들을 착취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행위를 비정상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술회하는 것이지만, 그 사실이 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냉정함이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계산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나의 냉정함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다. FC 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벌 축구 경기를 볼 때를 제외하면, 내가 크게 소리 지르거나 흥분할 일은 거의 없다. 49년을 살면서 냉정을 잃고 화를 낸 일은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게다가 그중 네 번은 모두 FC 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축구 경기 심판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사회학이라면 이런 민감성은 일정 부분 사회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볼 것이다. 내가 큰 소리를 잘 내지 않는 이유는 웬만해서는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음성이 온화했기도 했지만, 집안에서 소리를 높일 일도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만큼이나 나의 인생도 온화했다. 영광의 30년(프랑스의 경제적 호황기) 시절에 비약적으로 증가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2월은 스키장에서, 7월은 해변에서 방학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도 순탄한 삶을 산다. 불의에 분노하기보다는 불의를 분석해내는 까닭은 내가 그런 불의를 겪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TGV 승객들 앞에서 구걸하는 대신, 그 구걸하는 사람으로부터 “젠장, 고맙구려”라는 말을 듣는 승객 중 한 명이다. 나는 전화상담실에서 단기계약직으로 일하지 않는다. 우리 집 부엌에는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고, 직장에는 도움을 요청할 노동조합이 있다. 나는 장시간 추위나 배고픔에 시달려본 적이 없다. 끝이 안 보일 만큼 깊은 곤경에 빠져본 적도 없다. 곤경이 찾아와도 항상 탈출구가 있었고, 몸을 뉠 매트리스와 부모님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가난했던 적이 없고, 경찰봉에 맞아본 적도, 수위에게 쫓겨난 적도, 관리자로부터 압박을 받은 적도, 세탁소 뒷방에서 탈수 상태에 빠진 적도, 인근 공장에서 흘러나온 유독 가스를 마신 적도, 경비를 서면서 모욕을 당하거나, 거들먹거리는 고객을 만난 적도 없다.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먼발치에서 주시할 뿐이다. 관찰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적당한 분노와 적절한 분석의 결합
아이러니는 내 비평의 기본 방식이다. 그 안에서는 조소라는 모순어법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내게 주어진 거리를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등의 분화구에서 먼발치에 있어서 냉철한 분석을 하고 직권 남용의 부당행위에 대해 빈정거릴 수 있다.
내 친구는 아침 6시 15분에 버스를 타고 대형상점 르클레르 주차장 앞에 내려서 교대 시간을 기다리며 음울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나는 그곳에 없다. 얼빠진 관리자의 얼굴이 내 코앞에 어른거리지는 않기에, 내 친구처럼 햄 써는 기계 안에 그 얼굴을 넣어서 썰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딱히 솟구치지 않는다.
거슬리는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안락함 속에 있으면 사람들의 분노가 과장된 것처럼 보인다. “오귀스틴, 그나저나 사람들이 왜 이렇게 고함을 치는 거죠?” “배가 고파서 그럽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이렇게 고함을 칠 일인가요?” 온통 부드러운 펠트를 두른 부르주아의 일상에 들려오는 고함은 소음에 불과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특정 음량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부르주아는 침착하다. 나도 침착하고, 공손하고, 합리적이다. 그 어떤 불합리한 일도 겪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가 공손한 분노라면, 나는 부르주아로서 나보다 더 시급히 정치를 필요로 하는 비(非)부르주아 계층보다 분노에 더 잘 대처한다.
이것은 논리적 난제다.
노동운동 지도자 중에는 부르주아 출신이 많다. 이런 사실을 비웃는 독선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그 안에 담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논리는 문화 자본이다. 문화 자본을 축적할 시간이 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구조의 문제로 고통받는 동안 구조적인 문제를 ‘먼발치에서’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부르주아들은 시간을 쏟아서 자기가 속한 계급이 감추려 하는 계급 사이의 거리를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냉담함으로 사회적 폭력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부르주아가 출생의 아이러니로 그 현상을 분석하는 입장이 됐다.
분석은 나의 기술이며, 정치 투쟁에 내가 이바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글은 아무도 투쟁에 끌어들이지 않지만, 이것이 투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나는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위기를 정치적으로 고민할 수 있다. 하지만 절박함만이 정치에 숨을 불어넣는다. 절박함만이 바리케이드를 세울 수 있다. 절박함이 없는 정치는 없고, 절박함에만 뿌리를 둔 정치는 지속 가능지 않다. 이점은 여전히 논리적 난제다.
우리는 때로는 열정적이고, 때로는 냉철해야 한다. 적당한 분노와 적절한 분석을 결합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와 지식인 프티 부르주아지 간의 동맹이 정치적 가치를 증명해낸 것은, 이 둘의 결합이 사회에 미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글·프랑수아 베고도 Francois Bégaudeau
작가. 이 글은 그의 최근 저서 『Notre Joie』(Paris, Editions Pauvert, 2021년 9월)에서 발췌한 것이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나치주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1930년대 독일의 법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