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전망, ‘제국’을 참조하라

2011-12-09     제인 버뱅크 & 프레데릭 쿠퍼

전후에 형성된 지정학적 구도가 흔들리고 민족국가들이 시장의 압력에  굴복하는 이때, 국가 지도자들은 안정적 체제를 꿈꾸고 있다. 과거, 제국 속에 형성된 정부들은 놀라운 유연성으로 역사적 변화에 적응하며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우리는 왜 ‘제국’(Empire)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민족국가(Nation State)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자신만의 국기와 우표, 제도를 가진 국가들이 유엔 회원국으로서 버젓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나 600년 동안 존속한 오스만제국, 수천 년간 대물림한 중국 왕조들과 비교해보면 ‘민족국가 시대’는 인류 역사 속에서 마치 일시적 일탈 시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최근까지 진행 중인 분쟁들- 르완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옛 유고연방, 스리랑카, 코카서스, 이스라엘 등- 은 1918년, 1945년, 1989년 차례로 몰락한 제국들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체제를 고안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 보여준다.

민족국가 시대는 찰나적 역사

그렇다고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이미 몰락한 영국령 인도제국이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현대의 정치적 성찰 기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제국’ 혹은 ‘식민지주의’라는 용어 역시 현대의 지정학적 분석 틀로 적절하지 않다. 타국에 대한 미국과 프랑스 등의 개입을 비판할 때 이 용어들은 자주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과거 혹은 최근에 존재했던 제국들에 대한 연구는 현 세계의 뿌리를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 정치권력의 조직 방식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민족국가 개념은 ‘하나의 국민, 하나의 영토, 하나의 정부’라는 단일성의 허구(Fiction) 위에 구축된다. 반면 제국은 공간을 가로질러 확장하는 권력에서 탄생하며 다양성 위에 구축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는 제국은 이중의 길항관계 속에 놓인다. 한편으로,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실 속에서 다양한 민족이 살아가는 영토에 대한 통제 범위를 확장하려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는 팽창주의를 낳는다.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민족을 복속시킴으로써 성립하는 제국의 성격상 분리주의적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런 역학관계를 통해 우리는 제국이 지속하고, 분열하고, 재구성되고, 몰락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양한 인간집단을 통치하기 위해 각 제국은 수많은 방법론을 고안했다. 어떤 제국들은 그 전에 존재한 제국 혹은 경쟁자들의 전략을 차용했다. 오스만제국은 터키·비잔틴·아랍·몽골·페르시아의 전통을 혼합하는 데 성공했다. 다종교의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은 종교 공동체들을 동화시키거나 파괴하는 대신 그 엘리트들을 포섭했다. 몇 세기에 걸쳐 대영제국은 통치하는 영토만큼이나 다양한 통치 방식(자치령·식민지 등)을 동원했다. 인도는 동인도회사에 의해 지배됐고, 이집트는 보호령이라는 미명하에 통치됐으며, ‘자유무역을 앞세운 제국주의’가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장됐다. 다양한 통치 방식을 익힌 제국들은 모든 지역을 하나의 메커니즘에 따라 동화시키거나 통치하는 대신 각 지역의 상황에 맞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단일성’이라는 허구 위에 구축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는 각 제국의 방식을 살펴보면 서로 다르면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몇 개의 기본 도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제국에서는 각 민족의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인정하는 ‘차이의 정치’가 실현됐다. 반면 다른 곳에서는 토박이들과 이른바 ‘야만적’이라고 간주된 외부 유입 요소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졌다. 13~14세기 몽골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차이를 자연스럽고 유익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불교·유교·도교·이슬람의 번영을 보장해주었고, 아랍·페르시아·중국 문명의 예술과 과학 발전을 장려했다. 반면 로마제국은 혼합적이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한 단일한 문화 위에 구축됐다. 처음엔 로마의 시민권 획득이 유인책이 되었다면 나중에는 국교로 선포된 기독교가 통합 원리로 기능했다.

각 제국은 이 두 가지 경향을 통해 발전했다.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제국은 두 경향이 결합된 형태였다. 19~20세기 아프리카에 진출한 유럽 열강은 서구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동화주의적 접근 방식과 식민지 엘리트들을 통한 간접통치 방식 사이에서 고민했다.

유럽인들이 스스로 선언한 ‘문명화 임무’는 때로 당시 광범위하게 확산된 인종주의적 이론과 충돌했다. 타민족과 타문화에 대해 그들이 상상하는 이미지와 무관하게 당시의 지배자들이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매개자들’을 통해 피지배 사회의 지식과 역량, 권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배자들과 협력함으로써 이익을 꾀하려는 지역 엘리트들이 이 매개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기존 사회에서 주변화된 인물들은 더욱 강한 권력에 복종하는 편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국에서 건너온 식민지 개척자와 하급 관리들도 이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했다. 제국의 효과적인 통치는 이 매개자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의 내적 길항이 낳은 다양성

다른 한편에서는 정반대의 전략이 활용됐다. 노예나 출신 공동체에서 소외된 인물을 지배자 위치에 앉힘으로써 제국의 주인들은 그들의 생존과 안녕에 대한 결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통치 방식은 아바스왕조와 오스만제국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다. 고위 관리들은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가족을 떠나 술탄 곁에서 성장하며 충성심을 키웠다.

이론적으로 유럽 제국들은 개인에 대한 권력 위임을 관료기구로 대체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광대한 아프리카 대륙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현지 관리들은 자주 ‘오지의 왕’을 자처했다. 정부는 족장이나 경호원, 통역사 등을 선발했지만 이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했다.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매개자는 필수적인 만큼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본국 출신자, 식민지 출신 엘리트, 하급 관리 모두 호시탐탐 권력을 노렸다.

지배하되 타협했던 통치 전략

이 매개자들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권력구조 안에 존재하는 수직적 관계- 지배자·대리자·피지배자 사이의 관계- 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연구방법론은 민족적·계급적 유사성에 기초한 수평적 접근 방식을 선호하는 오늘날 자주 간과된다.

제국의 건설자들과 지역 엘리트들은 제한적이지만 유연한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가령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무함마드는 일신교를 확립함으로써 ‘하나의 제국, 하나의 신, 하나의 황제’라는 강력한 모델을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제국의 황제는 진정한 신앙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가 득세하면서 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각 제국은 스스로 정의와 도덕의 보증인을 자처했다. 그러나 때로는 자가당착에 빠질 때도 있었다. 16세기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가 아메리카 원주민 편을 들었을 때,(1) 19세기 대영제국에서 노예해방운동이 벌어졌을 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인민이 민주주의가 유럽 대륙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프랑스의 ‘문명화 임무’를 촉구하고 나섰을 때가 그러했다.

제국을 그 ‘변천 과정’ 속에서 연구하는 것은 동어반복적인 기존 관점, 즉 서로 구별되는 시대의 연속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관점과는 다른 차원의 분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15세기부터 시작된, 우리가 이른바 ‘유럽의 팽창’이라고 부르는 시기는 유럽인들의 내재적 본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특수한 정세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당시 서유럽의 분열된 정치체들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강력하게 통합돼 있던 오스만제국은 엄청난 부를 소유한 중국 및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 그리고 나중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왕실은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영토를 우회할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동시에 자국 대상인들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이런 노력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대륙의 만남이라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제국들 간 관계’ 측면에서 조명할 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8세기 유럽의 혁명과 19세기 아메리카의 혁명이다. 프랑스령 산토도밍고섬,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북미, 스페인의 식민지인 남미에서 발발한 혁명은 처음에는 제국 내 분쟁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제국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해체 때마다 반복됐던 ‘민족청소’

19세기와 20세기에는 새로운 체제(독일, 일본, 소비에트연방)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팽창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기존 제국들은 모든 자원과 인민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친다. 20세기 들어 제국이 민족국가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오스만의 지배와 합스부르크의 통치를 차례로 경험한, 다민족의 남유럽인들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다양한 형태의 ‘민족청소’를 자행했다. 이는 1870년, 1912~13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기존 제국이 해체될 때마다 발칸반도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졌던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이 자신이 살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그럼에도 민족을 국가의 경계로 삼으려는 노력은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 또 한 번 발칸반도는 민족청소의 무대가 되고 만다. 1994년 발생한 르완다 학살 역시 포스트 제국 시대에 단일한 자치 민족국가를 형성하려는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동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해체된 오스만제국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같은 영토를 둘러싸고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적 분쟁이다.

각각의 제국이 그려온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의 강대국들과 만나게 된다. 중국을 예로 들면, 두 세기가 넘는 제국의 역사 속에서 서구 열강의 부상으로 잠시 쇠퇴기를 맞은 19~20세기는 극히 짧은 휴지기에 불과했다. 공화주의와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에도 중국 지도자들은 13세기 원나라가, 17세기와 20세기 청나라가 확정한 국경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재의 중국 지도자들은 과거의 왕조와 그 제국적 전통을 참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과 서구 국가들의 관계는 역전됐다. 서구인들에게 비단과 도자기를 팔던 중국은 이제 공산품을 수출하고 있으며, 엄청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미국과 유럽의 채권국으로 부상했다. 티베트 독립운동이나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분리주의 득세(2)는 과거 중국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현상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지도자들은 지역 토호들을 통제하면서 다양한 민족을 통치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도전에 맞서, 중국 정부는 과거 제국의 노하우를 활용하면서 현재의 지역적 분쟁을 중앙권력 강화의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옛 제국 노하우 빌리는 오늘의 중국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의 형성과 해체 과정 역시 같은 맥락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현지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이 매개적으로 통치하는 공화국 형태를 장려하던 모스크바의 전략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주권 창출을 위한 협상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비에트연방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러시아연방은 명시적으로 다민족 국가를 표명한다. 1993년 제정된 헌법을 보면 각 공화국은 러시아어를 ‘러시아연방 전체의 언어’로 인정하는 동시에 고유의 언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할 권리를 가진다.

짧은 휴지기를 지나, 블라디미르 푸틴과 그의 추종자들은 차르 시대 러시아 제국의 통치 관행을 다시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산업귀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종교 통치를 강화하고, 언론을 입막음하고, 집권당에만 유리한 ‘민주독재’를 위해 선거제도를 바꾸고,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해 공화국 지도자들의 충성을 유도하고, 국경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둘러싼 새로운 정세 속에서 러시아 제국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은 강대국들 중 가장 혁신적인 통치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 유럽 통합에 대한 찬반 논쟁은 샤를마뉴에서 샤를 캥과 나폴레옹을 거쳐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를 관통해온 주제였다. 유럽 제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을 겪고 식민지를 잃으면서 비로소 서로 간의 끝없는 반목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럼에도 1960년대까지 프랑스와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좀더 합법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제국의 경연장에서 쫓겨난 독일과 일본은 국민국가로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번영을 누렸다.

국가연합의 실험장, 유럽

1950년대와 90년대, 제국 경영의 부담에서 놓여난 유럽 국가들은 서로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행정과 규제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국가 연합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한때 수백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걸고 사수하려고 했던 유럽 국가 사이의 국경에서 검문소가 사라진 풍경을 보면, 셴겐 지역 창설을 하나의 진보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권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국경 통제는 이제 EU 외곽 경계선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제국 확장을 위한 호전적 야망에서, 식민지를 잃은 민족국가의 형성을 거쳐, 국가 연합 창설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어진 유럽의 변화 과정은 개별 주권의 조합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민족국가 개념이 제국 시대의 주권 개념을 넘어선 게 최근의 일임을 상기시킨다.

2001년 9·11 사건 이후, 전문가들은 ‘미 제국’이라는 개념을 앞세웠다. 이 개념을 통해 어떤 이들은 미국의 오만한 대외정책을 고발했고, 또 어떤 이들은 평화와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미국의 노력을 칭송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국적 전략을 어떤 식으로 취사선택해 사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은 자주 강권에 의존해 여러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심지어 영토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식민지 지배는 시도하지 않았다. 미국의 애국주의는 제국의 변천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이미 1776년 토머스 제퍼슨은 영국의 식민지배에 반항하는 지역들이 ‘자유의 제국’을 형성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그들이 추구한 체제는 차이를 통해 다스리는 로마제국의 통치 원리와 흡사했다. 미국은 각 시민들에게 평등과 재산권을 보장했지만 원주민과 노예들은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런 원칙이 미 대륙 전체로 확산되면서 유럽인의 후손인 미국인들이 자원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노예해방을 둘러싼 분쟁으로 잠시 주춤하던 미국은, 그 뒤 전세계의 문제에 개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위치에 오르게 됐다.

현대에 적합한 주권 형태는 무엇?

제국의 형태는 항상 다른 통치 형태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주 길항관계에 놓이면서- 결정됐다. 각 제국은 재화와 자본, 인간과 이념의 순환을 촉진하는(혹은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대부분의 제국은 폭력적 과정을 통해 구축됐다. 식민지 정복에 앞서 착취와 문화적 동화, 굴종이 강요됐다. 이런 과정은 강력한 정치제도를 구축하는 동시에 피지배자들에게 엄청난 인간적 고통을 강요했다. 그러나 제국적 맥락에서 탄생한 민족국가 개념이 충분히 효과적이라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그 예로, 근동과 여러 아프리카 지역에서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제국 이후’를 향해 험난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주권은 서로 동등하다는 환상과 달리 현실은 국가 간 평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제국을 생각한다는 의미는 이미 지나간 시대를 복원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권력이 작동하는 다양한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도움이 된다. 제국이 민족국가로 불가피하게 전환되는 과정으로 역사를 정의하는 관점과 단절할 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는 더 폭넓은 시각을 획득할 수 있고, 불평등과 다양성으로 정의되는 현대 세계에 적합한 주권 형태를 모색할 수 있다.

/ 제인 버뱅크 Jane Burbank & 프레데릭 쿠퍼 Frederick Cooper  미국 뉴욕대학 교수·역사학
<역사 속의 제국들: 권력과 차이의 정치>(Empires in World History: Power and Politics of Difference·프린스턴대학 출판부·2010)의 공저자.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스페인 출신의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1474~1566)는 스페인령 식민지 주민들의 참상을 고발했다. 그러나 제국 권력에 ‘인간적’ 얼굴을 부여함으로써 그 지배를 영속화하려 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2) 마르틴 뷜라르, ‘위구르 사태, 중국 대륙에 도미노 되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