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은 어떻게 홍콩을 흡수했는가

2022-05-02     마리프랑수아즈 르나르 | 클레르몽오베르뉴대학교 명예교수

홍콩이 억눌리고 있다. 반체제인사들은 대부분 감옥에 있거나 망명 중이다. 현 캐리 람 행정장관의 후임자로 오는 7월 취임할 것이 유력한 존 리 후보는 다름 아닌 전 보안장관으로서 시위 진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홍콩은 약해져가는 특수성으로 중국의 정치적 의지에 맞설 수 있을까?

 

지금까지 상업 면에서나 금융 면에서나 세계 경제에서 홍콩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통하는 문 역할을 해왔다. 1997년 7월 1일, 영국이 중국에 반환한 뒤 특별행정구가 된 홍콩은 여전히 중국 부호들의 자금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 홍콩의 인구당 GDP는 미국에 버금가며 기대수명이 높고(1), 비즈니스 환경이 우호적이며, 해외로의 접근이 용이하여 특례 지구처럼 여겨진다. 홍콩은 또한 뉴욕과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의 국제금융중심지이다. 

중국은 1979년 개혁과 경제개방 초기부터 홍콩과의 긴밀한 관계를 중심으로 개발 모델을 구축해왔다. 경제개발에 있어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금 감면 또는 면세, 낮은 관세, 자유로운 해외 송금 등 외국 기업들에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경제특구 조성에 중점을 두었다. 첫 번째 경제특구가 홍콩에 인접한 어부들의 마을, 광동의 선전에 조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전은 새로운 정책을 시험하고 노하우를 체득하면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중국, 홍콩을 중국 동남부와 묶는 국가계획 수립

주권반환 이전부터 홍콩은 이미 중국 전략에 통합되어 있었다. 홍콩이 점점 통과무역을 발전시킨 이유는 자국 내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생산의 일부를 가까운 광동지역으로 이전하였으며, 또한 홍콩의 항구가 당시 중국 항구들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수용능력도 크기 때문이었다. 홍콩 사업가들은 개혁 당시 계획경제의 일환으로 수출을 상사(商社)에 맡겨 판매자와 외국 구매자 간의 어떠한 접점도 없었던 중국 본토 생산업체들에게 그 경험을 전수하였다.

또한 1983년부터 홍콩의 통화 체제는 본토의 그 어느 도시도 갖지 못한 강점으로 대두되었다. 홍콩달러(HKD)와 미 달러 사이에 고정환율(혹은 ‘페그’)을 도입한 것을 말한다. 태환성이 완벽하고 미화에 가치가 고정되어 있어 금융 안정성이 보장되며 투자자들의 신임을 얻는 동시에 중국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제도 덕분에 여러 금융위기를 견뎌내고, 외환보유액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인 GDP 대비 135% 까지 쌓을 수 있었다.(2) 현재 홍콩은 중국 통화인 인민폐(위안)를 중국 본토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위안의 경우 부분적으로만 태환 가능하기 때문에 중국이 세계금융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홍콩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가 발전함에 따라 중국은 국경을 폐지하고 홍콩의 특수성을 지우려 한다. 영토를 통합시킬 목적으로 홍콩특별행정구를 중국 동남부와 묶는 국가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는 주강 삼각주 지역에 고도로 도시화 된 최첨단 기술 구역을 건설하고자 2018년 공식적으로 착수한 ‘대만구(大灣區)’ 프로젝트의 명백한 목표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9개 도시(선전, 광저우, 둥관, 포산, 중산, 주하이, 장먼, 후이저우, 자오칭)는 물론 홍콩과 마카오가 연결된다. 

이를 위해 광저우-선전-홍콩을 잇는 고속열차가 홍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8년 9월 말 개통되었다. 서구룡역에 중국 세관과 이민국을 공동 배치하기 위해 중국에게 영토의 일부를 내어주고, 홍콩과는 매우 상이한 본토의 법을 적용하는 본토 관리들이 주재해야 했다.(3) 그로부터 한 달 뒤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가 개통되어 주하이(광둥성의 경제특구)와 마카오, 홍콩을 연결했다. 경제적 수익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 이익만은 확실하다.

 

중국 대도시의 역량 강화로 특수성이 약화된 홍콩 

디지털 경제 부문에서도 동일한 통합 의지가 보인다. ‘동수서산(东数西算)’ 프로젝트는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중국 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양질의 데이터를 빈곤하지만 광활한 서부 도심지로 이전하여 처리하고 저장(4)’할 수 있는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자 한다. 지난 5월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각각의 데이터 처리망을 지닌 8개의 센터 건설을 승인하였다. 그 중 하나는 대만구를 담당하여 광둥성과의 통합을 강화할 것이다. 

이렇게 홍콩특별행정구의 특수성을 약화시킨 결과, 중국 대도시의 역량은 크게 증가했다. 2004년에만 해도 세계 최대 컨테이너 항구를 자랑하던 홍콩이 2020년에는 상하이, 선전, 닝보-조산, 광저우, 칭다오, 톈진에 밀린 채 9위로 떨어지고 말았다.(5) 칭다오가 아시아 최초의 자동화 항만이 된 반면, 홍콩항은 원격조종 타워크레인을 갖춘 터미널이 9개 중 하나에 그쳐 현대화에도 뒤처졌다.(6) 따라서 중국은 더 이상 홍콩항을 꼭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런던을 앞질러 세계에서 국제선 취항을 가장 많이 하는 도시가 된 상하이는 이제 여러 분야에서 홍콩을 앞섰다. 상하이는 발전과 동시에 1949년 마오쩌둥 취임 당시 중국을 떠났던 기업가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1980년대 초반 상하이로 돌아와 사업을 재개했다. 상하이와 선전의 GDP가 점차 홍콩을 앞질러 2021년 상하이 5,693억 유로, 선전 4,270억 유로에 달한 반면, 홍콩은 3,185억 유로에 그쳤다. 

특히 최근까지 홍콩의 강점으로 대두되었던 금융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도 도시 간 경쟁양상이 뚜렷하다. 홍콩은 금융개발 부문에서 5위에 머무르며(7) 4위 상하이에 역전 당했다. 금융에 접목한 신기술(핀테크) 분야에서는 상하이와 선전이 앞질렀다. 이 분야는 3대 중국 기업인 알리바바, 바이두, 텐센트가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각 기업 및 개인 대출 서비스와 전자결제를 담당하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금융시장에서 중국 대도시들의 비중은 점차 커질 전망이다. 

통합이 진행될수록 중국 본토의 금융 분야 품질이 향상되고 있다. 중국 내 외국인 투자자 절반 이상이 홍콩을 거쳐 가며, 본토 기업 역시 홍콩에서 가장 많이 상장된다. 그들 중 홍콩에 자회사를 설립한 기업도 많다. 2014년부터 상하이 증권거래소와의 연계, 본토 채권시장에의 접근성, 그리고 대만구 9개 도시 거주자들에게 직접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권한 등 국경을 넘나드는 경로들이 개발되면서 홍콩 은행권과 중국 금융시장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중국은 점진적 통합과 동남부 지역의 발전에 힘입어 물류, 무역, 기술 부문에서 홍콩을 따라잡는 데에 그치지 않고 쟁쟁한 경쟁상대가 되었다. 2020년 홍콩 경제는 경제활동 인구 과반수가 사용하는 서비스 분야로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역동적인 금융·주식·채권 시장을 내세운 금융서비스와 더불어 관광, 수출입, 물류, 항공수송도 발전했다. 건설업 등 일부 분야는 중국 기업들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영화산업의 경우 어떨까?

또한 중국 정부는 학위와 직업면허(의료인, 법조인 등)를 상호인정하고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정책을 통해 균등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걸림돌이 많다. 1997년 홍콩대학교의 조사(8)에 따르면 주민 5명 중 1명이 스스로를 ‘홍콩인 보다는 중국인’이라 여기며, 2006년에는 그 비율이 심지어 3명 중 1명꼴이었다. 하지만 2019년 6월 동일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6명 중 1명꼴로 줄었다. 중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특히 18-29세의 젊은 층에서 두드러진다.

 

홍콩보안법 도입이후 홍콩 인구 감소세

그렇지만 장-피에르 카베스탄 교수와 에릭 플로렌스 교수가 언급하듯 “730만 홍콩 인구 중 100만 명 이상(즉 홍콩인 7명 중 최소 1명)이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으며, 가정 내에서 광동어(영어와 더불어 홍콩의 유일한 공식 언어)보다 만다린어(보통화)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국 본토에 거주하고 일하는 홍콩인의 수는 점점 늘고 있다.”(9) 홍콩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본토에 가까워지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멀어지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뚜렷해졌다.

한편 2020년 6월 30일 보안법이 통과되면서 법치주의와 지도자 직접 선출이라는 홍콩인들의 주요 요구사항 두 가지가 좌절되고 통합이 가속화되었다. 홍콩보안법은 주권 반환 시 약속한 ‘높은 수준의 자주권’을 종결시켰다. 그렇게 중국 정부는 2047년까지 유지하기로 했던 ‘일국양제’의 규칙을 어겼다.

홍콩보안법 도입과 동시에 상당수의 민주주의 수호자들이 체포되었다. 수많은 시위도, 200만 명이 모인 2019년 6월 평화 행진도, 중국의 결정을 굽히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2020년 4월부터 왕지민 홍콩 주재 중국연락소 수장이 “‘양제’가 ‘일국’에 저항하는 수단이 된다면 ‘양제’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공표했다.(10)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

탄압이 시작되자 옛 지배국이었던 영국이 신속하게 비자를 내주어 수많은 이들이 이주했고 싱가포르,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로 떠난 이들도 많다. 2020년 처음으로 홍콩 인구가 감소했다.(2019년 대비 0.3% 감소)

새로운 정책은 시민들에게도 명백히 영향을 미친다. 정부에 대해 비판하거나 시위에 참가하려면 수감될 각오를 해야 한다. 모든 정보는 검열당하고 공산당이 모든 면에서 주민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 

 

홍콩기업에 대한 중국의 통제와 압박 심해져

 

영화산업이 특히 발달한 홍콩의 예술창작 활동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점차 중국 본토와 동일한 기준이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비판과 성적인 컨텐츠가 금지되고 폭력적인 장면도 검열 대상이다. 일부 영화인들은 분명 대만 등지로 떠날 것이다. 남은 자들은 중국 감독이 하듯 우회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검열을 교묘히 피해가며 베이징과 타협하려 할 것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유로 재정 지원을 받는 것도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창작 활동은 지속되겠지만 수많은 예술가들이 추방당할 것이다.

자유의 상실과 감시, 법치주의 침해가 홍콩의 경제적 특수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질서가 재확립되자 불확실성을 기피하는 은행권과 금융권은 오히려 안심했고 홍콩 대부호들은 베이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기업에 대한 중국 정부의 통제가 심해지는 것은 부정적인 신호이며 이로 인해 비즈니스에의 개입이 우려되고 해외 기업들이 떠나갈 수도 있다. 민주적인 공간은 나날이 축소되고 있다. 지미 라이 대표가 ‘외국 영향에 조종당한’ 이유로 구금된 이후 2021년 6월 애플 데일리 신문이 폐간되었고, 온라인 미디어 스탠드뉴스도 몇 개월 후(12월) 편집장과 여러 기자들이 체포되자 문을 닫음으로써 정부의 강경함이 드러났다. “중국 지도자들은 민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으며 (2009년 발생한) 운동은 홍콩을 독립시킴으로써 공산당을 불안정하게 하려는 미국이 일으켰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중국학자 장-필립 베자가 말했다.(11)

캐세이퍼시픽 항공사의 사례를 보면 정보라는 상당히 민감한 분야 이외에의 기업들도 베이징의 압박을 피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위에 참가했던 직원들이 해고당한 것이다. 주 홍콩 미국 상공회의소(AmCham)가 2021년 5월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응답기업의 42%가 출국을 고려했다. 2022년 발표된 다른 조사에 따르면 10개 기업 중 8개가 국가보안법에 영향을 받았으며, 절반 정도가 직원들의 사기가 영향을 받았고 직원 이주로 인력을 잃었다고 답했다.(12)

이에 더해 홍콩이 팬데믹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주재원 사회가 크게 타격 받아 많이들 떠나거나 권위적인 대책으로 인해 떠나고 싶어 했다. 그들의 복귀를 정치적으로 촉구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반대주의자들과 외국 거주민 일부가 떠남에 따라 인구 구성과 경쟁력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이제 홍콩의 미래에 치명적인 ‘두뇌유출’을 염려할 지경이 되었다. 물론 홍콩 부동산에 접근 가능한 중국 부호들을 매혹하는 여러 건설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이로써 호화스러운 대도시이자 빈부격차가 가장 극심한 도시로서의 지위가 강화될 것이다.(박스 기사 참조)

사실상 현재로서 홍콩의 주요 강점은 달러에 고정된 환율이다. 이 특징으로 인해 인민폐 국제화 프로젝트의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다. 금융 상품에 대한 전문성과 세계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홍콩은 역외 위안화 개발에 있어 세계적 선두에 섰다. 중국이 자본을 이전보다 자유화 했다 할지라도, 중국 자본계정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개방되지 않은 편에 속한다. 2013년 상하이 자유무역구 출범만으로는 부족하다. 위안화가 부분적으로만 태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홍콩과 여전히 비교불가하다. 

 

홍콩의 영국식 사법제도에 중국의 개입 가능성 커져 

디지털 위안화 개발을 위해 중국 중앙은행과 홍콩 금융당국이 연합하여 국가 간 사용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홍콩 통화와 미국 달러 간 고정환율의 철폐를 의미하는 중국 경제로의 완전한 통합은 위안화가 국제 통화 지위를 갖지 않는 한 실현되기 어렵다. 세계 외환보유고의 2.45%에 불과한 위안화가 국제 통화로 인정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세계적으로 자율성을 증대하려는 중국 본토를 제외하고는 홍콩의 역할이 효율성과 매력을 잃었다. 기존에 법치주의가 존재했기에 기업들은 영국의 관습법을 본뜬 홍콩의 사법제도를 신뢰할 수 있었다. 홍콩의 최고 법원인 최종 항소법원은 주권 반환 당시 설치되었다. 재판소는 홍콩 판사 9명(상임 3명, 비상임 6명)과 관습법을 따르는 다른 관할구역 출신(주로 영국) 비상임 판사 11명으로 구성되었다. 2020년까지 몇 가지 특수 법률을 제외하고는 중국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국가 안보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할 경우 중국 사법기관이 개입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와 국가에 대한 비판이 범죄로 여겨지게 됨에 따라 최종 항소법원에서 두 명의 영국 판사가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추가 사임이 잇따르면 홍콩의 매력이 더욱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홍콩 특혜는 끝이 나는가? 반체제 인사의 도피처, 학생과 중국 본토인을 위한 개방 공간, 그리고 기업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 환경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홍콩은 중국에게 필수적인 주요 금융센터이다. 중국의 국제 전략의 핵심에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날지언정 영영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글·마리프랑수아즈 르나르 Mary-Françoise Renard
클레르몽오베르뉴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세계 경제 속의 중국, 종속과 지배 사이(La Chine dans l’Économie mondiale, entre dépendance et domination, Presses Universitaires Blaise Pascal 출판사, 2021)>의 저자

번역·안해린
번역위원


(1)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0년 인구당 GDP는 홍콩 6만 2,500달러, 미국 6만 4,610달러, 중국 본토 1만 7,090달러였으며, 동년 기대수명은 홍콩 85세, 미국 79세, 중국 77세였다. 
(2) Bruno Cabrillac, Camille Macaire, Marie-Elisabeth de la Serve, ‘La singulière résilience du régime de change de Hongkong 홍콩 통화 체제의 독특한 회복력’, 프랑스은행 회보, n° 239/4, Paris, 2022년 1-2월호. 
(3),(9) Jean-Pierre Cabestan, Éric Florence, ‘Vingt ans après la rétrocession 주권 반환 20년 후’, <Perspectives chinoises>, n° 2018/3, Hongkong. 
(4) Celia Chen, ‘China's digital economy : Network of data centre hubs to address infrastructure imbalance between East and West’, <South China Morning Post>, Hongkong, 2021년 5월 27일.
(5) Adeline Descamps, ‘Panorama des 25 premiers ports à conteneurs mondiaux en 2020 세계 25대 컨테이너 항구 파노라마 2020’, <Journal de la marine marchande>, Metz, 2021년 2월 17일.
(6) ‘Hongkong, un centre logistique en déclin 쇠퇴하는 물류 기지, 홍콩’, 주 홍콩 프랑스 총영사관, 2020년 2월.
(7) The Global Financial Centres Index 30, 2021년 9월.
(8) ‘Almost nobody in Hongkong under 30 identifies as Chinese’, <이코노미스트>, London, 2019년 8월 26일. 
(10) Frédéric Keck이 인용, ‘Hong Kong : la fin du principe Un pays, deux systèmes 홍콩: 일국양제 원칙의 종말’, <The Conversation>, 2020년 5월 27일.
(11) Jean-Philippe Béja, ‘La fin de Hongkong ? 홍콩의 최후?’, <Esprit>, Paris, 2020년 7-8월호. 
(12) <AmCham Hongkong business sentiment survey report>, 2022년 1월.

 

 

중국에 예속된 홍콩의 운명, ‘바람 앞에 등불’ 

 

중국이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1842년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했다. 제2차 아편전쟁에 이은 1860년 베이징조약 당시에는 중국이 홍콩 북부의 구룡반도를 할양했다. 1898년 중국과 영국 간 홍콩 경계 확대 조약을 통해 홍콩과 구룡반도 일대 섬을 포함한 ‘신계 지역’을 99년간 장기 조차하기로 계약 맺었다.

따로 분리할 수 없는 한 세트 같은 이 지역은 1984년 중국의 덩 샤오핑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서명한 중영공동성명에 명시된 대로 1997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홍콩이 첫 번째 특별행정구가 되었고, 1999년 포르투갈이 반환한 마카오가 두 번째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그 대신 중국은 경제 및 사법 제도(관습법)를 2047년까지 50년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실제로 반환 이후부터 홍콩은 기본법을 집행하고 있다. 홍콩의 헌법 격인 기본법은 1980년대 말 중국 및 식민지 정부 대표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홍콩 기본법은 기본적 자유 존중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본토의 사법권과 완전히 차별성을 갖는다. 입법부는 ‘레그코(LegCo)’라 불리는 의회이다. 60석 중 절반은 직선제로 선출하고 나머지 절반은 직능 대표로 구성된다. 행정부를 이끄는 수반은 각계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선출하는데, 선거인단의 대다수가 친중 성향이다. 이렇게 선출된 자를 중국이 5년간 공식 임명한다. 보통선거제 도입이 홍콩 민주당의 목표였다. 2007년 중국은 2017년부터 보통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 정부가 보통선거를 거부한 2014년 이후 시위가 급격히 확대되었고(1)  2019년에는 시위대가 전례 없는 규모를 이루었다. 거리에서 시위하는 홍콩인 뿐 아니라 반대의견을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이들이 무수히 체포되었다. 시위의 동기는 여러 가지였는데 정치적 요인은 물론이고 경제적 요인도 있었다. 홍콩은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다. 소득 분배의 불공정성을 측정하는 지니계수(2)가 2018년 미국 0.414, 중국 본토 0.385(2016년 기준)인 데에 반해 홍콩은 0.539였다. 2021년 부동산 가격은 세계에서 가장 높아(3) 국민 대다수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4)

정치상황이 악화되는 와중에 2020년 6월 30일 중국이 국가보안법을 공포했다. 개인의 자유 보장과 법치주의는 끝났다. 이제 ‘국가 분열’, ‘국가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의 네 가지 범죄는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이로써 중국 정부는 본토의 비밀경찰과 법원을 사용하여 영토 내 모든 반대세력을 박살낼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1) Martine Bulard, « Colère à Hongkong, poudrière géopolitique(한국어판 제목: 홍콩의 분노, 지정학적 화약고) »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9년 9월호.
(2) 0(완전평등)에서 1(완전불평등) 사이의 값을 가진다.
(3) 2022 Demographia International Housing Affordability, 2022년 3월. 
(4) Lire Jean-Jacques Gandini, « Le logement, une bombe sociale(한국어판 제목: 반환 20주년, 홍콩을 압박하는 중국)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