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파리 학살’ 환기하기
파리 사건이 있고 50년이 흐른 뒤, 네 권의 신간이 오랫동안 잊혀온 그날 밤의 기억을 되살리고 가다듬어 전달하는 데 기여한다. 장뤼크 에노디는 <1961년 10월, 파리 학살>(4)에서 그동안 자신의 연구를 종합한다. 라데쿠베르트 출판사는 질 망스롱의 <학살의 3중 은폐>를 보완한 <알제리인들의 10월 17일>(5)을 출간한다. 여기에는 1961년에 관한 마르셀 페주와 폴레트 페주의 미공개 증언들이 포함돼 있다. 질 망스롱은 <그 시대 텍스트로 보는 1961년 10월 17일>(6)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디디에 대닝크와 마코는 벵자맹 스토라가 서문을 쓴 <검은 10월>(7)에서 모한드와 그의 누이 켈루자의 시선을 통해 그날의 사건을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 분야에서는, 메흐디 랄라우이의 선구자적 작품 <강의 침묵>(1991)과 알랭 타스마의 <검은 밤>(2005) 이후, 자크 파니젤의 <파리의 10월>이 눈에 띈다. 오랫동안 검열에 의해 상영 금지됐고, 작가 자신도 발표를 꺼리던 이 다큐멘터리가 드디어 극장에서 상영된다.(8)
이것은 모두 ‘기억해야 할 의무’가 ‘기억의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증거들이다. 역사가들이 여전히 토론 중인 문제 가운데 몇몇은 흥미진진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것들이다. 프랑스 쪽의 쟁점은, 당시 여러 달 동안 재판하지 않은 채 계속된 학살의 이유와 책임소재에 대한 것이다. 파리 경시청장 모리스 파퐁은, 사건 발발 5개월 전 임명된 로제 프레이 내무장관의 비호가 없었다면 이날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처벌받지 않을 것을 보장해가면서 학살을 준비하지도 기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레이 장관은 과연 정부의 ‘비호’ 없이, 나아가 FLN과 협상을 벌이며 FLN의 실력 행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그 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미셸 드브레 총리를 필두로 정부 내부에 포진해 있던 알제리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FLN에 맞서 벌인 작업이었을까? 다른 수많은 공범 없이 사건이 그토록 오래 은폐될 수 있었을까? 알제리 쪽의 쟁점은 ‘파퐁 경찰청장이 최악의 권력남용을 경찰과 그들의 ‘보조원들’에게 거듭 부추기던 시점에, FLN이 과연 거리시위의 위험부담을 제대로 가늠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이 시위의 주최자들이 이후 알제리의 야당이 된 점을 감안할 때, 지중해 저편 알제리에서 수십 년 동안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이 유지돼왔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의 처사에 대한 끔찍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시위대와 경찰 간의 총격으로 2명이 사망했다는 경찰청 발표의 허무맹랑함에도 불구하고, 1961년 10월 17일 파리 한복판의 학살 이후 다른 어떤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1962년 2월 8일, 샤론 지하철역에서 같은 경찰청장 휘하의 같은 경찰에 의해 프랑스인 9명이 살해되고, 그 5일 뒤 치른 장례식에 거의 50만 명의 군중이 집결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3월 19일, 정전협정으로 알제리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니만큼 프랑스가 저지른 이 최후의 식민지 범죄를 인정하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다.
글. 도미니크 비달 Dominique Vidal
번역.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1) ‘폴리오 추리소설’ 시리즈, 갈리마르, 파리, 1998.
(2) 람세, 파리, 1985.
(3) ‘역사 포인트’ 시리즈, 쇠유, 파리, 2007.
(4) ‘플뤼리엘’ 시리즈, 파야르, p.640, 12유로, 파리, 2001.
(5) 라데쿠베르트, p.199, 14유로, 파리, 2011.
(6) 레 프티 마탱, p.128, 5유로, 파리, 2011.
(7) 아들리브리(Adlibris), 앙티쉬르레망, p.60, 13.5유로, 2011.
(8) 시네마 레 트루아 뤽상부르, 67, rue Monsieur-le-Prince, 75005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