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전(戰)의 나팔수로 전락한 지식인들
적은 악마로, 동맹은 영웅으로
자고로 모든 정치지도자는 국민을 상대로 군사개입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인데, 서구 민주주의 국가는 이를 위해 특히 미디어의 힘을 이용한 여론전에 의지하고 있다. 오늘날 전쟁을 ‘정의로운 대의’라고 소개하거나, 적은 악마로, 동맹은 영웅으로 둔갑시키며, 신속한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은 전문가와 지식인이 맡고 있다.
레비의 헛소리가 시사하는 바들
무아마르 카다피의 암살과 정권 실각 이후, 리비아는 극심한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러던 가운데, 2018년 4월 1일 일요일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프랑스 엥테르>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다. 신간 홍보로 한참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군사개입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오히려 서방의 결단에 힘을 보탤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변했다. 이 말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세 가지 위선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첫째, 그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전쟁을 옹호하는 호전주의자다. 둘째, 그는 병에 대한 처방이 병 그 자체보다 해로울지라도 처방 약을 권한다. 즉, “서방은 의로운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그는 정작 자신을 향한 비판에는 철저히 무감한 ‘테팔 프라이팬’과 같다. 어떤 논리적인 반박에도 반들반들하게 코팅된 테팔 프라이팬 위를 미끄러지듯 피해간다. 사실 BHL(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약자)가 미디어에 워낙 자주 등장해서 대중에게 익숙할 뿐, 그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BHL 외에도 신자유주의 사상가, 전문가, 대학교수, 인도주의운동가, 정치인, 각종 단체의 운동가, 언론인, 심지어 최근에는 퇴역 군인에 이르기까지, 미디어에서 열렬히 현대 전쟁을 부추기는 나팔수 역할을 하는 이들은 무수하다. 그들은 앞으로 개시할 전쟁을 선별하고, 악인을 지목하고, 서방의 수동적 대응을 규탄하며 정치인에게 호소하고, 전략적 속셈은 숨긴 채 이러저러한 대의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고자 한다.(1) 30여 년 전부터 이런 부류의 ‘군부-지식인 복합체’가 모든 전략적 논의에서 점점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군부-지식인 복합체’의 부상은 1980~1990년대 일어난 세 가지 변화에 힘입어 시작됐다. 첫째, 탈식민화가 낳은 신흥 엘리트 계급과 더 넓게는 남반구 개발도상국이 향후 혁명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간주하던 제3세계주의의 종언이다. 둘째, 소련의 치명적인 카타스트로이카(Catastroika, Catastrophe(재앙)와 Perestroika(개혁)의 합성어로, 고르바초프의 1991년 개혁 정책을 비꼬는 표현-역주), 그리고 중국의 자본주의 전향으로 시장 경제 체제에 대립하던 대표적인 두 반대진영 모델이 사라진 사건이었다. 셋째, 1991년 1월 순식간에 일어난 서방의 걸프전 승리였다. 미군과 동맹군은 지상전에 나선 지 120시간도 되지 않아 세계 제4위 군사력의 이라크(세계 3위는 영영 알 수 없다)의 무력화에 성공했다.
이는 전 세계에 서방 군대의 절대적 우월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당시 전쟁상황이 실시간 국제뉴스를 통해 널리 중계됐다. 당시 급증한 여러 뉴스 채널은 최적의 전술 무기로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다. 사실상 미디어는 강대국의 입장에서 전 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필수적인 도구였다. 한편 지식인과 전문가도 앞으로 수행할 전쟁을 선별하고, 일단 군사작전이 시작된 다음에는 이를 ‘선한 전쟁’으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도맡았다.
또한 익숙한 비유나 간명한 이미지로 적을 악마화했다. 가령 오마르 알바시르를 수단의 ‘밀로셰비치’로, 바샤르 알아사드를 ‘다마스의 도살자’로 비유하는가 하면, (소련의 적인)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반군세력을 ‘자유의 전사’로 표현했다. 한편 ‘선’의 진영에 속한 지도자(혹은 지도자들)의 이미지를 미화하고 홍보하는 데도 열성을 다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프가니스탄의 마수드 사령관,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리비아 과도국가평의회였다.
‘피할 수 없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언제나 관계자들의 행동을 촉구할 때 사용하는 논거였다. 그들은 자못 심각한 어조로 프랑스에 개설된 24시간 뉴스채널 4개(<LCI>, <CNews>, <BFM>, <France Info>)(2)와 소셜네트워크에서 이 논거를 들어 관계자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1994년 <LCI>를 첫 신호탄으로 줄줄이 개국한 뉴스채널들은 각종 명성 높은 전문가들에게 무대를 마련했다. ‘전문성’의 척도는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 수준보다는, TV에 얼굴을 비추는 출연 빈도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TV 카메라 앞을 스쳐지나간 수많은 전문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프랑스에 이토록 많은 우크라이나 전문가가 있었는지 놀랄 만하다.
착각에 빠진 미디어 지식인들
오늘날의 미디어 지식인들은 그들의 위대한 선조들(앙드레 말로나 레지스 드브레 등)과는 달리 직접 총을 들 생각은 전혀 없다. 지난 2월 27일 트위터에서 한 특파원이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은 타자기 대신 총을 들었다”라고 일침을 놓은 데 대해, 철학자 라파엘 앙토방은 “전쟁은 각자가 가장 적합한 자리에 서서 싸울 때, 승리하는 법인데, (애석하게도) 나는 기관총보다 키보드를 훨씬 더 능숙하게 다룬다”라고 응수했다.
미디어 지식인들은 자신이 무지한 만큼 지략이 뛰어나다고 착각한다. 전 공군참모 출신의 한 장성은 자신이 리비아에서 수행할 군사전략에 대해,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훈수를 뒀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 장성은 차드의 아오즈우 지구(차드와 리비아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대로, 양국 간 영유권 분쟁이 치열했던 지역-역주)에서 리비아군과 맞붙었던 군인이다.
또한, 이 ‘군부-지식인 복합체’의 주역들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세계관을 세상에 알리는 일보다는, 참상을 비판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학살, 제노사이드, 인권유린.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경각심을 갖고, 방지할 수단을 갖추지 않고 방관한다면, 결국 우리는 영혼을 잃고 말 것이다. 바로 그것이 ‘개입’의 의의인 것이다.”(<렉스프레스>, 2011년 11월 9일) 이 발언을 한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나이지리아, 코소보, 다르푸르, 리비아 등 최소 4개 이상의 제노사이드의 존재를 지적했다.
하지만 즉각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윤리적 명령은 종종 기만적인 술책을 낳는다. 가령 루마니아 혁명 때 문화의 중심지 티미쇼아라를 학살 현장으로 몰아세운 사건은 인간의 감정을 조작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손쉽게 일국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분리독립운동을 부추기고, 군사개입의 필요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이처럼 (실제 혹은 날조된) 학살을 떠들썩하게 보도함으로써 전 세계 지도자들이 신속한 대응에 나서도록 종용하는 모습은 어느새 현대 전쟁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1995년 8월 사라예보의 한 시장에 떨어진 포탄은 보스니아 공습에 단초가 됐고, 1999년 1월 코소보 라카크 시장에서 벌어진 학살(아마도 연출된 것으로 추정)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고슬라비아 개입에 기폭제가 됐다.
반면, TV에 나오지 않는 학살에 대해 격분하는 이는 없다. 루마니아 혁명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1989년 12월 미국의 파나마 침공의 경우,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정권 전복 때의 2배 가까운 사상자를 낳았지만(약 2,000명에 달하는 사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당시 미군은 기자들의 전쟁 현장 촬영을 철저히 금지했다. 그 결과 루마니아 혁명의 경우처럼 ‘파나마 제노사이드’나 ‘집단 무덤’을 운운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2015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에서 벌이는 대리전은 ‘군부-지식인 복합체’로부터 군사개입을 해야 할 위기로 ‘선택’받지 못한 채 은폐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윤리적 태도가 지닌 이념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중심적 시각에 매몰된 국제전략연구
한쪽에 유명인사들이 지배하는 화려한 ‘군부-지식인 복합체’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잘 보이지 않는 싱크탱크가 있다. 가령 프랑스 국제전략연구(3)의 대표주자로는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를 꼽을 수 있다. 1979년,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대서양주의자이자,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티에리 드 몽브리알이 창설했다. 매년 『람세스』 연보와 각종 소책자 및 학술전문지 <외교정책>을 발간한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연구소로 프랑스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도 있다. 1991년, 과거 사회당 정부에서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의 자문으로 활동했던 파스칼 보니파스가 설립한 연구소다. IRIS는 계간지 <국제전략저널>을 편찬하고 있다.
한편, 대대적인 국가 재정지원을 받으며 노골적으로 대서양주의를 표방하는 전략연구재단(FRS)도 있다. 반면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신보수주의를 표방하던 싱크탱크 ‘세르클 드 로라투아르’는 잠시 반짝 등장했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직후 설립된 이 연구소는 학술지 <최상의 세계>를 발간했는데, 앙드레 글뤼크스만, 테레즈 델페슈, 파스칼 브뤼크네르, 로멩 구필 등이 집필에 참여했다.
하지만 냉전시대 이후, 국제전략연구는 미국 중심적인 시각에 경도됐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싱크탱크를 거느린 나라였고, 그 뒤를 중국이 따른다.(4) 17개 정보기관을 산하에 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는 4년에 한 번씩 향후 15~20년 뒤의 세계를 조망하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매번 전 세계 전문가들이 보고서 내용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카타스트로이카’는 훗날 이 엄청난 지식인 시스템을 구심점이 없는 채 남겨뒀다. 한가해진 전문가들은 몇 가지 비극적인 미래 전망에 천착하기 시작했는데, 30년 뒤 그들의 예언을 뒤돌아보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1996년 새뮤얼 헌팅턴 덕분에 유명해진 ‘문명의 충돌’(5)이란 개념은 35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전 세계적인 논쟁의 중심에 섰다. 저자는 거대한 문명 및 종교 권역의 존재에 대해 분석을 시도했는데, 당연히 구조적인 위험성을 지닌 지역으로 이슬람권과 아시아권을 지목했다.
2004년 전략지정학(Geostrategy) 전문가인 토마스 바넷(6)은 세계화와 안보의 연관성에 천착했다. 그는 모든 위험은 세계화로 엮이지 않은 국가들로 구성된 ‘야만의 땅(Terra barbaris)’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경제계’(브로델이 주창한 개념으로 ‘세계-경제’라고도 번역된다. 지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 경제권을 의미-역주)의 온전한 일원이자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만은 예외로 뒀다. 아이러니하게도 9・11 테러범들의 출신국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다. 더욱이 2000년 집권한 공화당의 전문가들 역시 알카에다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 바 있다.
오랫동안 국제전략연구소들의 핵심 연구 분야는 소련학이었고, 연구원들은 오랜 기간 미국의 외교 전문지들을 통해 소련 문제를 엄중하게 다뤄왔다.(7) 가령 미국 외교협회(CFR)가 발간하는 <포린 어페어스>(1992년)는 과거 고립주의 분위기 속에서 미국이 국제 문제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외교 전문지는 1947년 봉쇄정책(Containment)에 관한 조지 캐넌의 글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냉전시대의 교본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1970년 이후로는 카네기국제평화기금(CEIP)이 발간하는 <포린 폴리시>와 경쟁에 직면하게 된다.
다시금 드러난 호전주의 미디어의 위력
한편 1985년 신보수주의자 어빙 크리스톨이 창립한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는 국익에 기초한 힘의 정치를 주장했다. <포린 어페어스>의 판매부수는 약 20만 부, <포린 폴리시>는 3만 5,000부에 달했다. 반면 <내셔널 인터레스트>는 5,000~8,000부 판매됐다. 각 전문지의 영향력은 게재된 기사가 대중매체에 인용되는 빈도수에 따라 판가름 났다. 이 막강한 국제 홍보·출판 시스템은 미국의 전문가들을 각종 전략을 판매하는 장사꾼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위한 세계를 구상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랜드, 카네기, 브루킹스 연구소 등은 유럽이나 걸프만 국가, 중국 등지에 지역 센터를 거느리기 시작했고, 많은 연구원들과 외교관들이 이 연구소의 초빙을 받은 것을 은혜처럼 여겼다. 미국이 국제전략연구를 주도하면서 영미식 싱크탱크를 향한 환상이 생겨났다.(8) 심지어 유럽의 연구원들은 위기가 발생하면 종종 관련국과 직접 의논하는 대신, 미 전문가의 의견을 먼저 구할 정도가 됐다.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전문가’는 각종 위기에 이름을 붙이고, ‘전문적으로’ 위기의 본질을 평가하는 역할을 맡았다. 9・11 테러 이후, ‘국제’ 전문가, 다양한 관측기구 및 연구센터의 소장, ‘안보 전문가’ 등 온갖 용어가 붙은 전문가 세대가 등장했다. 그들은 주로 핵이나 생화학 무기를 이용한 테러 위험성을 예견했다. 9・11 테러 이후 프랑스에서는 ‘테러리즘’이란 단어가 들어간 서적이 69권, ‘빈 라덴’이란 이름이 들어간 책이 12권 쏟아져나왔다. 미국에서는 관련 서적이 무려 140권이나 출간됐는데, 심지어 테러 발생 19일 만에 세상에 나온 책도 있다.
미국에 대한 알카에다 테러 이후 일부 전문가는 순식간에 새로운 변화에 발맞추어 변신을 도모했다. 가령 전 원자력위원회 전략문제국장이었던 정치학자 테레즈 델페슈는 2002년 ‘국제 테러리즘과 유럽’에 대한 연구(9)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연구서에서 그녀는 상당히 진지하게 핵 테러 위험성을 거론했다. 핵 테러는 (실행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확실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소재다. 한편, 그녀는 월드트레이드 센터 테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뉴욕의 탄저 테러(이 맹독성 균은 미국 군 연구소에서 제조됐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피했다. 20년 뒤 그녀가 예견한 중동의 핵 확산 위험은 결국 오류로 판명 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번에도, 미디어가 ‘군부-지식인 복합체’에 얼마나 중대한 역할을 부과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푸틴은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푸틴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실상 전문지식이라곤 빈약한 ‘전문가’들이 앞다퉈 이런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 두 질문은 현재 TV 스튜디오의 호전주의를 끊임없이, 뜨겁게 달구고 있다.
글·피에르 코네사 Pierre Conesa
전 고위급 공무원. 주요 저서로는 『Vendre la guerre. Le complexe militaro-intellectuel 전쟁을 팔다. 군부-지식인 복합체』(Editions de l'Aube·5월 5일 출간 예정)가 있다.
* 본 기사는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한 글임.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Fabrice Weissman, 『A l'ombre des guerres justes; l'ordre international cannibale et l'action humanitaire 정의로운 전쟁의 그늘; 야만적인 국제 질서와 인도주의 활동』, Flammarion, 파리, 2003년.
(2) Sophie Eustache, ‘Absence d'enquêtes et bagarres de plateau, les recettes de l'information en continu 연구조사의 부재와 TV 스튜디오 싸움, 실시간 뉴스의 비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4월호.
(3) Matthieu Chillaud, 『Les études stratégiques en France sous le Ve République; approche historiographique et analyse prosopographique 제5공화국의 프랑스 전략 연구; 역사기록학적 접근법과 인적 배경 분석』, l'Harmattan, 파리, 2020년.
(4) Thierry Kellner, Thomas Bondiguel, ‘Chine: L'impact des think tanks chinois spécialisés en relations internationales sur la politique étrangère de Pékin 중국: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중국의 싱크탱크들이 중국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 diploweb.com., 2010년 6월 9일.
(5) Samuel Huntington, 『Le choc des civilisations 문명의 충돌』, Odile Jacob, 파리, 1996년.
(6) Thomas P.M. Barnett, 『The Pentagon's new map ; war and peace in the twenty-first century』, Putman Publishing Group, 뉴욕, 2004년.
(7) Renaud Corbeil, ‘L'influence des revues spécialisées sur la pensée politique américaine à la fin de la guerre froide : la déconstruction de l'ennemi soviétique, 1987~1993 냉전 말 전문학술지가 미국의 정치사상에 미친 영향: 소련이라는 적의 해체, 1987~1993년’, <Bulletin d'histoire politique>, 몬트리올, 제28권, 1호, 2019년 가을호.
(8) Stéphane Cadiou, ‘Savoirs et action publique: un mariage de raison ? L'expertise en chantier’ 지식과 공공정책 : 정략결혼인 것일까? 현재 진행 중인 평가, <Horizons stratégiques>, 파리, 제1호, 2006년 봄호.
(9) Thérèse Delpech, ‘Le terrorisme international et l'Europe 국제 테러리즘과 유럽’, <Cahiers de Chaillot>, 파리, 제56호, 2002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