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대(對) 메테르니히 한 판 승부

기만·술수의 메테르니히 '개인적 원한'을 국익 포장, 나폴레옹 축출 앞장

2008-12-30     김승웅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회장

 

나폴레옹은 결국 노련한 외교관 메테르니히한테 희생이 되고 만다.
 빼앗아 간 땅 일리리아를 돌려주지 않을 경우 러시아와 프러시아에 합세, 프랑스에 선전포고 하겠다는 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의 협박에 나폴레옹이 결국 굴복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불패의 전쟁 영웅이라 하지만 한꺼번에 오스트리아-러시아-프러시아 세 나라를 상대로 1대 3의 싸움을 벌이기엔 벅찬 노릇이었다. 더구나 한 해 전(1812년) 러시아로부터 참담한 회군을 한데다, 영국의 명장 웰링턴공(公)마저 대(對) 프랑스 전선에 뛰어들 기미를 보이는 판국인지라 최악의 경우 1대 4의 전쟁까지 각오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점령지 반환 위한 4국 회담 열기로
 내던진 군모를 다시 집어 쓰며 나폴레옹이 메테르니히를 달래기 시작했다. 일리리아를 다시 오스트리아한테 돌려주겠다며 생색까지 곁들였다. "당초 그 땅은 러시아 침공 당시 오스트리아가 병력을 파병해 준 보상으로 진작 돌려 줄 생각이었다네..."
 나폴레옹은 그러나 폴란드만은 러시아한테 돌려 줄 수 없노라고 말했다.
 굳이 달라면 폴란드 일부는 넘길 수 있어도 폴란드 전 국토를 돌려 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메테르니히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폴란드 전역도 러시아한테 돌려 줄 것을 재차 고집했다. 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나폴레옹으로서도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메테르니히라는) 일개 오스트리아 외상 주제에 "제까짓 게 러시아나 프러시아를 과연 대변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 오스트리아 황제는 나(나폴레옹)의 장인일진대, 네까짓 외상(外相) 놈 하나를 상대로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잖은가"라고 계산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따라서 이 문제를 전담할 4개국 회담을 열 것을 제안했고, 메테르니히도 여기에 동의하게 됐다. 마르코리니 궁(宮)을 떠나는 메테르니히의 뒤통수를 향해 나폴레옹이 내뱉듯 외쳤다.
 "이봐, 외상! 평화를 향해 문은 항상 열려 있단 말이야!"
 나폴레옹은 그러나 여기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메테르니히를 과소 평가한 것이다. 나폴레옹을 만나러 마르코리니 궁에 도착하기 앞서 이 빈틈없는 외교관은 이미 러시아의 알렉산더 황제와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윌리엄 대왕(大王)을 미리 만나, 대(對) 나폴레옹 교섭전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군(主君)인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황제로부터야 말 할 것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메테르니히 의도적으로 전쟁 유도
 메테르니히가 나폴레옹과 작별하고 돌아간 바로 그 다음 날,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프러시아와 조약을 체결, 발표한다. 라이헨바흐(Reichenbach) 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나폴레옹이 마르코리니 궁(宮)에서 메테르니히한테 언급한 약속을 (1813년) 7월 10일까지 지키지 않을 경우 (나중 8월 10일로 연기됨)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프러시아와 함께 곧바로 프랑스한테 선전포고한다는 명문이 들어 있었다.
 조약이 공표되자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외교관 꼴랭꾸르(Caulaincourt)를 회담 장소에 교섭특사로 파견, 3개국 대표들을 상대로 조약 수정을 위한 각개 격파 작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메테르니히의 차단 계략에 말려 들어 3개국 대표 누구 한 사람 만나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마는 외교적 실패를 겪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8월 13일 프랑스를 향해 선전포고했다. 이 점은 마르코리니 궁에서 나폴레옹과 만날 당시 메테르니히가 진작에 흉중에 숨겨놨던 계획대로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요구를 나폴레옹이 결국 거부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한 걸음 나아가 나폴레옹과의 합의점 도출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결국 전쟁으로 휘몰아가자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와 프러시아 군주를 상대로 러시아 침공의 실패로 나폴레옹의 종말이 임박했고, 대불(對佛) 3국 동맹의 체결이 불가피함을 수차례에 걸쳐 역설했다. 또 모든것이 전쟁광(狂) 나폴레옹의 '야심'에서 비롯됐다고 유럽 여러 왕조를 상대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술은 또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 신민(臣民)들을 염두에 둔 전술이었다는  점에서 기록될만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당사자인 왕의 신분으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이런 비(非)왕족 출신 나폴레옹의 망동(妄動) 하나로 결국 프랑스 신민만 20년 넘게 전란과 재앙의 질곡에 빠져 허우적대 왔음을 역설한 것이다.
 
 3국 연합군, 프랑스 공격 개시
 프랑스는 당시 혁명 발발 24년이 된 시점을 맞고 있었지만,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와 그 신민들 모두에게 수 백 년 지속돼 온 '절대왕조'체제는 아직껏 선험적인 명분과 타당성을 지닌 체제로 인정받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메테르니히 전술은 프랑스 신민과 나폴레옹 사이를 이간시키겠다는, 요즘 시쳇말로 하면 고도의 여론 심리전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이다. 이 심리전과 관련, 당시 프랑스 신민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메테르니히가 노린, 소위 나폴레옹과 프랑스 신민 사이의 '이간질'은 과연 실존했는가. 이 대목과 관련해서 나폴레옹의 전기 작가 뱅상 크로냉(Vincent Cronin)이 그 당시의 문헌과 훗날 여러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기술한 내용은 여기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메테르니히가 물고 늘어졌듯 나폴레옹과 프랑스 신민들 사이의 간격(間隔)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813년 당시 프랑스 신민들이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프랑스 신민들이 평화를 원했던 건 나폴레옹이 혹시라도 전쟁을 치르다 전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그 역시 평화를 원했다. 나폴레옹이 1813년 6월 18일 참모 캉바체레한테 써 보낸 서한에는 '나는 정말이지 평화를 원해. 나는 결코  전쟁만 일삼는 군인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이 평화는 경건한 합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고 영속적이 돼야 한다 이 말이야.  무엇보다도 내 유럽하의 평화가 돼야 한단 말일세' 라고 적고 있다. 나폴레옹이 진정 원했던 평화란 야심이나 전쟁을 통한 평화가 아닌, 영예의 평화였다. 이 영예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를 두는 항목이었다.영예란 그에게 있어 날이 퍼렇게 선 칼을 뜻했다. 영예를 향한 그의 사랑은, 바로 그 날 선 칼날에 대한 입맞춤 같은 것이었다"
 그해 8월 12일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로,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3군은 당시 나폴레옹이 주둔하고 있던 독일 드레스덴 지역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감행, 유럽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회군한지 1년 만에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보헤미아에 주둔중인 슈바르젠베르크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군 23만, 실레시아에 머물던 블뤼허 장군 휘하의 프러시아-러시아 연합군 10만, 그리고 스웨덴 왕족 베르나돗테 공(公)이 직접 이끄는 스웨덴-러시아 연합군 10만 병력 등 도합 43만 명의 대군이 나폴레옹을 향해 일제히 진격해온 것이다.
 이에 맞선 프랑스 병력은 30만 명. 나폴레옹은 베르나돗테 군과 대결토록 우디노 장군을 전선으로 급파한데 이어 15일 자신도 말에 올라 프러시아군의 블뤼허 장군에 응전하기 위해 드레스덴을 떠난다. 그가 만 44세 되던 생일날이었다.
 
 메테르니히, 혁명탓 재산 잃어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인 전황(戰況)의 기술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다. 한낱 오스트리아 외상의 신분으로, 당시 유럽 전체를 한 손에 쥔 세기적 대물(大物) 나폴레옹과 당당히 맞선 외교관, 메테르니히의 위인(爲人)됨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불사토록 유도했는가!
 각종 백과사전을 열어보면, 그에 관한 극히 평면적인 기록이 전부이다.  
 '라인 지방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마인츠 선거후(選擧侯)의 자격으로 궁정에 드나들며, 당시 오스트리아에 모여든 망명 귀족들을 통하여 프랑스혁명을 알았다. 그 후 드레스덴 주재 공사, 베를린 주재 공사, 파리 주재 공사, 그리고 1809년 외상에 취임, 나폴레옹을 타도할 기회를 타진하던 중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을 주선,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유지시키면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1813년 대(對)나폴레옹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승리 후, 다음 해 비엔나 회의 의장이 되어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외교상의 지도권을 장악한다. 그 지도 이념이 바로 유럽 대국들의 '세력균형론'으로, 현상을 변혁하려는 모든 국민주의·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함으로써 대국(大國)간의 이해 대립으로 자칫 전쟁으로 발전하는 일을 극력 피하려 하였다. 그래야만 같은 민족 국가의 모순을 내포한 오스트리아를 국가로서 유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술한 나폴레옹 전기 작가 크로넹의 기록을 뒤지면 메테르니히가 왜 나폴레옹한테 원한을 품었는지가 소상히 기술되어 있다. 메테르니히가(家)는 전통적인 라인란드 지방 코블렌즈에 거처를 둔 전통적인 튜톤(게르만)가문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비롯된 시민전쟁의 확대로 라인강(江) 좌안(左岸)에 있던 대형 요하니스 포도원을 비롯한 그의 모든 재산이 프랑스 황실 소유로 바뀌면서, 6천명에 달하던 농노(農奴)들마저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을 귀족의 재산을 빼앗는 '쟈코뱅주의자'의 소행으로 간주, 전쟁 폭군이 빼앗아 간 모든 재산은 (메테르니히家의 재산을 포함해서) 원 소유주에게 돌려 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뀌게 됐다. 자신의 사유 재산마저 오스트리아의 국익으로 미장(美裝), 나폴레옹을 상대로 한(恨)풀이를 한 것이다.
 훗날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한 나폴레옹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핵심 배경요인은 재산과 공포다!" 라는 명언을 남긴 건, 바로 메테르니히를 제대로 체험한데서 얻어낸 나폴레옹의 산 지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