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매파는 누구인가?

2022-04-04     쥘리에트 포르 l 연구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등장한 서구와의 군사적 문화적 대립을 주장하는 사상이 주도한 결과였다. 이런 지정학적 및 군사적 결정에는 이데올로기보다는 러시아 강경파의 영향력 증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22년 2월 26일, 러시아의 언론인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는 자신의 84번째 생일을 맞아 우크라이나 상공을 가로지르는 공격기 조종석에 앉아서 실시간으로 인터뷰를 했다. 프로하노프의 눈 앞에서, 소비에트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꿈은 가장 폭력적인 형태로 실현되고 있었다. “저는 지금 우크라이나의 어두운 영토 위를 날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탱크는 계속 전진하며, 1991년에 벌어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중략) 오늘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다시 하나가 됩니다.”(1)

프로하노프는 ‘애국주의’를 이끄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애국주의는 페레스트로이카(1985~1991) 이후 서유럽파(zapadniki, 자파드니키)와 ‘자유민주주의자’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사조다. 전통적인 러시아 제국을 그리워하면서,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주도한 개혁에 반대하고 과거 소련의 정치적・군사적 문화를 되찾기 원하는 지식인들이 주축을 이뤘다. 1990년대에는 프로하노프가 창간한 일간지 <Zavtra(내일)>가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의 반대파를 집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기 기고자 중에는 스탈린주의자, 민족주의자, 군주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성직자, 전통적인 이슬람교도 등이 포함돼 있었다. 유라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은 서구와 구분되는 러시아만의 문화적 특수성을 주장했고, 애국주의와 볼셰비키주의 작가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와 공산당 당수 겐나디 주가노프가 이에 동조했다.(2) 

분야를 막론한 다양한 인사들이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에 나타난 민주주의, 경제 자유화, 과두 정치, 사회의 서구화, 국제 질서에 대한 미국의 패권을 강력하게 비판하기 위해 모였다. “옐친은 220만 러시아인을 죽였다.” 1995년 <Zavtra>는 옐친이 추진한 경제 정책은 러시아인을 ‘대학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이런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애국주의자들은 공통된 열망을 품고 있다. 러시아 역사의 장점만 취합해, 러시아 제국의 전통적·정신적 가치와 소련의 군사적·기술적 능력을 결합한 강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애국주의는 주류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생각 중 일부는 1994년 체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집권당에 의해 차용됐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분리주의에 대한 반대를 기반으로 국민들에게 새로운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했다. 1996년 당시 옐친 대통령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에 적합한 러시아의 ‘국가적 사상’을 정의하고자 정부 위원회를 구성했다.

 

20세기 말 사건들, 신흥 러시아 강경파 소환

20세기 말에 발생한 몇 가지 주요 사건들은 자유주의와 서구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러시아 여론이 애국심을 강조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1998년 금융 위기와 그로 인한 루블화의 폭락, 헝가리, 폴란드, 체코의 가입에 따른 나토 확장, 1999년 UN의 합의 없이 나토가 세르비아를 폭격한 사건, 제2차 체첸 전쟁 등이 그 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새로운 지식인 세대, 즉 보수적인 청년층이 급부상했다. 1970년대에 태어난 이 신흥 러시아 강경파는 이전 세대의 애국주의자들 같은, 소련에 대한 그리움은 전혀 없다. 다만 대부분이 모스크바 국립대(MGU)에서 교육을 받은 종교 철학, 정치적 보수주의, 민족주의 전문가들인 만큼, 세계화를 비판하는 한편 러시아 주권과 강대국의 지위를 수호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러시아의 정치권은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보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푸틴은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권력의 수직 구조’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2004년부터 러시아 강경파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의 친서방 ‘색깔 혁명’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 정부가 내세운 이데올로기적 반격에 조금씩 동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이자 여당의 대표적인 이념가였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는 러시아 정부의 권위적인 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2006년 ‘주권 민주주의’의 개념을 통합하고 이론화했다.

두긴과 프로하노프는 여당의 요청에 따라 친정부 청년 운동인 Nashi(우리의 것)와 Molodaia Gvardiia(젊은 파수꾼)을 상대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때부터 둘의 경력은 날개를 달았다. 두긴은 2006년 모스크바 국립대의 철학과 교수로 임명됐다. 프로하노프는 유명한 친정부 성향의 기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가 NTV 채널에서 진행하는 토론 방송의 단골 패널이 됐다.(3)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여당 내에서 ‘러시아 클럽’이라는 소그룹을 운영하면서, 점차 세력을 확산하던 반정부 민족주의자들에 맞서 정부의 입장을 효율적으로 대변하기 위해 고심했다.

2007년 푸틴의 연설에서도 강경파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연설 중에 나오는 ‘정신적 안보’라는 표현은 러시아의 종교적 정체성 보호와 국가 안보 문제를 결합한 개념이다. “러시아 연방의 전통적인 종교와 핵 방패는 국가를 강화하는 두 요소이며, 국내외 안보를 보장하는 필수조건이다.” 푸틴 대통령은 2007년 2월 1일 러시아와 해외 기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있었던 뮌헨안보회의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단극성을 비판한 것을 기점으로 러시아의 외교 정책은 반서방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됐다가 후에 총리가 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고수했다. 2008년 여름에 발발한 러시아-조지아 전쟁으로 러시아의 고립 상태가 악화하자, 대대적인 군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임기 나머지 기간에는 대통령 자문 그룹에서 강경파를 배제했다. 그 자리를 채운 자유주의자들과 개혁론자들은 서구와의 관계 회복, 법치 국가의 강화, 경제 개혁과 같은 새로운 표어를 내세웠다.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새로운 러시아’란?

2011년 총선의 부정선거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2012년까지 이어졌지만, 정권의 정당성 위기에도 불구하고 2012년 5월에 푸틴은 재선에 성공했다. 엘리트 지도부 중에서는 정보기관과 군부 출신의 ‘실로비키(siloviki)’가 기술 관료들보다 우위를 차지했다.(4) 

이런 상황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독재 체제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에 프로하노프는 이즈보르스크(Izborsk) 클럽을 설립했다. 중세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였던 에스토니아 인근 도시의 이름을 딴 이 클럽은 “애국심이 강한 지도자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역량을 강하게 응집시키고, 외세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한 제국 전선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5)

지식인, 대학교수, 정치인, 기업인, 기자, 예술가, 종교인, 정보기관 소속 등 다양한 전문가 60여 명으로 구성된 이 클럽의 목표는 “국가 전체에 적용될 애국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6) 이즈보르스크 클럽에는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경제학자이자 푸틴 대통령의 경제 자문으로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유라시아 경제 통합을 주도한 세르게이 글라제프, 대주교이면서 푸틴의 고해 신부로 유명한 티혼 세브코우노프, 기자 겸 에너지 기업 로스네프트(Rosneft)의 분석부 대표인 미하일 레온티에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조레스 알페로프(2019년 사망) 등이다. 

이 클럽은 최고위 엘리트 정치인들의 비호를 받고 있다. 발족식에는 프스코프 주지사를 거쳐 현재는 통합 러시아당의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안드레이 투르차크와 문화부 장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가 함께 했다. 이즈보르스크 클럽은 세력을 넓혀갔다. 푸틴 대통령은 2012년 12월 의회 연설에서, “러시아의 인구학적 위기, 도덕적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신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이듬해 “비전통적인 성 정체성의 홍보” 금지법과 신성모독 금지법을 제정하는 근거가 됐다. 

2013년, 전 세계 전문가와 지도자들이 모인 발다이 국제포럼에서, 푸틴 대통령은 “뿌리와 기독교적 가치를 망각한 채 도덕적 문화적으로 쇠퇴 중인 서구와 러시아는 엄연히 다르다”라고 단언했다.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부대표인 기자 겸 정치학자 알렉산드르 나고르니는 이를 “러시아의 애국주의자들이 수년에 걸쳐 집대성한 생각, 가치, 개념의 총체”라고 정의했다.(7)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영향력은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 때 정점에 달했다. 러시아 정부는 클럽 회원들이 분석한 유로마이단 혁명의 배경을 공유했다. 유라시아 통합을 저지하기 위해 서구가 배후에서 조종을 했다는 내용이었다.(8) 푸틴 대통령은 크름반도 침공을 정당화할 때도, 크름반도는 서기 988년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장소인 만큼 “러시아에 문화적 및 정신적으로 귀중하다”는 클럽의 해석을 내세웠다.(9) 

2014년 7월 새로운 크름 공화국의 내무부, 정보, 홍보부 장관이 된 드미트리 폴론스키는 프로하노프와 이즈보르크스 클럽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당신들의 의견이 봄에 일어난 크름반도 사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10) 러시아군은 이 클럽의 전략적 역할을 인정하는 의미로 전략 폭격기에 이즈보르스크라는 이름을 붙이고 클럽 로고까지 부착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 분리주의자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반군을 지원하겠다는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입장을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판단한 러시아 정부는 이즈보르스크 클럽과 공식적으로 노선을 차별화했다. 서구의 제재로 막대한 지출에 허덕이던 러시아 정부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의 독립 결정한 주민투표 결과도 승인하지 않았다. 

반면 이즈보르스크 클럽은 ‘Novorossia(새로운 러시아)’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 통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즈보르스크 클럽은 미승인 국가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의 건국에 기여한 인물들과 친분이 깊었다. 파벨 구바레프 인민 주지사, 알렉산드르 보로다이 총리, 이고리 스트렐코프 국방장관은 공통적으로 프로하노프가 창간한 일간지 <Zavtra>에 기고했던 경력이 있다. 2014년 여름에 이즈보르스크 클럽은 그들에게 정치적 조언과 조직적 지원을 제공했고 국가 건설 프로젝트의 수립을 도왔다.

9월 5일 러시아 정부는 반란에 가담한 주요 인사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민스크 협정 체결을 받아들인 새로운 엘리트층으로 채우도록 막후에서 조종했다. 민스크 협정은 돈바스 지역에 ‘지방 자치 특수 지위’를 부여하고 우크라이나에 재편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협정 과정에서 제외된 이즈보르스크 클럽은 이런 외교적 해결책에 유감을 표했다. 그 대신 민간 군사 기업 출신의 자원자들로 구성된 ‘자유군’의 개입과 전략적 표적을 겨냥하는 미사일 공격에 기반한 ‘전면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우크라이나는 정식 국가가 될 능력이 없다”

 

또한 클럽은 도네츠크 현지의 정보원을 통해 돈바스 지역 분리주의자들과도 주기적으로 소통했다. 발레리 코로빈은 2015년 5월 출간한 저서 『우크라이나 프로젝트의 종말』에서, 우크라이나는 “정식 국가가 될 능력이 없으며 레닌이 창조한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주제”라고 주장했다.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생각은 공식적으로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재정적 지원은 충분히 받았다. 2015년 이 클럽은 『러시아 세계의 독트린』의 제작비용으로 대통령 행정실로부터 1천만 루블(당시 환율로 약 15만 유로)을 수령했다. 2016년 출간된 이 책은 발칸반도와 흑해에서 서구와 맞서려면 “러시아의 이익 영역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인이 “신나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러시아 혐오증’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포함됐다.

푸틴의 독재정권은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얼마간의 유연성을 유지하고 있다. 2016년 9월 총선 이후에는 대통령 행정실의 행동 방향이 자유민주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반서방 보수주의자이자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비공식 후원자인 바체슬라프 볼로딘은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 자리에서 좀 더 영향력이 적은 하원의장직으로 옮겼다.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세르게이 키리옌코는 1998년 금융 위기 때 총리였고 국영 원전 기업인 로사톰의 대표(2005~2016)를 지낸 인물로, 자유주의적이고 기술 관료에 가깝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가 부실장이 된 후에 시민 기업을 위한 대통령 지원금은 이즈보르스크 클럽 지원금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2020년 말 푸틴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가 체포되고 투옥된 이후 푸틴의 어록을 살펴보면 최근에 러시아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더 강경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21년 7월 푸틴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결합’에 관해 쓴 기사는 이즈보르스크 클럽이 발표한 논문들을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대의 산물”로 “신나치에 관대한” 엘리트들이 통치하고 있으며 러시아 혐오증이 “국가 정책”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8개월 뒤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정치 체계가 확실하게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분파가 혼합돼 있었던 절충형 권위주의에서, 전제적이고 호전적인 국가 문화를 강요하는 극도로 억압적인 체제로 변모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와의 종전 협상 타결을 위해 파견된 러시아 대표단의 대표도 이즈보르스크 클럽의 주요 인물이자 전 문화부 장관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다. 

 

 

글·쥘리에트 포르 Juiliette Faure
파리정치학교(시앙스포)·국제연구소(CERI)·프랑스국립과학원(CNRS) 소속 박사과정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Komsomolskaïa Pravda, Moscou, 2022년 2월 26일
(2) Jean-Marie Chauvier, ‘Eurasie, le « choc des civilisations » version russe(한국어판 제목: 유라시아주의, 러시아판 문명의 충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5월호, 한국어판 2014년 6월호. 
(3) Christophe Trontin, ‘En Russie, une passion pour les talk-shows(한국어판 제목: 토크쇼 열기에 휩싸인 러시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1년 8월호.
(4) Richard Sakwa, Putin Redux : Power and Contradiction in Contemporary Russia, Routledge, London, 2014년.
(5),(6) 이즈보르스크 클럽 사이트, www.izborsk-club.ru
(7) Alexandre Nagornii, Ot Miunkhena k Valdaiu, 이즈보르스크 클럽 사이트, 2013년 10월 3일.
(8) 대통령 연설, 2014년 3월 18일. 
(9) 러시아 의회에서의 대통령 연설, 2014년 12월 4일. 
(0) 이즈보르스크 클럽 일지, n°7(19), Moscow, 2014년. 
(1) Alexandre Nagornii, 스탈린의 레시피(러시아어), 이즈보르스크 클럽 사이트, 2014년 6월 25일.

 

“그 보장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2007년 2월 10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 앞에서 이렇게 작심 발언을 했다.

 

“이번 독일 체류를 계기로, 유럽 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이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조약은 바르샤바 블록의 해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에 발맞춰 1999년에 체결됐습니다. 조약 체결 이후 7년이 지났지만 러시아연방을 포함한 4개국만이 조약을 비준했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은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습니다. (…) NATO의 확장은 동맹의 현대화나 유럽의 안보와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상호 신뢰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도발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가 NATO 확장을 지휘하는지 공개적으로 물을 합법적인 권리가 있습니다.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고 우리의 서방 파트너들이 보장한 약속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 보증서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 모여 제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기억을 떠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1990년 5월 17일 브뤼셀에서 NATO 사무총장 M. 뵈르너가 했던 연설에서 몇 문장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독일연방공화국 영토 밖에 NATO군이 배치되지 않게 준비한다면, 소련에는 확실한 안전보장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보장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베를린장벽의 콘크리트 덩어리와 돌들은 오래된 추억입니다. (…) 하지만 현재 우리는 새로운 경계선과 새로운 장벽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상의 선일지라도, 그 선들은 분명 우리의 대륙을 분할해서 갈라놓고 있습니다.” 

“RT,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대규모 군사 공격을 선전하고 침략국의 폭격에 피해를 입은 민간인 희생자들을 외면하는 뉴스채널. 한 국가의 침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허위 정보를 보도하는 매체. 바로 <i24뉴스>와 <CNN>이다. 2014년과 2021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타격’할 당시, 파트리크 드라이(Patrick Drahi)가 소유한 이스라엘 채널 <i24뉴스>는 이스라엘 방공 시스템에 관해 “국제 언론에 맞선 아이언돔”이 될 것이라고 자랑했다(<롭스(L’Obs)>, 2014년 8월 14일 자). 2003년에 타임워너 그룹이 소유한 미국 채널 <CNN>은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미국 정부의 거짓말을 그대로 보도했다. <CNN>도 마찬가지지만, <i24뉴스>는 사실을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 본다는 이유로 프랑스와 유럽에서 검열을 받지는 않았다. <i24뉴스>는 운영자들의 꽃다발과 상자에 아무 탈 없이 배달되어, 인터넷에서 추적당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러시아 언론은 유럽연합(EU) 전 지역에서 전면 금지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에 이 같은 방향의 여론이 편파적으로 보도될 것을 고려해, 규제 당국의 지침에 따라 합법적인 결정이 내려졌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있는 EU 이사회는 통신규제기구 아르콤(Arcom)에 러시아 언론을 금지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의 위반 가능성을 조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2017년 당선 직후 에마뉘엘 마크롱은 러시아의 <RT>와 <스푸트니크 뉴스>를, 대선 운동 당시 “(자신의) 인격에 대해 불명예스러운 허위사실을 만들어낸 영향력 있는 기관”으로 보았다(2017년 5월 29일, AFP). 이후 이 미디어들과 SNS가 노란조끼 운동을 지지하자 마크롱 대통령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2018년 영상물 고등심의회(CSA)는 시리아내전 보도에서 발생한 번역 오류를 근거로 <RT>에 경고했다. 그러나 더 강력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침공 개시 몇 시간 뒤, 중도 성향의 로랑 라퐁 상원의원은 <RT>의 ‘방송 금지’를 요청했다. 주간지 <카나르 앙셰네>에 따르면, 2022년 2월 26일 마크롱은 이런 말을 쏟아냈다. “나는 몇 달 전부터 <RT프랑스>와 <스푸트니크 뉴스>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사람들은 매번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길 거라고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2022년 3월 2일) 

사실 이번에는 행정부가 굳이 법적 근거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RT>가 국가 안보와 방위를 침해했는가? EU가 전쟁 중인 것을 제외하면, 그렇다고 말하기 힘들다. <RT>가 크렘린 연설(‘특별 작전’)을 중계하고 조작된 정보를 보도했는가? 이 방문객들이 돈바스의 ‘대학살’이라는 표현과 우크라이나를 ‘비(非)나치화’할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다른 방송들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크네셋(이스라엘 국회)에서, 모스크바가 자신의 나라에서 시작한 전쟁을 히틀러의 ‘최종 해결책’으로 규정한 연설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러니까 EU는 러시아가 언론 검열을 한다고 비난하면서, 마찬가지로 <RT>에 검열이라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EU는 기본권 헌장 제11조에서 “공권력의 개입이나 국경을 고려하는 일 없이, 정보나 아이디어를 주고받을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이제는 SNS에 퍼진 러시아의 영향에서 소수민족을 빼내야 했던 것처럼, EU는 법적으로 강압적 명령을 선호했다. 

 

글·마리 베닐드 Marie Bénil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