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보의 위험에 처한 유엔
우크라이나, 시리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유엔(UN)은 난민구호, 식량, 의료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와 안보 수호와 같은 핵심 역할은 뒷전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54일이 지나서야 외교적 중재를 시도했다. 유엔은 시리아 내전에서 범한 과오를 또 반복할 것인가?
2022년 2월 21일 뉴욕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마르킨 키마니 유엔 주재 케냐 대사는 다른 대사들과 마찬가지로 먼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했다. 이어진 연설에서 그는 “안보리 회원국을 포함한 일부 강대국들이 최근 몇 십년간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음을 성토한다”면서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오늘 저녁 다자주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과거 다자주의가 강대국의 공격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격을 받고 있다. 이에 모든 회원국들에게 유엔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다자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힘을 모을 것을 촉구한다.”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국제 위기는 날로 심각해져서 유엔의 존재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 문제를 거의 외면하고 있다. 케냐 대사가 외교적 수사를 이용해 점잖은 언어로 지적한 바와 같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5개국(5P)은 거리낌 없이 무력 사용 금지, 내정 간섭 금지와 같은 유엔 헌장의 주요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1) 2003년 영미 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은 이런 위법 행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크게 이목을 끌지는 못했으나, 2018년 4월 13일에도 미국 프랑스 영국이 시리아의 화학무기 시설에 불법 공습을 감행했고 유엔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회원국들에게 특히 평화와 안보 문제에 관한 유엔 헌장 및 국제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 유엔헌장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확하다. 안보리는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의 책임이 있다. 이에 모든 회원국들에게 단합하여 이 책임을 다할 것을 요청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엔, 우크라이나사태에 존재가 미미해
2022년 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 민간인 수 천 명이 사망했고 피난민이 수백만 명에 달했지만, 유엔은 분노와 충격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것 같다. 안보리에서는 마치 같은 배우들이 볼품없는 영화를 반복해서 찍는 듯하다.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 알바니아가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제출했고 2월 25일 표결 결과 전체 15표 중 찬성이 11표였으나,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여 부결되었다. 결국 안보리가 국제 경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는 단숨에 사라졌다. 과거 안보리는 평화 유지를 위해 제재를 가하거나 군사적 개입을 동원하여 1991년 1월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이라크와 2011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통치했던 리비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유엔 안보리 내에서 냉랭한 대립과 시끄러운 분열은 끊이지 않고 있다. 2011년 이후 안보리는 시리아 내전의 희생자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 결의안을 단 3건만 채택했을 뿐, 평화 회복을 위한 해결방안은 도출하지 못했다. 2018년 2월 22일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 프랑스와 들라트르는 “시리아의 비극이 유엔의 묘비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 총회는 원칙적으로는 안보리가 다루는 사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평화 유지를 위한 단결’ 결의안 표결을 위해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두 전쟁을 논의하는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했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면 5P내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총회가 위기 상황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안보리만 강제적 제재를 시행할 수 있기 때문에 구속력은 없다. 2022년 3월 2일과 24일 특별총회에서 다수가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찬성했다. 그러나 이 상징적인 결과가 유엔헌장에서 명시하는 국제 경찰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대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르면서 유엔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했지만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엄숙한 척 성명을 냈을 뿐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발히 이용하는 사무총장은 트위터에 코로나 팬데믹이나 기후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언급했다. 유엔은 아미 아와드 수단 대사를 ‘우크라이나 위기 대처를 위한 유엔 중재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 유엔의 공무원은 ‘평화의 순례자’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인도주의적 지원 방안만 강구할 뿐, 유엔이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어떤 외교적 노력도, 중재 역할도 하지 않고 있다. 유엔 본연의 임무를 저버린 것이다. 심지어 아프리카연합 의장 세네갈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회담을 가졌으나, 정작 유엔은 러시아나 중국 대통령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부소장 디디에 빌롱은 “유엔이 기동력이 떨어지는 둔한 조직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최근 몇 주간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어떤 정책도 제시하지 않는 방관적 태도는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쟁 주범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도, 다자주의를 구현하고 국제관계를 조율하기 위한 방법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 공백 상태가 우려스럽다.(2)
1961년 스웨덴 출신의 다그 함마르셸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콩고 카탕가주의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 애쓰던 중 콩고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3) 물론 구테흐스 사무총장에게 이런 상징적인 인물을 본받아 위험을 무릅쓰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임자들은 분쟁 악화를 막기 위해 솔선수범했다. 부르토스 갈리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카나 학살을 일으키자 진상조사를 실시하기로 했고 이 결정은 이스라엘을 지지했던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1996년 사무총장직 재선에 실패했다. 그리고 코피아난은 1998년 영국과 미국이 이라크에 군사 보복 위협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바그다드로 직접 가서 사담 후세인과 군사시설에 대한 국제 사찰 협정을 체결했다.
국제정치와 관련한 대화가 매우 부족한 유엔
장 지글러 스위스 대사를 비롯해 유엔 내부에서도 상임이사국들만 행사할 수 있는 거부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4) 이 문제가 간단해 보이지만 유엔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1945년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시대적 배경이 유엔 창립의 동기가 되었으나, 무엇보다 이 기관은 강대국들 간 정치적 협약의 산물이었다. 이 강대국들은 유엔 전신인 국제연맹(SDN)과는 달리 새 국제기구가 실질적인 법적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데 합의했다. 대신 거부권을 행사해서 결정을 막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로 했다. 거부권이 없었다면 유엔도 없다. 그러므로 거부권을 폐지한다면 역설적으로 강대국들이 유엔에 등을 돌려 이 기관의 기반이 취약해 질 것이며 세계는 더욱 치열하고 미세한 권역으로 분열될 것이다. 물론 개혁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다른 국가에도 부여해서 거부권 보유국들 간 지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아프리카 연합과 독일, 일본, 브라질, 인도 G4가 제안) 그러나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2005년 코피아난은 안보리의 지위를 강화하고 비상임 이사국들에게 균등한 권력을 분배하려 했으나, 5P는 거부권으로 유엔헌장의 개헌 여부까지 결정할 수 있는 자신들의 권력을 고수하기 위해 코피아난의 안에 반대했다.(5)
유엔은 인도적 지원의 거대 기구에 그치는가?
사실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거부권으로 의사를 표명할 뿐 내부적으로 국제 정치에 대한 대화가 매우 빈약하다는 점이 바로 유엔의 고질적인 문제다. 시리아 내전의 경우 러시아는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진상조사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 제제를 위한 안보리 결의안에 대해 14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내막을 살펴보면 서방 국가들도 러시아의 안에 종종 반대한다. 2019년 12월 20일 러시아는 터키와 이라크 국경을 통해 시리아에 구조물품을 지원하는 기간을 1년 더 연장하자는 결의안을 거부했다.(안보리 15개국 중 13국이 찬성했다.) 중국의 지지를 받고 있던 러시아는 이 결의안이 가결된다면 시리아와 인접국가간 힘의 관계에 대해 잘못된 관점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시리아에 해를 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러시아는 다른 나라를 통해 지원물자를 운반하자고 제안했는데, 가결 정족수 9표 중 5표만 받았다. 러시아와 서방의 대립은 순전히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발생했고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의를 위해 협력하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눈감아 주려는 파렴치한 러시아와, 때로 도덕보다 정치적 관점을 내세우면서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는 서방이 맞붙은 결과였다.
1945년 유엔 51개 창립 회원국은 유엔 헌장에 이 기구를 평화와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분야 협력 등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의 노력이 조화를 이루는 곳(제 1조 4항)’으로 만들겠다고 명시했다. 이후 실제로 유엔은 탈식민지화를 주도했고 수많은 분쟁과 위기를 감시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평화 유지군은 매일 수백 만 민간인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콩고에 이르기까지 구호 활동(식량, 보건, 난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 역사학자 산드린 코트는 다자주의 체제가 냉전 시대에 동, 서구 두 블록 사이에 가교를 만들어 건설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사상이 서로 만나게 해 줌으로써 ‘철의 장막’에 구멍을 내어 ‘나일론 장막’처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6) 그런데 오늘날 강대국들은 G7, G20이나 2018년 출범된 평화를 위한 파리 포럼과 같이 자국에게 중요한 현안을 우선 해결하기 위해 ‘임시’ 조직을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산드린 코트는 냉전 시대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가 점차 지구주의(globalism)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며, 개인, 단체, 정부가 모두 경쟁에 내몰리는 중이라고 한탄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국제무대에서 패러다임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유엔은 평화와 안보는 권력놀이를 하는 강대국에게 내버려 둔 채, 인도적 지원만 담당하는 거대기구가 되는데 만족할 것인가?
제라르 아로 프랑스 전 대사는 “세력 관계는 항상 국제 관계를 형성했다. 그런데 과거에는 주요 강대국들이 합의하에 공통의 규칙을 정립하여 이 국제관계를 주도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다극화 되었지만 공통의 규칙도 언어도 없다”고 지적했다.(4월 5일 트윗) 우크라이나에서 사망자 수는 늘어만 가는데 강대국들은 서로 분열되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안보리뿐만 아니라 유엔에서 러시아를 아예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안보리의 결의가 있어야 하는데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므로 불가하고, 또 헌장을 개정해서 러시아를 제명하려면 총회 표결을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5P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불가하다. 이제 위기가 만연해졌다. 그런데 이전의 위기 때와 달리, 전 세계가 전통적인 보호감독체제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다. 즉 대부분 국가가 과거의 동맹 관계나 유대감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의견을 표명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 2건 모두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아(3월 2일 141표, 3월 24일 140표) 가결됐지만 여러 나라가 기권하거나(37표, 21표) 반대표(9표, 5표)를 던졌다. 이들 중 대부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였으며, 프랑스 정부가 지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4월 7일 총회는 결국 심각한 전쟁 범죄를 일으킨 러시아를 인권이사회에서 퇴출시켰다. 찬성이 93표로 다수였으나 반대도 24표, 기권이 58표나 있었다. 가산 살라메 레바논 대사는 “서방 국가들은 단합하면서도 독자적 노선을 취하기도 한다. 회피, 비협조, 몰이해, 무관심, 심지어 샤덴프로이데(타인의 불행을 보고 즐거워하는 악의적 기쁨)와 적의감이 이상하게 섞여있는 현상을 여기저기에서 목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3월 30일 트윗) 국제 관계가 무질서하게 얽히는 가운데, 공동 안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가장 취약한 상태이다. 이 상황에서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방관적 태도는 어처구니없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e R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편집장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L’ordre international piétiné par ses garants 국제질서 수호자의 침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2월.
(2) Didier Billon, ‘La situation internationale ouverte par la guerre en Ukraine: se parer des raisonnement binaire et du prêt à penser idélogique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주는 국제 상황 : 이분법적 논리와 사상 순응주의’, 2022년 4월 5일, www.iris-frace.org.
(3) 테러로 의심된다.
(4) <뤼마니테>, 2022년 3월 23일.
(5) ‘Dans une liberté plus grande. Développement, sécurité et respect des droits de l’homme pour tous 더 큰 자유 안에서. 모두를 위한 개발, 안보, 인권’, 2005년 3월 24일. http://www.un.org/french/largerfreedom/summary.html
(6) Sandrine Kott, 『Organiser le monde. Une autre histoire de la guerre froide 세계를 조직하라. 냉전의 또 다른 역사』, Seuil, 파리,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