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파라오에 건 미래

오벨리스크, 미라, 석관, 자본의 투자

2022-05-02     레아 폴베리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 정권은, 명망 높은 고대 이집트의 업적을 무한한 권력의 상징으로 이용하고 있다. 주요 외화 수입원인 문화유산은 이집트의 인권 유린에 대한 해외의 비판을 잠재우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카이로 도심과 공항을 잇는 오루바 고속도로에 줄지은 대형광고판. 이곳에 스핑크스, 미라, 투탕카멘 그리고 피라미드에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오버랩된다. 시시 대통령은 이집트의 상징인 고대 유물의 홍보대사다. 2021년 4월 3일 진행된 ‘파라오의 황금 퍼레이드’(1) 당시에도 미라 22구를 이집트 문명 박물관으로 이전하는 행사의 시작을 대통령이 열었다. 해외 여행객들을 이집트로 재소환하기 위한 이 행사는 400여 개 외국 방송사를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됐다. 그러나 카메라에 잡힌 대형 광고판들은,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가는 도로를 따라 뒤죽박죽 늘어선 낡은 무허가 가옥들과 비참한 현지의 실상을 가리고 있었다. 웅장한 모습의 퍼레이드는 TV화면을 위한 것이지, 현지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도로 접근도 막아버렸다.

행사는 ‘관광’이라는 핵심 주제를 담고 있었다. 이집트 국내총생산(GDP)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외화 수입원 1위였던 관광산업이 2011년 혁명(30년간 장기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어낸 이집트발 민주화 시위-역주) 이후, 그리고 관광지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들 때문에 추락했다. 경제를 다시 위태롭게 만든 코로나19 사태가 없었다면, 이집트는 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8~2019년, 관광산업은 다시 활기를 띠고, 혁명 이전과 동일한 수준인 1,260만 달러라는 수입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정부는 박차를 가해 카이로 도심 재개발, 룩소르 유적지 정비, 신도시 및 기념박물관 건립, 화려한 행사 개최 등 관광업 회복을 위해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고대 이집트의 상징들을 앞세웠다. 이집트는 현대화를 이뤄내면서도 천년의 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나라다. 이집트의 목표는 관광객을 비롯한 새로운 투자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그에 더해, 지난 10년간 발생한 정치적 문제 특히 시시 대통령 정권에서 벌어진 탄압과 불법체포, 인권침해 등으로 얼룩진 이미지를 쇄신하는 것이다.(2)

이집트 정부의 전제 정치에 어울리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이집트학’일 것이다. 이집트학은 집단의 상상 속에 이집트라는 환상을 심어주며 국제무대에서 이집트 정치 체제의 명예회복을 위한 최고의 외교수단으로 쓰인다. 로큰롤 하면 미국을, 판다 하면 중국을 떠올리듯 오벨리스크와 석관의 나라는 이집트다. 문화재가 꿈을 파는 것이다. 이집트가 문화재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활용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1805년에서 1849년까지 이집트의 현대화를 이끌었던 무함마드 알리 총독 시절부터 이런 전략이 쓰이기 시작했다. 총독은 다른 나라 정상들에 도움의 대가로 고대 유물들을 선물했는데, 1836년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를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옮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발굴 현장들은 유럽 식민 대국들이 대부분 지휘하고 있었고, 특정한 한 국가의 정체성을 가진 고대 유물 협회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았다. 독립투쟁가들의 요구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19세기 말에 와서야, 협회가 차츰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정치학 박사이자 이집트 세계 문화・관광 유산 전문가인 상드린 감블랭은 이렇게 설명한다.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정부의 범아랍주의 및 반서방주의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고대유적은 나세르 대통령 때부터 서방 강대국들과의 교류를 재개하기 위한 물밑 외교 수단이었다.” 이는 이집트 정부의 관광 전략 및 과학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으로 착수한 누비아 유적 보호 사업은 1956년 수에즈 운하 분쟁 이후 남아있던 긴장감을 누그러뜨린 계기가 됐다. 

나세르 전 대통령 정권은 대규모 국유화가 특징이었지만, 관광산업은 민간 분야에서 유지됐고, 이집트와 해외 강대국들 사이의 협업으로 더욱 번성했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집트의 국수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책에는 대가가 따랐고, 그 대가는 현지 주민들의 몫이었다. 문화유산 정비를 위한 도시 재개발 정책들 때문에 수많은 주거지가 파괴됐고, 주민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지리학자 로망 스타드니키는 “이집트에 존재하는 모든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의 이면에는 강압적인 재정비 또는 도시화 사업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룩소르 신전과 카르나크 신전을 잇는 스핑크스 길도 최근 재정비됐는데, 이 또한 도시와 인간의 재앙을 감추고 있다. 파라오의 황금 퍼레이드를 연상케 하는 ‘스핑크스 퍼레이드’는 일정이 한 차례 연기된 후, 2021년 11월 25일 웅장하게 막을 올렸다. 하지만 룩소르와 카르나크 두 지역의 주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났고, 1897년 지어진 타우피크 파샤 안드라오스 궁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갔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에서 벌어지는 연속된 정비사업들의 목적은, 관광의 메카를 만들겠다는 환상 속에서 도심의 흔적을 지우고 ‘야외 박물관’을 만들기 위함이다. 주민들을 몰아내고 명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위협 받는 ‘죽음의 도시’

본격적인 정비 공사는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에서 시작됐다. 1996년, UN개발계획(UNDP)의 지원과 함께 ‘룩소르 시 종합계획’이 착수됐다. 미국의 국제개발처(USAID)의 재정지원을 받아 수많은 공사를 수행했던 미국 개발기업 ‘앱트 어소시에이츠’가 맡아 진행한 이 정비사업은 빈곤을 퇴치하고, 지역 재개발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2006년부터 룩소르의 도심은 다시 황색 빛으로 변해갔고, 군대의 불도저들이 거리에 나타났다. 고대유적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콘크리트 데크를 나일 강에 설치하는 프로젝트가 발표되자, 논란이 일었고 유네스코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자히 하와스 이집트 고대유적부 전 장관과 유네스코 사이에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결국 프로젝트는 취소됐지만, 룩소르시의 다른 유적지들은 프로젝트를 피해가지 못했다. 

감블랭은 무바라크 정권에서부터 시시 정권까지 같은 정책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도시를 온전히 관광 목적으로, 접근성만을 높여 다시 구성했다. 그렇게 관광객들이 현지 주민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룩소르시 정비사업은 관광업의 독점적 자본주의 경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정비사업과 관련된 수익은 민관협력(PPP)을 통해 관리되는데, 이집트 국내 여행사가 아니면 협력을 체결하지 않고는 이집트 내에서 영업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유적지만이 재정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고고학 유적의 개발은 도시계획 정비를 통해 이뤄지는데, 교통을 원활히 하고 관광버스의 통행을 용이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런 계획은 1990년대 테러 발생 이후 생겨난 안전 통제조치들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거대 교통망 건설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집착은, 2013년 시시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직후에 수립된 10개년 계획으로 이어졌다. 이집트를 세계 주요 물류 및 운송 센터로 만들겠다는 게 목표였다. 비록 이 프로젝트는 이집트 국민들의 끝없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전 방위로 펼쳐지는 교통망 건설은 국가적 필요성을 이유로 내세웠으며, 정부가 시행하는 공사 현장 가운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군수 기업들을 참여시켰다.(3) 일부 고속도로 건설은 오랜 시간 동안 쓰레기장처럼 방치됐던 관개 수로를 덮고, 수자원 정화 및 물 부족 문제 감소라는 이점이 있긴 하지만, 농지를 줄게 만들거나, 정부가 일명 ‘무허가 주거지역’ 퇴치 사업의 일환으로 제거하길 원하는 도시화 구역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렇듯 지난 몇 년 동안 카이로의 지형은 현저한 변화를 겪었고, 수익을 내지 못한다고 평가되는 문화유산들은 가차 없이 사라졌다. 카이로의 동쪽에는 1000ha에 걸쳐 ‘죽음의 도시’가 있다. 7세기에 형성된 근동 지역에서 가장 큰 지하무덤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여러 건축 양식이 융합된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2020년 7월, 군부에서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이 공동묘지의 흙길 위로 불도저를 보냈다. 카이로와 새로운 행정 수도를 잇는 고속도로의 예정지를 비워두기 위해서였다. 

무덤의 유해가 옮겨지기도 전에 포클레인과 망치들이 무덤의 돌을 부쉈고, 주민들은 집으로 쓰이던 묘소들이 예고도, 보상도 없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공사가 국내외 문화재 관련법을 위반하면서 진행되고 있는데도, 고대유적부 장관은 철거된 건축물들은 20세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합리화했다. 다행히 건축가들이 유네스코 앞에서 진행한 서명운동 덕분에, 철거 작업이 멈췄고 해당 사업도 중단됐다. 하지만 2021년 말, 장비들이 되돌아왔고 반대의 목소리들은 잦아들었다.(4)  

연구원이자 죽음의 도시에 관한 책을 공동집필한 갈리아 엘 카디(5)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건축가들은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고대유적부 소속 공무원 20여 명이, 유적들의 등급 강등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무덤 2,700기(基)가 철거 대상이 됐는데 그중에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 파루크 1세의 첫 번째 부인 파리다 여왕의 무덤과 건축적・상징적 가치가 엄청난 국가 원수 및 시인들의 무덤도 다수 포함됐다. 철거구역 거주민들은 주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설명과 통지문들(우편발송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을 통해서만 소식을 듣고 있다. 결국, 정확히 몇 명의 주민들이 떠나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종종 그래왔듯이 이집트에서 숫자는 타협 가능한 부분이다. 공식적으로 ‘죽음의 도시’에 사는 주민의 수는 150만 명 이상이다. 하지만 엘 카디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묘지 근처 마을들에 사는 사람들은 많아야 17만 5,000명이고, 그 가운데 묘지 집에 사는 이들은 1만 5,000명이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숫자를 부풀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 그 문제를 없애버린다. 다 쓸어내 버리는 것이다”라고 엘 카디는 딱 잘라 말했다.

결국 이집트 정부는 겉으로는 파라오의 유산들을 홍보하면서, 뒤에서는 문화재들을 선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 유적이든 콥트 교회 유적이든 아니면 단순히 인기 많은 것이든, 정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유적을 철거하면 빈 토지를 얻을 수 있고, 그 토지로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땅이 비싸고, 부동산 개발자들은 그 비싼 값을 언제든 낼 준비가 돼 있다. 유네스코의 소심한 항의도, 대통령령 앞에서는 그저 메아리만 울릴 뿐이다. 엘 카디가 느끼기에 유네스코는 “이집트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 다른 유럽 강대국들처럼 유네스코도, 주변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이집트 권력이 아주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유산과 인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카이로의 중심부에서는 붕괴 위험, 지진 위험 등 더욱 확실한 이유들을 내세우며 사이이다 제이납, 마스페로 같은 빈민가 철거 작업이 정당화되고 있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카이로판 ‘오스만식 도시 개조사업’(나폴레옹 3세 때, 파리 시장인 오스만 남작의 주도하에 진행된 대대적인 파리 도시 정비사업. 폭동과 시위 장소를 제거하고자 좁고 구부러진 골목을 넓히고 직선화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역주)이나 마찬가지인 도시 재정비사업의 부수적인 피해인 셈이다. 정비사업은 역시나 PPP를 통해, 이집트 최고 갑부인 나세프 사위리스의 기업, 오라스콤 건설에서 맡았다. 스타드니키는 탄식하며 말했다. 

“1950년대부터 영토 전체에서 자체적으로 건축을 시행해 오던, 민중과 다수결의 나라 이집트는, 그 어떤 경고도 없이 파괴되고 있으며, 당국은 파괴되는 곳에 유물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집트의 역사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유산들의 집합이 아니던가.” 

 

“권력의 상징을 확고히 한다”

마스페로 구역의 변화는, 혁명의 유산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마스페로 구역은 무허가 주거지들 중에서 2011년 시위의 중심이었던 타흐리르 광장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당시 시위대는, 국민들에게 거주하던 곳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2019년 시작된 타흐리르 광장 보수 작업은, 안전을 우선시한 도시계획을 통해 국가가 광장을 다시 손에 넣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6) 울타리로 표시된 통행로, 탁 트인 대로, 길모퉁이마다 설치된 경찰 초소… 광장 복판에 나일강 삼각주의 타니스 고고학 유적지에서 가져온 3,000년 된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고, 그 주변을 카르나크 신전에서 가져온 네 마리의 스핑크스가 에워싸고 있다. 원형 교차로에는 강렬한 파란색 폴로셔츠를 입은 ‘ASSC 시큐리티'의 안전 요원들이, 민간 회사인 팔콘 그룹 안전 요원들의 보조를 받아 밤낮으로 자리를 지키며 구경꾼들의 카메라를 쫓아낸다. 

“정부는 영악하게도, 사람들이 고대유적을 지키기 위해 경비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경우라면 경비가 상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박물관에 경비원이 있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절대 없으니 말이다”라고 스타드니키는 설명했다. 단지, 광장 보수 작업의 목적이 고대유적을 잘 보존하는 것과는 꽤 거리가 있을 뿐이다. 매일 수천 대의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광장에 스핑크스를 옮긴 것은 과학계에서 큰 논란거리였다. 과학자들은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쉬운 스핑크스들이 오염과 부식 위험에 노출된다고 경고했다. 

상드린 감블랭은 이런 공작의 목표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이 작업의 목적이, 2011년 혁명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 외에 또 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처럼 권력의 상징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정부의 현대 건축 방향은 체계적이다. 필수 인프라와 정부의 권위가 드러나는 모든 장소는 ‘파라오 양식’으로 건축됐다.” 또한, 이런 작업은 과거부터 ‘파라오주의’를 논란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1927년, 이집트 독립의 상징적인 인물인 사드 자흘룰이 사망했을 때, 그의 능에 고인의 종교에 따라 이슬람 건축양식을 사용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었고, 결국 파라오식 건축에 모두 동의를 했다. 

게다가 2021년 4월 성대한 퍼레이드 당시 등장했던 카이로 박물관의 거추장스러운 미라들을 광장에 잠시 보관하기도 해 실용적인 측면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화재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고대 유물들이 널려있는 나라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기 때문이다. 무허가 주거지들을 철거하는 또 다른 목적은, 신도시들, 특히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에 막대한 투자를 받기 위함이다. 대통령을 비방하는 이들은 새로운 수도를 ‘시시-시티’라 부른다. 스타드니키는 “이것은 사막 정복 프로젝트다. 카이로의 서민 구역 및 무허가 주거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규격화하고, 구획을 나누고, 안전을 보장하는 사업들을 통해 카이로를 완전히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이를 ‘도시 분산화’라 하는데, 도시에서 중심성이라는 특징을 없애는 방법을 일컫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프로젝트 진행이 현저히 지연되고 투자자들의 마음이 돌아서는 상황에서, 현대화된 카이로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2015년 두바이의 ‘에마르 프로퍼티즈’가 공사를 맡았지만 이내 포기했고, 그 다음으로 ‘중국 건축공정 총공사’가 넘겨받았지만, 결국 5+UDC 컨소시엄이 사업을 맡게 됐다. 두바이와 아부다비를 모델로 휘황찬란한 계획을 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공사가 끝나지 않은 도로와 여전히 비어있는 채, 650만에서 1,500만 주민들을 기다리는 건물들이 있다. 카이로 시민들은 그 누구도 새로운 도시로 이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또한, 주거지를 강제수용 당한 주민들을 서민들의 생활에는 부적합한 신도시로 강제이주 시키는 방법 역시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집트 정부가 가진 야심찬 계획들 중 새로운 것은, 문화를 도시계획에 접목시켜 사막 한가운데서 꽃피우려는 것이다. 정부는 피라미드 바로 앞에 건설된 대형 박물관의 개관을 앞두고 매우 들뜬 상태이고, 신도시에서 가장 처음 완성된 건물도 의회와 문화를 위한 궁전이다. 스타드니키는 이렇게 분석했다. “문화와 관련해서는 과도한 투자가 이뤄지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문화가 권력에 행사하는 영향력과 매력 때문이다. 국제적인 이미지 재고 필요성을 깨달은 걸프만의 군주국들이 문화 문제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박물관이나 문화 궁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신도시 프로젝트 같은 지지부진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집트가 드러낸 현대화 열망은 유럽 강대국들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 듯하다. 2020년 12월 7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비록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시시 군총사령관에게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훈장(프랑스 최고 훈장으로, 군사적・문화적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한다. 5등급 가운데 그랑크루아는 최고 등급이다-역주)을 수여했다.(7) 그로부터 1년 후인 2021년 11월 8일, 프랑스 기업 알스톰이 8억 7,600만 유로짜리 카이로 지하철 정비사업 계약을 따냈다. 향후 8년간 진행될 이 사업은, 프랑스 개발청(AFD)을 통해 프랑스 정부가 자금을 조달한다. 그리고 또 2주 후, 비영리 탐사보도 언론사 디스클로즈는 ‘공포의 메모’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집트 정부가 자국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폭격에 프랑스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8) 

 

골동품 반환

어찌됐든, 이집트는 여전히 자국 문화유산의 매력을 앞세워 해외를 공략하고 있고, 지정학적 문제들은 그저 일부 여론으로 치부한다. 프랑스에서 이집트의 고대유적들이 얼마나 열광을 불러일으키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2019년 프랑스에서 ‘투탕카멘, 파라오의 보물’이라는 순회 전시가 열렸다. 10개 도시를 순회하는 이 전시는 파리에서 6개월 동안 관람객들을 맞았는데, 142만 명이 다녀가 프랑스 역사상 최다 관람객 수를 기록했다. 그 전까지 가장 인기가 많았던 전시도 사실 1967년에 있었던 젊은 파라오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가 자국 유물들의 순회 전시를 허락한 이유는, 유물들의 영구 반환을 노리기 때문이다. 런던 영국 박물관에 보관 중인 로제타석,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덴데라 황도대 등의 반환은 전 고대유적부 장관이자 고고학자인 자히 하와스의 단골 소재다. 자히 하와스는 무바라크 정권의 총애를 받았지만 혁명 당시 추락했다가 시시 대통령 집권 이후 이집트학의 최전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박물관 제국주의를 멈춰야 한다. 나에게 이 제국주의는 유물들을 사고 훔치는 것을 뜻한다. 아프리카는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빼앗겼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루브르가 사들인, 도난당한 유물들에 열중하는 것이다.”

2009년 하와스는 유럽 박물관들에 이 주요 유물들의 대여를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영국 박물관은 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거절했으나, 당시 이집트의 박물관들이 고대 유물을 보관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의 프리더리케 자이프리드 관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현재 우리에게 들어온 반환 요청은 없다. 그러나 대여 요청도 정치적인 결정이 될 것이다. 나는 전시품 보존의 관점에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우리 박물관의 전시품들 중 상당수가 주의 물품 목록에 올라있는데, 그것들은 루브르 박물관에도 대여해줄 수 없다. 전시품들이 손상에 너무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 큐레이터들이 그 목록을 갖고 있고, 나는 그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자이프리드 관장의 의견에 따르면 베를린 박물관의 이집트 전시품들은 “독일 사회의 문화유산에 속한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공동체의 일부이며, 전 세계의 다양한 장소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그 유물들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훌륭한 기회라고 생각하며 21세기에 진입해야 한다.” 반면, 도난당한 작품들의 불법적인 거래 문제에 대해서 관장은 단호하게 답했다. “이집트 박물관으로서 우리는 경찰과 세관을 도와서 불법 무역을 추적하고, 시장에서 불법으로 거래되는 모든 것을 이집트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와스는 “그 유물들의 반환에는 실패했지만, 지금까지 6,000점의 유물을 이집트로 되찾아 왔다”고 말하며 위안 삼았다. 나일강 서쪽 도시 기제의 북부에 위치한 모한디신 구역의 사무실에는 그가 받은 트로피와 학위, 본인의 초상화 들이 가득했다. 더 이상 고대유적부의 장관이 아님에도 하와스는 이집트 전역의 발굴 현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지휘하는 발굴 현장으로 향할 때는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의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쓰는 이 이집트 학자는, 이 분야에서 논란은 있지만 부동의 입지를 가진 인물로, 이집트학 마케팅에 최선을 다한다. “나는 전 세계 TV 쇼에 수백 번 이상 출연 했고, 덕분에 많은 관광객이 이집트를 방문했다. 관광산업이 없다면 고대유적 복원도, 발굴도 불가능하다.”

실제로 관광산업이 고대유적지 발굴 사업 일부에 자금을 보태고 있긴 하다. 하지만, 수많은 대규모 발굴 현장은 해외 발굴단이 책임지고 있고, 유럽의 기금(AFD는 2009년에서 2015년까지 사카라 유적지 발굴에 50만 유로를 투자한 거대 투자자다)이나 미국 기금(USAID는 파라오와 오스만 유적 보존 사업에 30년간 1억 달러를 지출했다), 또는 후원금을 통해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집트 당국은 거대 발굴 현장을 꾸릴 형편이 아니다. 자본도, 장비도 부족할 뿐 아니라, 각종 인・허가에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어서 발굴 관계자들이 현장을 떠나는 일들이 많다. 하와스는 “이집트인 연구원들에게 우선권을 줬기에, 즉 이집트학을 이집트인들에게 되돌려줬기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모든 일을 이집트 팀들과 함께 한다. 예전에는 외국인들뿐이었는데, 처음으로 이집트인이 왕가의 계곡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우리는 외국 발굴팀과 동등해야 한다. 그러려면 양질의 교육 등을 통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해외 조사팀이 발굴 현장을 지휘하는 경우, 이집트인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집트가 자국이 직접 관할하는 고고학 유적지에 빗장을 거는 이유는 경제적・외교적 야망 외에도, 식민지의 유산을 버리고 제국주의 강대국들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자국 유물들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것이다. 감블랭이 지적했듯, “이집트학은 전형적인 식민지 학문”이기 때문이다. 

 

 

글·레아 폴베리니 Léa Polverini 
기자 

번역·김자연
번역위원


(1) ‘Pharaohs’ Golden Parade’, www.egymonuments.gov.eg
(2) Pierre Daum, ‘Place Tahrir, sept ans après la ‘‘révolution’’ (한국어판 제목: 타흐리르 광장은 7년 전의 혁명을 기억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3월호, 한국어판 2018년 4월호. 
(3) Jamal Bukhari, Ariane Lavrilleux, ‘Voracité de l’armée égyptienne (한국어판 제목: 돈벌이에 급급한 이집트 군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0년 7월호.
(4) Dalia Chams, ‘La Cité des morts du Caire craint de partir en poussière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한 카이로 죽음의 도시’,  <Orient XXI>, 2022년 2월 14일.
(5) Galila el Kadi, Alain Bonnamy, 『La Cité des morts : Le Caire 죽음의 도시: 카이로』, Paris, Institut de recherche pour le développement, Sprimont, Mardaga, 2001.
(6) Martin Roux, ‘Place Tahrir, un symbole assiégé (한국어판 제목: 이집트 민중 혁명의 빛이 바랜 타흐리르 광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2월호, 한국어판 4월호.
(7) ‘Une légion d’honneur au maréchal Sissi en catimini… qui finit par faire du bruit 압둘팟타흐 시시 총사령관에게 은밀히 수여된 레지옹 도뇌르 훈장…, 결국 잡음을 일으키다’, <France 24>, 2020년 12월 15일.
(8) https://egypt-papers.disclose.ngo, Sébastien Fontenelle, ‘Armes françaises pour dictature modèle  (한국어판 제목: 절대 권력을 위한 프랑스 무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12월호, 한국어판 2022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