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라는 냄비

2022-04-04     르노 랑베르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냄비에 찬물을 붓고 불에 올리면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99℃가 될 때까지 분자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서서히 온도가 올라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품이 생긴다. 온도가 변하면서 성질도 변하는 것이다. 세계도 얼마 전 비슷한 순간을 경험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관계가 변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국제관계가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고 말했고(2월 27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국제관계가 ‘시대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3월 2일). 몇 달 전만 해도 소련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떠올리며 21세기에 군사적 핵 위협 확산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군사 분야에서 세계 최강인 러시아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강화태세에 돌입했다고 발표했다. 

세계가 혼란에 빠진 것은, 러시아연방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광기로 세계를 전복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군사적 동기는 이제 지정학 교과서가 아니라 정신분석학 개론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3월 4일자 기사에서 “푸틴이 이성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3월 6일자 기사에서 “푸틴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푸틴을 ‘단단히 미쳤다(Reuters, 3월 2일자)’라고 평가한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의 분석에 따른 것이다. 정신병자는 어떤 요구가 아니라 갑작스런 착란상태에 따라 행동한다는 이점이 있다. 그들이 해야 하는 말을 들으면 비이성적인 것에 빠져들 위험에 노출된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법에 위배되며, 어떤 이유로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범죄를 정당화할 수 없다. 어떤 논쟁도 키이우를 강대국들의 협상 카드로 전락시키거나, 러시아가 전 세계를 군사적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갈등의 원인도 정확히 모른 채,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까? 푸틴의 정신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손쉽게’ 결론짓는 것으로 이 상황을 납득하겠는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급변하는 것을 물이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지정학적 갈등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마치 끓어오르는 상태를 외면하고 “저 불길이 어디서 시작됐지?”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불길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왔다.

“나는 이것이 새로운 냉전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련에 맞서 ‘봉쇄정책’을 펼친 냉전의 아버지 조지 F. 케넌은 1998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유럽 확장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NATO의 확장은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런 행동은 분명 러시아의 적대적 반응을 일으킬 것이고, (NATO 확장 추진 세력들에는) ”러시아인들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 우리는 당신들한테 경고했다“라고 할 빌미를 제공할 겁니다.” 

 CIA 국장 윌리엄 번스는 2008년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당시 윌리엄 번스는 국무차관이었다)에게 이런 서한을 보냈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러시아에는) 가장 첨예한 ‘레드라인’입니다. 저는 이 계획이 러시아의 이익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2022년 2월 15일자 기사에서, 1987~1991년에 소련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M. 잭 매틀록은 미 상원에서 NATO의 확장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취했던 입장을 이렇게 회고했다. “NATO에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이라는 미행정부의 권고는 오판이다. 상원이 그 권고를 승인한다면, 냉전 종식 이후 가장 중대한 전략적 실수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 미국의 동맹, 동맹에 가입하기를 희망하는 국가들의 안보를 강화하기는커녕, 소련 붕괴 이후 최악의 안보 위협으로 이어질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현재는 이런 말을 덧붙일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 즉 ‘색깔혁명(공산주의 붕괴 이후 중앙유럽 및 중앙아시아 구소련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 지지자들이 표방한 목표는 어리석고 위험한 조치였다.”

이런 시도를 우려하는 발언들이 잇달았다.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팻 뷰캐넌은 “NATO를 러시아 앞으로 끌고가, 21세기에 벌어질 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또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우크라이나가 서방 군사동맹에 가입한다는 발상은 러시아 지도자가 누구든 절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발언이 서구의 ‘실수’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섣부른 행동을 자초하는 것일까? 2000~2004년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를 지낸 로더릭 라인 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서구 제국주의가 존재한다고 해서 러시아 제국주의가 힘을 못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주의가 활개치도록 서구 제국주의가 러시아를 부추긴다면 세계는 두 번 패할 것이다. 서구는 긴박해진 ‘시대의 변화’를 막기보다는, 물이 끓어오를 때까지 좌시하려는 듯하다.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반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당일인 2월 24일 아침 일찍,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특별 군사 작전’을 실시한다고 러시아 국민들에게 알렸다. 

 

“우리는 사건의 추이를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 우리와 인접한 영토에, 강조하건대 우리의 역사적 영토에, 우리에게 적대적이고, 전적으로 외세의 통제를 받는 ‘반러시아’가 만들어져, 이곳에서 나토군이 함부로 행동하고 최신 무기를 들여오고 있습니다. (…) 이것이 수차례 언급한 바 있는 레드라인입니다. 그들은 이 레드라인을 넘었습니다. (…) 상황의 전체적인 변화와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들을 분석한 결과, 러시아와 이 세력들 간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그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들은 대비를 하며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지속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러시아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고, 발전하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 우리가 오늘 써야만 하는 방법 외에, 러시아와 우리 국민을 지킬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상황은 우리에게 즉각적이고 단호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 이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 외부에서 개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 모를 사람들에게 중요한, 매우 중요한 몇 마디를 하겠습니다. 우리를 방해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위협하려는 자는 누구든, 러시아가 즉각적으로 대응할 것이고, 당신의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