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동, 하이데거 식으로 재건하면

2011-12-09     김량

도시는 변천한다. 도시는 현대문명을 대변해야 하며, 특히 수도는 한 국가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한눈에 드러내야 하는 외관적 가식성을 지녀야 한다. 또한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창출해 국가의 힘을 상징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것이 수도다. 분단 한국의 수도 서울은 전쟁이 할퀸 도시라는 핸디캡에서 벗어나기 위해 급속도로 고층 빌딩을 짓고 빈민촌을 숨기기에 바빴으며, 쾌적한 북미 신도시를 모방하는 듯한 재개발 사업에다 부동산 투기마저 팽배해 도시 고유의 정체성이 모호할 지경이다. 반면 프랑스 파리는 어떤가. 도시의 현대성과는 상관없이 아직도 19세기 이전의 건축물이 주된 풍경을 이루고 있어 보전의 미학이 유난히 돋보이는 곳이다. 초현대적 이미지와는 상반된 도시계획을 일관되게 추진해온 이 도시는, 그럼에도 지구촌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망의 도시다. 다소 과거지향적인 파리의 도시계획은 지난 시절 화려했던 프랑스의 ‘국격’을 강조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해, 감정적 공명은 물론이고 거주인보다 먼저 도시 스스로가 존재론적 사치를 누리는 곳이다.

이런 파리에서도 ‘재개발’이라는 개념이 있을까. 프랑스어로 ‘재개발’을 뜻하는 단어로 ‘정비·개발’을 일컫는 ‘아메나제망’(Aménagement) 혹은 ‘재생’이라는 명사 ‘레제네라시옹’(Régénération)을 사용한다. 보전미학이 우선인 파리의 재개발 개념은 고층 빌딩이나 대단지 아파트 건설업을 독려하다시피 하는 신흥 아시아 국가의 그것과 명확히 다를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상하수도 공급마저 어려웠던 파리의 빈민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동산 시세가 가장 낮은 19구와 20구 지역 일부는 아직도 ‘재개발’ 중이다. 신흥 아시아 국가의 ‘싹쓸이’식 재개발 정책보다 거주지역의 역사성을 보전하는 정책이 우선인 이 방식은, 공간 개념에 관한 서구 철학을 따르고 있다.

레제네라시옹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정신은 단지 건물을 헐고 다시 세우는 물리적 작업이 아니라, 공간의 역사를 고려해 그 지역이 수세기 동안 형성한 공간성과 시간성을 파괴하지 않는 재생 작업의 의미를 담고 있다(그러나 프랑스의 도시계획은 이런 의미를 산업 신도시나 이민 세대가 모여사는 대도시 외곽 지역에는 적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거주권은 정의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

역사·문화 유적지만이 공간성과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명인의 거주지라 할지라도 그 공간은 거주자의 내면적 역사가 담겼다. 서울 시내의 고층 빌딩 사이에서 존재하는 허름한 한옥들을 관찰하노라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뒤 재개발의 위협 아래 놓인 그 집이 품고 있음직한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파리 시내의 평범한 거주지를 필름에 담았던 외젠 아제의 사진들 속에도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만일 아제의 20세기 초 사진 속 장소와 우연히 마주친다면, 100년 전과 별 다름 없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멈추기에 전력하는 듯한 파리의 보전 위주 도시계획에 소름이 돋을지 모른다.

파리 중심지에서 7층 이상 고층 건물의 건축 허가를 얻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라고 잘 알려졌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파리에는 (몽상가들을 위한) 집이 없다”고 했다. 거주인보다 거주지의 존재감이 더 강한 인상을 주는 이 도시에서는 노숙인(SDF·Sans Domicile Fixe, 정해진 거주지가 없는 사람들)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주거시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밀려난 계층이 주거권을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된 고질적인 사회문제는 작고한 피에르 신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정부의 무관심과 만성적 실업으로 마비된 듯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또한 노숙인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빈민구제 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로 알려진 피에르 신부는 “주거권은 정의에 관한 질문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주거권이 위협받을수록 그 사회의 정의 의식은 악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이다.

주거권과 사회정의 문제를 결부한 피에르 신부는 빈민구제 운동에 평생을 바친 성직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젊은 시절 그는 알베르 카뮈 그리고 앙드레 지드와 함께 정치적 활동을 펼쳤고, 언론 플레이에 능숙했다. 1954년 겨울 프랑스에 몰아닥친 혹한으로 노숙인의 죽음이 잇따르자, 그는 라디오 방송에서 빈민 현실을 호소하는 연설을 해 전 국민을 감동시켰다. 이 방송의 여파는 과히 혁명적이었다. 국민은 앞다퉈 기부금을 냈고, 찰리 채플린 또한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거금을 기부했다. 오늘날 빈민구제 운동단체 엠마우스재단은 이렇게 설립됐다. 연이어 피에르 신부는 겨울에는 절대 세입자를 퇴거시킬 수 없다는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1954년부터 프랑스 북부 지방에 무주택 가족을 위한 집을 짓기 시작한 엠마우스재단은, 현재 39개국에서 무주택 가족들과 함께 장기적 계획을 세워 집을 짓고 있다. 그러나 파리 시내의 주거난은 여전하며, 재개발 사업은 도시 보전을 위한 외관 정비 위주로 진행된다. 피에르 신부가 펼친 노숙인 돕기 시민운동은 ‘돈키호테의 아이들’(Les Enfants de Don Quichote)이라는 단체와 ‘주거에 권리를’(Droit au Logement)가 바통을 이어가고 있다(나는 ‘주거에 권리를’ 단체가 주관한 작품 경매 전시에 참여한 바 있다).

집은 곧 개인의 역사다

동절기가 다가오면 거리 노숙인의 주거 문제는 다시 프랑스의 사회문제로 떠오른다. 찰리 채플린이 피에르 신부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건네주면서 “나는 당신의 주거 빈민운동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돈을 반환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영화 <키드>에는 주거 빈민들이 하룻밤을 보내는 숙소가 등장하는데, 아이의 숙박료를 낼 수 없는 채플린이 관리인의 눈을 피해 아이를 품속에 재우는 장면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분단된 한국 사회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노숙인과 철거민의 인권이 위협당하고 있다. 악법도 법이라지만, 50년 넘게 시행되는 행정대집행법은 노점상과 도시 불법 거주민을 강제로 철거시키기 위해서라면 공권력이 용역 깡패를 동원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고, 폭력을 당한 철거민에게 용역 비용마저 합법적으로 부과할 수 있는, 비상식적이고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악법이다. 이미 서울 용산과 묵동에서 공권력이 휘두른 과도한 폭력으로 철거민의 인권이 난도질당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서울 포이동 266번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 지역에 가해진 폭력의 기억은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정권의 이른바 ‘도시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의 판자촌 사람들을 서울 서초동 군 정보사령부 뒷산에 집단 수용했고, 1981년 전두환 정권은 그들을 또다시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중 하나가 포이동 266번지다. 1988년, 200-1번지였던 포이동이 266번지로 바뀌면서 이곳을 불법 무허가 집단지역으로 규정해 거주인들의 주민등록증을 말소시켰다. 포이동 주민들의 역사는 핍박과 폭력, 그리고 부당함으로 얼룩졌고, 주민들은 어두운 역사에 저항하는 새로운 역사를 10여 년 전부터 만들고 있다. 투쟁 끝에 주민등록증을 회복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이 생기면서 마을의 교육 수준도 높아졌다.

지난 6월 12일 타워팰리스가 내려다보는 이 땅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빈곤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판자촌 70여 가구가 모조리 타버렸을 때, 가속화된 양극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은 그런 거주지의 가치 상실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공간은 절대적 공간이었으므로 그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판자촌에서 겪은 고통과 저항의 30년 역사를 고스란히 잃었고(대부분의 피해 주민들은 화재시 몸만 빠져나왔다), 판자촌이라는 물질적 가치를 떠나 각 개인의 역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은 곧 영혼이다”라고 했으며, “집이란 우리의 최초 엄마”라고 했다. 우리는 집안에서  태아처럼 보호받고 인간이 성장하면서 겪을 수 있는 소소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집은 우리 내면의 세계이므로 집을 인간화하기도 한다. 집은 태어나고, 경험하고, 살아가고, 늙어간다. 집은 그저 인간의 사상, 추억, 꿈을 기다리기도 한다. 집의 몸은 거주인과 이렇게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판자촌이든 호화 저택이든 모든 집은 평등하고, 이것이 집이 소유한 내밀성이자 포이동 주민이 집과 함께 잃은 정신적 가치였다.

거주인이 소유한 내밀성의 강도

몸의 기관들처럼 내밀스런 삶의 기관, 집을 구성하는 기관, 그 기관들 또한 집의 역사를 기억한다. 집이 소유한 물질적 요소는 그 기능을 떠나 사유의 힘과 상징이 되기도 한다. 집은 때때로 기억을 넘어서는 경험이 된다. 포이동 판자촌이 화재로 전소된 사건을 정보로 입수한 우리는, 전소된 집이 포괄하고 있던 물리적·추상적 요소, 즉 집이라는 몸이 소유할 법한 ‘기관’들을 즉각 인지하지 못했다. 포이동의 어떤 주부는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모두 잃어버린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그 아이들이 성장해 어린 시절을 회상할 연결고리인 그 사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개인의 역사와 집의 내밀성을 동시에 상실했다. 그러나 인간의 내밀성이 풍요로운 한, 집의 내밀성도 소진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재생’(레제네라시옹)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다.

이 소외된 영역에서 재건마을 주민들의 존재는 끊임없이 위협당했다. 거주민의 가슴에 ‘불법 거주민’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넣은 공권력은 행정대집행법이라는 악법을 그대로 적용해 용역이라는 폭력 수단으로 긴장감을 조성했다. 서울의 다른 재개발 지역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길 거부하고 저항에 돌입한 포이동 주민들의 단합된 공동체 의식은 개개인의 내밀성을 풍부하게 했다. 그들의 거주지는 ‘절대적으로’ 재생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권력은 재개발 공간을 해체하려 했고, 그 공간 속의 공동체 역시 해체될 위기에 처했다. 화재로 소진된 집들처럼 개인의 내밀성을 소진시키려는 공권력의 폭력이다. 거주지역이 재개발 사업으로 확정되는 순간 그 지역은 한 개인의 거주지로서 절대공간의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곳은 변형의 공간이며 정체된 공간이 된다. 철거 위협에 놓인 이곳은 거주민이 포기할 수 없는 거주 공간이 되면서도 사건이 잠재된 공간이 된다. 현존재의 거주 불안 개념이 맞닿아 극으로 치닫는 곳이 이 공간인 것이다. 과연 재개발 지역이라는 땅, 이 ‘터’가 포괄한 것은 무엇인가. 이 공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건축하다, 거주하다, 사유하다

공간의 실존성에 관한 철학을 펼쳤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공간 개념에 의하면, 인간이 어떤 특정 장소에서 거주하는 것은 그 공간을 건축했기 때문이 아니라 건축하는 것 자체가 거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게 ‘거주’ 개념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 의미가 된다. 거주자에게 공간이 친숙해지고 거주자와 공간의 근원적이고 원본적인 체험이 수렴된 시간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강제이주를 당한 뒤 뱀들이 들끓던 진흙탕을 일구어 거주지를 만들어갔던 포이동 주민들은 화재 이후의 그 ‘터’를 다시 거주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다. 주민 스스로 주거지를 재개발하고 재생하는 셈이다. 6개월 가까이 파란 지붕의 가건물을 지으면서 그들은 존재할 수 있었다. 공권력은 행정대집행권의 명분으로 용역을 동원해 집을 향해, 그리고 그 집을 짓던 사람들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지만, 쓰러진 집들은 다시 만들어지기를 되풀이했다. 주민들 스스로 재개발해가던 이 공간에서 생성되는 거주지의 역동성은 주민들 스스로의 풍부한 내밀성, 그 생존 의지에서 분출되고 있다. 이처럼 사건적인 장소가 된 재개발 지역은 공권력과 거주인들 간의 소통이 어려운 공간이며, 폭력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재개발 지역은 거주자에게는 인간적 가치가 존중돼야 하는 주관적 공간(Lieu)이며, 공권력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물어 쾌적한 도시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객관적인 공간(Espace)에 불과하다. 행정대집행법이라는 악법이 존재하는 한, 포이동 공간에서 현존하는 주민들과 현존하지 않는 공권력은 동상이몽할 수밖에 없다.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 된 포이동

현존재가 살아가는 공간과 그 도구(Ustensile)의 관계에서, 인간은 도구를 소유할 때는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도구가 사라졌을 때 그 도구를 찾으면서 공간을 인식하게 된다. 포이동 재건마을에서 주거인들과 공간의 관계는 화재로 70여 가구가 전소된 이후 변이됐다. 화재로 공간에서 존재하기 위한 도구(거주지)를 잃은 주민들은, 비로소 공간을 인식한다. 객관적 공간이란, 인간의 거주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조건 아래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화재로 전소된 포이동은 객관적 거주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몸과 그 공간과 일치감을 이룰 때, 즉 공간과 거주자의 육체가 균형 잡힌 적응 상태에 이르렀을 때 거주지의 주관적 가치가 빛을 발한다. 공간화, 환경에 적응된 상태는 그 공간을 어떻게 차지하느냐의 문제다. 다시 반복하면, 거주지를 잃은 포이동 주민들은 거주지를 만들면서 공간을 차지했고, 하이데거식으로 사고하면 그것은 곧 거주지가 없지만 거주지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거주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후설의 경우 공간 인식은 공간에 대한 ‘통찰’이며, 하이데거의 경우 이미 형성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성과 연관 있다. 시간이 지난 공간, 시간이 만들어낸 공간, 관계가 형성된 공간 모두 후설에게는 한 개인이 통섭하는 공간이지만, 하이데거의 경우 시간과 도구가 거주인과 함께 형성해야만 바야흐르 공간(Lieu)이 된다. 거주지가 품은 개인의 역사가 화재(사건)로 소진된 포이동 재건마을에서의 사유 가능성은 하이데거의 ‘다자인’(Dasein·구체적이고 개별적 존재, 자기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존재자) 개념을 떠올린다. 다자인은 곧 공간을 인식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공간 속의 도구(거주지)와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관계가 형성되면, 공간은 다루기 쉬운 것으로 인식돼야 한다. 다자인과 공간이 형성한 관계를 분석적으로 접근해본다면, 공간은 장소에 따라 인식되고 그 장소는 장소가 포함하고 설치되고 있는 그 모든 존재에 달려 있다고 본다. 동어반복적인(Tautologique) 하이데거의 철학에 의하면, 화재 이후 공간을 인식한 포이동 주민들은 다자인에 도달했고 이미 포이동이라는 장소의 전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생존에서 만들어진 미학

바슐라르는 상상하는 대상을 깨달음의 무한한 공간으로 이끌어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존재감을 느끼게 하며 최초의 이미지로부터 해방시키고 변화시키는 기능을 ‘상상력’이라고 했다. 포이동 주민들의 거주지를 지켜내고 싶은 열망은 생존 의지를 넘어 예술가의 창의성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집을 상상하고, 상상하는 집을 구체화하고 싶은 그들의 상상력 때문이다. 행복한 공간의 이미지는 주민들 각자가 꿈꾸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파란 지붕이 얹힌 동일한 가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용역의 망치에 전파된 집도 다시 파란 지붕을 얹고 살아났다. 폴 클로델은 대도시의 거주지를 ‘규약적인 구멍’이라고 했다. 포이동 재건마을에 어렵게 지어진 파란 지붕의 가건물 또한 언뜻 ‘규약적인 구멍’으로 인식돼 대도시 풍경 속에서 어렵게 살아갈지 모른다. 파란색 지붕으로 변신한 38억 원짜리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는 이질성을 참기 어려워하는 공권력의 시선을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주거지의 절대적 기능인 지붕은 지체 없이 그 존재 이유를 말한다. 그래서 포이동의 파란 지붕은 주민들의 거주를 합리화해주고 있다. 또한 개성 없는 가건물들에 미술대학 학생들이 벽화를 그려넣으며 주민들의 생존미학을 북돋워주고 있다. 주민들이 오랜 기간 저항과 생활고로 지쳐가는 동안에도 집은 계속 지어졌다. 포이동 재건마을의 생동감과 역동성은 파란 지붕의 가건물이 상징하는 것이다. 이제 포이동 재건마을의 집들은 어떤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땅을 지키며 30년 넘게 서로 의지하고 살던 주민들이 꿈꾸는 미래는 집에 달려 있다. 불확실한 포이동 공간의 거주지들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재생할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거주인들이 뿌리 없는 가건물에서 역사를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아마 이제 포이동 공간은 역사보다 생동감 있는 현재가 더 중요하리라. 나는 바슐라르가 언급한 ‘집의 몽상가’에 공감하지만 물리적 집은 몽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공간과 사회가 적절하지 않을 경우 몽상할 수밖에 없다. 포이동 주민들 또한 상상할 권리가 있고, 거주에 관한 이런 상상과 몽상이 억압당할 이유는 없다. 집이 우리에게 적절하려면 내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몽상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보금자리’는 주관적이다.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궁전에는 “내밀함이 들어앉을 구석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타워팰리스가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거지는 될 수 없다.

‘예술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하이데거는 “명백하게, 예술이 호소하는 것을 만족시키려는 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가장 잘 팔리는 예술가는 중요하지 않고, 예술이 원하는 것을 가장 순수하게 만족시키려는 자가 진정한 예술가라고 했다. 예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예술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하이데거다운 주장이다. 나는 앞서 주거지를 잃고 폭력에 협박당한 포이동 주민들의 생존 과정이 흡사 예술가의 작품 실현을 위한 치열한 상상력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이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한 ‘상상력’의 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중국에서 부당하게 구속 감금됐던 아이웨이웨이를 떠올려보자. 그는 공권력의 압력과 협박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고 중국 정부가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건들의 다양한 측면을 피해자들(예술가가 아닌)과 함께 발표했다. 불편하거나 진부해질 수 있는 일상성의 이미지를 규모를 갖춰 효과적으로 공개함으로써 동시대 예술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술가를 ‘불편부당한 목격자’라고 했던 안톤 체호프의 표현이 적절할 아이웨이웨이의 행보는, 맹목적으로 수용되는 현실에 비판적 견해를 가진 예술가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현실 속에 어떤 상상력으로 개입할지는 그들의 과제이며, 그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은 그 누구도 자유롭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예술가는 자유를 누리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이지만,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예술가는 세계를 향한 인본주의적 신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예술가들은 불편부당한 목격자로서 삶의 본질적 측면을 날카롭게 반추해야 할 책임을 수렴함으로써 자유 또한 반납한다. 포이동 주민들 또한 불편부당한 목격자였음에 다름없다.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지만, 집을 재생하는 생존 과정에서 모종의 미학을 창출한 것이다. ‘앵프라맹스’(Infra-Mince),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예술가들은 포이동 주민들처럼 단순하고 무의미한 것에서 꿈을 찾으려 한다. 포이동 주민들은 예술가처럼 창조력을 기를 수 있는 도화선을 찾아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내면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개인적 에너지를 집을 만드는 일에 쏟아부었다. 나는 지난 6월 화재 이후의 포이동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거대 권력의 점유권 강화와 동질성의 강요에 맞서 개별적이고 창의적 과정 속에 놓인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생존미학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글·사진 / 김량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한국전쟁으로 실향민이 된 친부의 영향을 받아 접경지역에 관한 프로젝트 ‘Light Up Zone’을 진행 중이며, 연평도와 포이동, 민통선 마을 등 지역적·사회적 경계지역에 위치한 거주 조건을 사진과 영상, 설치 작업으로 풀어내는 전시 ‘집의 재생력’을 준비하고 있다. 저서로 <파리가 영화를 말하다> <노엘의 그늘 아래>(Dans l’ombre de Noél)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