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두려움의 대상인가?

2022-04-04     프레데리크 르메르 l 경제학자

세계 경제가 출렁이자, 정치권 지도자들은 만화 속 소방관의 모습처럼 화재 진압에 애를 쓰는 듯하다. 그런데 물이 새는 호스로 불을 끄다 보니, 새어나간 물은 늘 다른 데서 문제를 일으킨다. 디플레이션을 막다 보면 투기성 거품이 생기고, 인플레이션을 막다 보면 경기가 침체되는 것이다. 이렇듯 신자유주의식 소방 해법은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문제를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기 바쁘다.

 

몇  년 전, 대다수 사람들에게 잊힌 단어 하나가 다시금 세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다. 서방 경제학자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이 공포의 디플레이션은 임금과 물가가 동반 하락하는 현상으로, 이 시기에는 투자가 폭락하고 경제활동이 급격히 둔화된다. 2007~2008년 경제 위기의 여파에 따른 디플레이션은 유럽과 미국 경제를 심각한 악순환의 고리에 빠뜨릴 수 있었고, 따라서 모든 수단과 방편을 다 동원해 이를 막아야 했다. 미 중앙은행(FED, 연방지급준비위원회)은 물론 긴축의 대명사인 유럽중앙은행(ECB)도 줄곧 디플레이션을 피하려 노력하며 세계 경제에 대량으로 유동성을 풀어 물가를 다시 오름세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이번엔 정반대의 문제에 부딪힌다. 물가의 폭등으로 또다시 세계 경제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2021년 막바지의 몇 달 간 과도한 물가상승에 따른 우려의 목소리가 각 언론 매체 1면을 장식했다. 실제로 전 세계 대다수 국가에서는 물가 지수가 경이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미국에서는 2021년 12월 물가상승률이 7%에 달했는데, 이는 1982년 이후 최고치다. 유로존에서도 마찬가지로 물가상승률이 5%에 달했고, 독일과 스페인에서는 30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렇다면 물가가 이렇듯 요동치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디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피하려 애쓰던 세계 경제가 결국 물가 폭등이라는 또 다른 괴수의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인가? 

 

인플레이션, 가난한 자들에게는 ‘빈곤세’?

인플레이션은 특정 기간(보통은 직전 12개월) 한 지역 내 통화의 전반적인 가격 추이를 고려한 경제 지표로 가늠한다. 이를 위해 각국 통계청에서는 통상 소비자 물가 지수를 활용한다. 빵이나 의복, 가전, 이미용료 등 소비 빈도가 높은 일정 개수(EU 통계청의 경우는 700개)의 재화 및 서비스 가격 추이를 반영한 경제 지표다. 소비자 물가지수는 물가 변동과 함께 통화의 구매력 추이를 알아보기 위해 측정한다. 전년도에 비해 물가가 올랐다면 이제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제품의 수가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구매력 하락에 따른 영향은 사회 내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빚을 진 정부라면 인플레이션 상황이 유리하게 작용하는데, 국채의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물가상승으로 (임금 협상이나 물가 연동제에 의해 자연스레) 임금이 올라가면, 이는 가계 부채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70년대 프랑스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물가 연동제로 임금 노동자에 대한 인플레이션 영향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에너지 이용료와 대중교통 요금, 식료품비가 오르는 상황에서 해당 화폐의 떨어진 구매력만큼 소득이 보전되지 않으면, 이는 1982년 임금의 물가 연동제를 폐기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표현대로 가난한 자들의 ‘빈곤세’로 작용한다.(1)

따라서 인플레이션은 제도적 조정안과 사회적 역학 관계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지는 가변적인 재분배 현상이다. 다만 이 인플레이션 수식에도 변하지 않는 상수가 있다. 화폐 가치의 하락을 극도로 혐오하는 채권자와 이자 소득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가가 올라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자연히 이들의 예금 가치도 떨어진다.

70~80년대에는 인플레이션이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경기 침체와 실업 문제를 겪는 상황에서도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해 1974년과 1979~1981년 사이 두 자리 수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칼을 갈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를 이용해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킨다. 그때까지만 해도 케인스주의를 따르던 경제 정책은 -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더라도 - 왕성한 경제활동 수준을 보장하려 했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이 이끈 신자유주의 세력의 최우선 과제는 인플레이션 척결이었고, 이들은 그로 인한 경기 침체도 불사했다. 

그러던 중 이 새로운 경제 사조가 확고히 자리잡는 계기가 마련된다. 1979년 폴 볼커 의장이 FED의 기준 금리를 대폭 인상한 것이다. 미 경제의 숨통을 조이던 인플레이션에 제동을 건 조치였다. FED가 이 같은 ‘초강수’를 두고 난 후, 1980년에서 1983년까지 미국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13.6%에서 3.2%로 곤두박질쳤다. 이어 유가 하락의 탄력까지 받은 미 경제는 빠르게 디플레이션에 접어들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미 다 예상한 상황이었고, 통화주의자들의 이 같은 해법은 그 효력을 입증했다. 물론 이후 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졌으며, 실업률은 폭등했고 심각한 경기 침체가 미 국민을 덮쳤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이어졌는데, 그에 따라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서는 공공부채의 현금화가 금지되며 ECB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규정들이 채택된다. 인플레이션 유발 정책을 사전에 차단하고, 낮은 수준의 인플레이션 비율을 유지하는 분명한 통화 운용 규정을 부과한 것이다. ‘물가 안정성’의 보장은 ECB의 첫 번째 사명이며, ECB는 질서 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적 개입을 명문화한다.(2)

신자유주의를 따르는 통화주의 이론에서는 혹여 인플레이션이 생기지는 않는지 지속적으로 예의주시할 것을 권고한다. 따라서 경제활동이 조금이나마 과열 양상을 보일 때, 즉 실업률이 (프리드먼 말마따나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하지 않는 수준의) ‘자연’ 실업률 미만일 때 금리를 올려 경제활동과 부채 비율을 줄이는 억제책을 실시한다. 이는 결국 채권자와 이자 소득자의 입맛대로만 통화 및 예산 정책을 펴겠다는 뜻이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 위험

하지만 2007년과 2008년 경제 위기는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당시의 위기로 금융 구조 전반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을 강타한 또 하나의 위험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로 경제를 지속적으로 둔화시키는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다. 일본은 1990년대 이미 ‘잃어버린 10년’을 통해 디플레이션 악몽을 경험했다. 버블 경제가 무너진 후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일본 경제를 강타하자 일본 중앙은행은 거의 제로 금리에 가까울 정도로 기준 금리를 인하했고, 채권을 직접 매입하는 ‘이례적인’ 조치까지 단행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유럽과 미국의 중앙은행도 동일한 카드를 뽑아들었다. 덕분에 금융 구조는 간신히 살려냈지만 유럽과 미국 경제를 ‘로우플레이션’ 상태에서 빼내지는 못했다. 그저 미약한 인플레이션과 제자리 성장만 반복하는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19 사태도 통화주의자들의 억견을 어느 정도 뒤집어놓았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손발을 묶어둔 이동 제한 조치가 실시된 후 다시금 경제를 회생시키려면 상당한 규모의 예산 지출이 불가피하며, 통화 당국에서도 합당한 정책으로 경기 부양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에 미국에서도 트럼프 정부와 바이든 정부가 일련의 경기부양책을 채택했고, 미 연준 역시 수조 달러에 이르는 유례없는 규모의 대출 정책과 채권 매입 정책으로 정부 방침을 보조했다.(3) ECB 또한 대규모 채권 매입을 단행해 유럽 경제에 유동성을 풀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미국의 인플레이션 비율은 연초 0.1%로 최저점을 찍은 후 2020년 말 가까스로 1.4% 수준에 머물렀다. 유로존도 8월 이후 여전히 디플레이션 상태이며, 독일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이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경제 분석가와 언론의 우려가 점점 커진다. 몇 년 전부터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 디플레이션 위기가 정말 도래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2021년, 또 다시 모든 상황이 역전된다. 인플레이션 비율은 2021년 3월부터 다시 높아지는 양상을 보였는데,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인플레이션이 이번엔 너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이에 미국의 로런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2021년 11월에 쓴 한 기고문에서 물가상승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기보다 경기 과열의 징후라며 경계의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 과열은 전이 현상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경제적 번영을 위협하고 기관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4)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올리비에 블랑샤르 역시 2021년 3월 바이든 정부가 채택한 경기부양책에 우려를 표했다. 그 같은 규모의 예산 할애는 “과열 정도가 아니라 화재를 불러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5) 독일에서도 유력 일간지 <빌트>가 물가상승에 대한 ECB의 무대응을 비판하고 나섰다. 덕분에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마담 인플레이션’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6)

돈을 만들어 예산 지출을 늘리는 건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일 뿐이라던 프리드먼의 분석을 차용한 래리 서머스는 물가상승이 “과도한 부양책과 안일한 통화 정책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클린턴 정부 시절 백악관 자문 위원을 지낸 누리엘 루비니 교수가 “1970년대보다 더한 중기적 스태그플레이션 환경”이라 지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7)

 

언론의 집중 포화가 이어지자 ECB와 FED는 상황의 심각성을 부인하고 나선다. 11월 29일 독일 TV의 질문을 받은 ECB 집행위원 이사벨 슈나벨은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를 것임을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고 단언했다.(8) 그로부터 몇 주 전, 제롬 파월 연준 의장 역시 물가상승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9) 사실 다수의 경제 분석가들은 지금의 물가 상승세가 여러 가지 상황적 요인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 상황에는 코로나19에 따른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단 단순한 ‘기저 효과’부터 통계상에 영향을 미친다. 2020년 봄에는 석유와 같은 일부 원자재 물가가 코로나19 해소를 위한 조치의 여파로 폭락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 비율은 직전 12개월의 상황을 기반으로 계산한다. 따라서 2021년 4월부터 계산한 인플레이션 비율에는 미국과 유로존에서 ‘비정상적으로’ 물가가 낮았던 시기가 포함된다. 이에 인플레이션 수치를 기계적으로만 계산할 경우, ‘비정상적으로’ 높은 값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경제지들의 낙관적 전망, 근거는?

또 한 가지 요인은 경제학에서 ‘공급 쇼크’라 일컫는 현상으로, 이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야기됐다. 경제활동이 회복되면서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물가가 갑작스레 상승한 것이다. 2020년 3월과 4월, 기록적인 최저치를 보인 배럴당 가격은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2020년 10월과 2021년 사이, 원유의 배럴당 가격은 약 2배 올라 80달러 선을 뛰어넘는다. 석유가 여전히 주요 에너지원인 만큼 경제 전반에 그 여파가 미치며 에너지 물가를 끌어올렸고, 아울러 플라스틱과 원자재 가격은 물론 육로 및 항공 교통비도 함께 올라갔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에서 대다수 기업은 새로운 비용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한다.

유사한 상황은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제지, 건설 자재, 전자칩 등의 분야에서는 전반적인 품귀 현상이 나타나며 전 세계 시장의 물가 지수를 위로 끌어올렸다. 거의 전 지구적으로 행해진 이동 제한 조치가 조금씩 해제되면서 경제가 차츰 활성화하자 수요는 급증하고 보건위기 상황으로 공급은 줄어든 탓이다. 더욱이 컨테이너 부족, 포화 상태에 이른 창고, 항만 정체, 해상 운송비 폭등과 같이 코로나19의 여파로 복합적인 물자 운송 문제가 발생하면서 공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뿐만 아니라 2021년 3월에는 에버그린 선박이 수에즈 운하를 가로막아 6일간 바닷길마저 차단됐다. 그 결과 물자 운송은 더뎌지고 전 세계 물류 체인이 뒤엉켰으며, 안 그래도 재고가 부족한 시기에 공급 문제가 더욱 심화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폭염까지 이어지며 밀, 커피 같은 농작물 생산량이 크게 줄었고, 이는 자연히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가운데 장기화 조짐이 보이는 요인은 없다. FED 전 부의장 앨런 블라인더가 설명한 바와 같이 2021년 말 물가상승은 중고차, 항공권, 휘발유 등 한정된 몇 가지 재화와 서비스로만 한정됐다.(10) 텍사스 주 중앙은행에서 계산한 대안 인플레이션 지수는 이 같은 시각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가격 등락이 심한 몇 가지 품목을 빼고 계산한 이 지표에 따르면 2021년 12월 미국의 연간 인플레이션 비율은 3% 수준으로, 일반적인 소비자 물가 지수에 따라 계산한 7%과는 꽤 차이가 있다.(11) 다만 최근 몇 달 간 원자재 및 에너지 부문의 비용이 올라가면서 관련 제품과 서비스에 미치는 영향 또한 확대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2021년 말 인플레이션 비율이 기록적인 수치를 보였음에도 경제 언론 대다수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이 2022년 각국 중앙은행의 목표치를 뛰어넘었다”면서도 “이는 2021년 대비 둔화된 양상으로, 거시경제에 대한 우려의 요소가 되지는 않을 전망”이라고 평했다.(12) <블룸버그 TV> 전문가들의 견해도 비슷했다.(13) 

그렇다면 낙관론이 대세일까? 사실 인플레이션 부활에 대한 원리적인 해석은 영미권 언론에서도 격한 비판의 대상이 됐다. <뉴욕타임스>의 경제란 책임자는 2021년 2월의 한 논평에서 래리 서머스와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괜한 소동’을 불러일으킨다며 크게 호통을 쳤다. 당시 그는 이에 대해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시기에 닦아둔 진부하고 낡은 수법”(14)이라며 공공지출의 적기를 결정하려는 저들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경기는 과열된 것인가?

<이코노미스트>지는 물가가 차츰 하향세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한 기사에서도 인플레이션 가속화에 대한 통화론자들의 억측을 반박했다. 통화론자들은 물가가 오를 경우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것이고, 그에 따라 기업이 단가를 올려 손실분을 채울 것이라며 물가와 임금의 악순환 위기를 지적했지만, 그 같은 악순환의 흐름이 실현될지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게 동 매체의 생각이다.(15)

물론 코로나19 사태가 미국의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19가 촉발한 보건위기로 임금 노동자의 대량 사직 사태가 벌어졌는데, 특히 코로나19의 직격타를 맞으면서 임금이 낮아진 요식업 분야나 화물 취급소, 운송업 종사자의 사직이 크게 늘어났다. 이들 분야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그에 따라 임금 인상이 탄력을 받았으며, 그 결과 2021년 1월과 2022년 1월 사이 시간 당 평균임금은 5.7% 상승했다. 그러니 자유주의 분석가들이 ‘과열’지표로 보았던 것은 사실상 실질 임금 하락분이 인플레이션으로 메워진 것에 불과할 뿐, 경기 과열을 부추길 요인은 없었다.

게다가 세계화와 자유무역에 따라 물가와 임금이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추세이므로 이 또한 물가-임금 상승의 악순환 고리를 차단해줄 전망이다. 이 같은 가격 하락에의 압박은 물가가 오르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주는 족쇄 역할을 한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비용 경쟁이 심화하며 노동자 임금을 끌어내리고 있고, 아울러 저렴한 제품이 선진국으로 유입되면서 물가도 내려간다. 결과적으로 디플레이션은 외부 유입 요인으로 발생하는 셈이다. 이 모든 건 과잉 공급 체제에 기인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구조적인 과잉 생산이 나타나며 최근 몇 년 사이 물가와 임금을 하락세로 끌어내렸다.(16)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오늘날 물가 수준이 높아진 건 재정지출이 과한 탓도, 임금이 높아진 탓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외려 그는 농식품 분야나 금융권, 통신사, 항공사, 제약업계 등 다수의 부문에서 과점 상태를 점한 초대형 기업들의 행태를 문제 삼는다. 해당 기업은 “가격을 올려 수익을 증대하기에 충분한 권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17)

기업은 이윤 추구를 위한 노력을 결코 자제하지 않았으며,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의 상장기업들 중 약 2/3은 2021년 1월에서 9월까지 코로나19 이전 시기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18) 동 매체는 보건위기 사태로 초래된 생산 비용의 증가가 소비자 부담으로 가격을 올리고 기업 마진을 높이기 위한 “절호의 찬스”였다고 지적한다. 라이시 전 장관에 따르면 이럴 경우 “반독점법을 공격적으로 사용”해야 인플레이션의 구조적 원인을 공략할 수 있다. 바이든 정부도 이를 염두에 두었는지 2021년 말 농가공 분야와 에너지 부문, 해양 수송 부문에 대한 ‘반경쟁적 관행’을 알아보는 조사 작업을 다수 실시했다. 

하지만 물가 인상이 장기화하며 선거 지지층을 대거 확보한 인플레이션 카산드라들은 통화 정책에 있어 상당히 센 정치적 입김을 발휘한다. 그에 따라 미 연준 의장도 결국 인플레이션 우려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다. 2021년 말엽, 그는 물가 인상에 대해 더는 ‘일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12월 초 미 의회의 한 위원회에 참석한 자리에서도 “거의 모든 경제분석가들이 2022년 하반기 상당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예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에 뒤이어 “이를 확신하듯 행동할 수는 없다”며 여지를 두기는 했다.(19)

 

인플레이션 논란,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

 

 

경제학자 세 명이 모이면 네 개의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인플레이션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은 경제계의 그 같은 다양한 의견 양상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교묘한 기술적 담론의 탈을 쓰고 정치적 반대 수작을 벌이는 것일까? 후자라면 논리적 대결보다는 힘의 역학 관계가 더 문제 해결에 주효하지 않을까?

2007~2021년 연이어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면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도 빈틈이 생겼다. 과거에는 이 같은 주류의 사상이 소위 ‘올바른’ 공공재정 운용원칙을 제시하는 데 사용됐다. 즉, 경제가 정치의 조종간이 된 셈이다. 그런데 총체적 파탄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정반대의 원칙이 자리잡는다. 정치가 경제의 조종간이 된 것이다. 원리론자들 입장에선 인플레이션 위기가 다시 도래해야만 이 같은 ‘일탈’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갈등은 기득권의 이득을 살피는 기관과 지배 계층 내부의 두 분파를 서로 대립시킨다. 사실 맹렬한 통화 질서 수호자의 목표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ECB든 FED든 마르크스 사상과는 거리가 먼 기관들인데, 이들이 최근 들어 유동성의 고삐를 늦춘 건 갑자기 통화 질서를 뒤집으려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경제 사회 체계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유럽과 미국의 중앙은행은 현재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한쪽에선 인플레이션 위험을 차단하라는 주문이 들어오는데, 이는 이념도 이념이지만 선거 민심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모두 중요한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물가 인상은 그만큼 국민의 공분을 살 우려가 높다. 한편 또 다른 한쪽에선 비틀거리는 세계 경제에 계속해서 활력을 집어넣으라고 압박한다. 더욱이 유럽에선 ECB의 유동성이 대거 투입된 후에도 여전히 삐걱거리는 통화 동맹의 단합이 시급하다. 

그런데 긴축통화 정책을 시행하면 경제활동이 둔화될 것이므로 정치권 지도자들의 외면을 사기 쉽다. 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과 부동산 시장은 물론, 낮은 금리로 활성화돼 이제는 금리 그 자체에 의존하고 있는 암호화 화폐 시장까지 심각한 긴장을 유발할 것이다.(20) 또 다른 형태의 인플레이션 위험이 도사리는 셈인데, 이 또한 소비자 물가 지수와 연계된다. 금융 인플레이션을 야기해 투기성 소득과 불평등, 위기의 원천인 주식 거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유로존에서는 신중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긴축통화는 곧 국채 시장에서의 긴장을 높이는 신호탄이 되기 때문이다. 1970년대 태동한 신자유주의 통화 질서는 자가당착의 모순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한쪽에서 무언가 해법을 적용하면 다른 쪽에서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만다. 미 연준은 이제 눈에 띄게 유동성을 줄여나갈 모양이다. 국채 매입 계획을 대폭 축소하겠다고 진즉에 알렸을 뿐 아니라 (오는 봄부터 시작해) 2022년에 몇 차례 기준 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3월까지 예정된 채권(주로 국채) 매입을 줄이는 수준에 그치며 오랜 기간 중립적 행보를 걸어왔으나, 2월 초 라가르드 ECB 총재는 연내 금리 인상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뒀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극도로 불안정한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유럽이든 미국이든 긴축통화 정책의 실시에 따른 여파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글·프레데리크 르메르 Frédéric Lemaire
경제학자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François Mitterrand, 『L'abeille et l'architecte 꿀벌과 건축가』, Odile Jacob, Paris, 1978년.
(2) François Denord, Rachel Knaebel, Pierre Rimbert, ‘L’ordolibéralisme allemand, cage de fer pour le Vieux Continent 질서 자유주의, 독일식 사민주의와 자유주의의 화학적 결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8월호.
(3) ‘What did the Fed do in response to the COVID-19 crisis?’, <Brookings>, Washington, 2021년 12월 17일.
(4) Lawrence Summers, ‘On inflation, it’s past time for team “transitory” to stand down’, <Washington Post>, 2021년 11월 15일.
(5) Twitter, 2021년 2월 6일.
(6) ‘German tabloid attacks ECB chief Lagarde as “Madam Inflation”’, <Reuters>, London, 2021년 11월 30일.
(7) Nouriel Roubini, ‘La menace de la stagflation est réelle 실질적으로 임박한 스태그플레이션 위기’, <Project Syndicate>, Prague, 2021년 8월 30일, project-syndicate.org
(8) ‘German inflation of 6% adds to pressure on ECB’, <Financial Times>, London, 2021년 11월 29일.
(9) ‘Fed sings the “transitory” inflation refrain, unveils bond-buying “taper”’, <Reuters>, London, 2021년 11월 4일.
(10) Alan Blinder, ‘When it comes to inflation, I’m still on team transitory’, <The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2021년 12월 29일.
(11) ‘Trimmed Mean PCE Inflation Rate’, 댈러스 연방준비위원회, 2022년 1월 4일. 
(12),(15) ‘What will happen to inflation’, <The Economist>, London, 2021년 11월 8일.
(13) ‘What could possibly go wrong? These are the biggest economic risks for 2022’, <Bloomberg>,  New York, 2021년 12월 13일.
(14) ‘Inflation isn’t lurking around the corner. This isn’t the 1970s’, <New York Times>, 2021년 2월 16일.
(16) Dominique Plihon, ‘La déflation : quels risques? Problèmes économiques 디플레이션, 위험한가? - 디플레이션의 경제적 문제점’, <La Documentation Française>, 별간 제8호, Paris, 2015년 9월 2일.
(17) ‘We need to talk about the real reason behind US inflation’, <The Guardian>, London, 2021년 11월 11일.
(18) ‘What does inflation mean for american businesses? For some, bigger profits’, <The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2021년 11월 14일.
(19) ‘How do you feel about inflation? The answer will help determine its longevity’, <The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2021년 12월 12일.
(20) ‘Paiera-t-on bientôt sa baguette en bitcoins? 비트코인 그 마법의 대가, 곧 치르게 될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