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환상 속에서

장 구이싱의 『멧돼지들의 횡단』

2022-03-02     베르나르 다게르 l 문화평론가

중국에서 태어나 대만에 정착한 작가 장 구이싱이 쓴 이 소설은, 세계 이곳저곳에 흩어져 사는 중국 화교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화려하고 번뜩이며 충격적인 이 소설 속 시간의 흐름도 독특하다. 지그재그로 흘러가는 시간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1952년 주인공 관아훙의 비극적 운명과 함께 시작된 이야기는, 1941년 일본의 말레이시아 침공으로 거슬러 올라간 후 1945년까지 이어진다. 이어서 20년 전의 에피소드 한 편이 등장한다. 멧돼지 수천 마리의 대규모 공격이다. 멧돼지들의 대규모 공격은 보르네오 섬 북쪽의 해안가 마을에 사는 훈련된 주민들이 며칠간 격렬한 싸움을 벌인 끝에 중단됐다.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크로코프’ 마을은 멧돼지 마을로도 불린다. 초다디가 이끄는 사냥꾼들이 보여주는 합리주의는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볼 수 있는 ‘합리주의’와 비슷하다.  

그리고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온갖 방식으로 학살한다. 목숨을 건진 주민들은 신비한 다야크족의 도움을 받아 늙은 사냥꾼 초다디를 따라 밀림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살아간다. 작가는 여기서 멧돼지와 싸우던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장면들을 엮어내기도 한다. 늙은 사냥꾼 초다디는 배신자가 생길까 걱정한다. 배신자가 생긴다면, 그건 누구일까?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사냥, 교미, 육아 등 일상을 지속하는 동물들의 담담한 시선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경작지가 돼가는 정글, 공간을 가득 채운 초가가 불에 타는 모습 등이 판화처럼 명확하게 그려진다. 소설 속의 이 환상적인 공간에서는 조명을 받는 등장인물이 바뀐다. 이동수단으로는 자전거가 종종 등장한다. 무기는 매우 현대적인 것에서부터 일본도, 고대 말레이 왕궁의 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랑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관아훙이 에밀리에게 품는 감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녀의 팔과 손목에는 수십 개의 검은 등나무 팔찌가 둘러져 있었다. 그녀가 팔을 휘두르자 마치 건조한 노란 풀밭에 숨어 있는 호랑이의 꼬리에 그려진 검은 줄무늬처럼 보였다.’ 관아훙의 눈에 세상은 꿈처럼 보인다. 아편을 너무 많이 피워서일까? 저녁에는 마을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사람들의 머리가 보이고, 머리 없는 수탉과 군인들의 유령이 길을 헤매기도 한다. 그리고 반바지 차림의 소년들이 쓰는 일본의 요괴 가면들, 과일 향기, 셸 오일 컴퍼니 트럭이 내는 굉음, 이주자, 농부, 노동자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글·베르나르 다게르 Bernard Daguerre
문화평론가

번역·이주영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