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예술가에 대한 정당성 없는 보이콧
‘연대’의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예술가에 대한 환영이 제안 및 요구되고 있다. 러시아 예술가 퇴출과 퇴출 철회에 필요한 조건을 정당화 하는 것도 바로 이 ‘연대’다. 하지만 문화 보이콧은 형제애 발휘 외에도 다른 많은 쟁점을 품고 있다.
“예술에는 국적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국적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 ‘동물의 사육제’(1886)를 작곡한 프랑스 음악가 카미유 생상스의 입장은 단호했다. 죽은 자든 산 자든, 지금 전장에 있는 보병이든 지난 세기를 빛낸 장군이든, 적은 적일 뿐이다.(1) 예술을 가장한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상스는 문화 보이콧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음악계를 뒤흔든 논쟁에 참여했다. 독일 작곡가 작품 연주 찬반을 둘러싼 논쟁이다.
예술 분야도 ‘신성한 단결’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성한 단결’은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대통령이 1914년 8월 4일 연설에서 “침략자를 향한 공동의 분노와 공동의 애국심으로” 모든 국민이 하나로 뭉치길 독려하며 사용한 표현이다. 국가는 공식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논쟁은 음악계에 국한됐다. 이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없이 무대에 울려 퍼지던 ‘독일’ 작곡가들의 독일어 오페라는 실제로 무대에서 추방당했다. 반면 베토벤과 슈만의 작품이 재빨리 무대를 채웠다. 강경노선 지지자들이 ‘두 개의 독일’ 이론을 수용해 퇴출 기준을 다소 완화했기 때문이다. 바흐, 모차르트처럼 ‘인간적이고 무고한’ 게르만어권 작곡가와, 프랑스 음악가 알베르 베르텔랭의 표현처럼 “과대망상증에 무분별한 교만이 합쳐진 지배와 억압 욕구를 표출하는 독일 문화(Kultur, 독일어로 문화)에 심취한 게르만어권 작곡가를 구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독일 문화의 극단적인 상징으로 여겨진 리하르트 바그너의 경우, (프랑스의 동맹국인 영국에서는 계속 연주됐지만) 당연하게도 오랫동안 프랑스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하지만 이런, 애국심을 앞세운 보이콧은 결국 프랑스에서는 제한적인 성공 밖에 거두지 못했다.
이로부터 50년 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전혀 다른 가치를 대변하는 새로운 방식의 보이콧이 재등장했다. 1968년, 유엔(UN)은 모든 국가, 기구 그리고 유엔 산하 기관 및 조직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정권과의” 모든 교육, 스포츠, 문화 교류 중단을 요구했다. 유엔은 “가장 넓은 의미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교류와 문화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런데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이러한 교류를 부정한다”라고 명시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초청 연주를 거부했고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문화 보이콧이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언론에 보도돼 심리적 영향을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취지로 2005년 시작된 BDS운동(보이콧・Boycott, 투자철회・Divestment, 제재・Sanctions의 약자)은 이 반(反) 연성권력(Soft power)을 수단으로 삼아 팔레스타인의 대(對)이스라엘 투쟁에 대한 인식제고 운동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보이콧이 겨냥하는 대상은 언제나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세계는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러시아 예술가를(이 점에서는 생상스가 선구자다) 대대적으로 떠들썩하게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피오트르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을 우크라이나 국가로 대체 연주했다.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 국립극장이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제작을 포기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순회공연들이 취소됐으며 러시아 예술가들은 각종 무대와 유로비전(Eurovision), 칸 영화제, 유력 피아노 콩쿠르 등의 국제 경연에서 배제됐다.
용납할 수 없는 침묵의 대가
그렇다. “예술은 국적이 없지만 예술가는 국적이 있다.”
본질주의가 맹위를 떨친다. 정치가들이 무대에 등장하면 본질주의는 변화한다. 올바른 진영에 대한 지지를 증명하라는 요구가 본질주의를 빠르게 대체한다. 즉시 전쟁 반대 선언부터 해야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유명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받았다.
그런데 독일 뮌헨 시청 관계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용납할 수 없는 침묵”(<Radio Classique>, 3월 11일)을 지켰다. 뮌헨 시장은 게르기예프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해임했다. 게르기예프는 뒤이어 빈, 로테르담, 카네기홀 그리고 에든버러, 베르비에, 프라하 페스티벌뿐만 아니라 필하모니 드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도 퇴출당했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과 프랑스 툴루즈 국립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동시에 맡고 있던 투간 소키예프는 툴루즈 시장으로부터 “입장을 분명히 밝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툴루즈 시장은 “전쟁 상황 앞에 그가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소키예프는 결국 두 곳의 음악 감독직을 모두 사임했다. 이후 그는 모든 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르몽드>, 3월 7일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최근 발언에서 러시아 예술가 보이콧을 승인하고 논란을 확대시켰다. “푸틴 정권지지 입장을 분명히 밝힌 예술가”의 공연은 취소하거나 “장기간” 연기해야 한다.”(<라 데페슈(La Dépêche)>, 3월 10일자)
놀랍게도, 보이콧은 모호하게 뒤섞이며 정당화되기 시작했다. 국적으로 적을 식별하기도 하고, 특정 정권 지지자들을 가려내고 이들의 공연을 “장기간” 취소하는 방식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우크라이나 국민과 연대’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이 문구는 분노와 각종 보이콧으로 뭉친 유럽 전역에서 강박증처럼 유행하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신성한 단결’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푸틴 반대 선언을 하지 않은 러시아 예술가를 배척하는 것은, 어떤 ‘연대’의 증거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연대의 ‘신성함’이 개입한다. 지금의 ‘신성함’은 과거처럼 조국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더 넓은 또 다른 조국인 유럽연합(EU)을 구성하고 푸틴 정권을 적으로 간주하는 가치를 수호하는데 있다. 이 중 핵심 가치는 바로 푸틴이 조롱하는 민주주의다. 푸틴에 반대 입장을 증명하지 않는 러시아 예술가를 받아들이면 유럽의 연대가 약화된다. 유럽의 가치를 침해하는 푸틴의 공범에게 호의를 베푸는 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죄로 밝혀진 이들은 제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행한 ‘두 개의 독일’이라는 표현처럼 이제 두 개의 러시아가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영화감독 세르게이 로즈니차는 이를 “소련인 대(對) 반(反)소련인”으로 묘사했다. 러시아 영화감독들은 전쟁에 맞서고 있다고 강조했던 로즈니차 감독은 유럽영화아카데미(EFA)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EFA가 전쟁 규탄에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난하며 EFA 탈퇴를 선언했다.(2)
현재 가장 지배적인 방식의 보이콧은 민주주의 지지자와 독재 지지자의 구분이다. 적과 공동의 선을 정의하는 문화 보이콧은 영혼이 결여된 채로 EU가 추구하는 ‘유럽의 정체성’과 연대하고 동시에 이 정체성을 강화한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Esteban Buch, ‘Les Allemands et le Boches, la musique allemande à Paris pendant la Première Guerre mondiale, 독일인과 독일군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에서의 독일 음악’, <Le Mouvement social>, n° 208, 2004년 3월. 뒤의 인용문도 이 기사에서 발췌한 것임.
(2) Sergueï Loznitsa, ‘Lettre ouverte à l’Académie européenne du cinéma, 유럽영화아카데미에 보내는 공개서한’, <Screen Daily>, 2022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