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오스트리아를 집권했을 때

2022-05-02     장 뉘마 뒤캉주 | 대학 교수

‘오스트리아 정치’하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보수파의 위력, 가톨릭교회의 압박, 2차 대전 이후 나치의 잔재 등일 것이다. 그러나 1890년대부터 오스트리아식 파시스트(1)가 집권한 1934년 전까지, 오스트리아에서는 특유의 마르크스주의가 부상했었고 이는 국가주의와 ‘국가 정체성’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식됐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노동정당도 있었다.

1907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SDAP)(2)의 제안에 따라 <투쟁(Der Kampf)>이라는 새로운 학술지가 탄생한다. 여기서 ‘사회민주주의’가 말하는 내용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에서 말하는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1848년 혁명의 이상향에서 탄생한 오스트리아식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 세계에 강력하게 뿌리내렸고,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오스트리아, 체코 그리고 유대인 혈통이었던 청년 운동가 오토 바우어가 그 중심 역할을 맡았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양한 국적의 국민들이 있었고 그중 체코는 강력한 소수민족이었다. 1907년 오토 바우어는 카를 레너(1918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초대 총리, 1945년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의 대통령)가 제창한 사회민주주의를 뒤따르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국가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그는 『국적 문제』를 발표했다.(3)

같은 지역에 다양한 국적자들이 뒤엉켜 사는 것을 목격한 그는 “개인 자치” 모델을 제안했다. 각 개인이 제국 어디에서 살든 자기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는 한 개인으로서 초국가적인 조직에 의해 문화적 권리를 인정받고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대담한 이론은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국가’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했다. 과연 우리는 ‘국민 그 자신이 소유한 권리’를 언제나 존중하고 있는가? 많은 국제법 전문가들은 이런 권리 때문에 공동체가 여러 작은 국가로 나뉘고 소수 민족주의가 탄생할 수 있다고 염려하면서 거대한 국토 발전을 지지했다. 국가의 테두리를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식 사회주의는 러시아식 사회민주주의, 특히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스탈린주의 추종자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는다.(4)

 

‘좌파의 빈’에서 ‘빈 학단’까지

많은 이론가는 국가 문제를 넘어선 대개념을 다룬 저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라는 새로운 용어의 탄생을 감안할 때, 오스트리아에서 진정한 사상 학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10년, 루돌프 힐퍼딩이 『금융자본론』을 출판했다.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자본화 문제와 그 결과를 대대적으로 다룬 책이다.(5) 레닌은 이 책의 내용에 따라, 제국주의에 관한 그의 사상을 구축했다. 장 조레스는 『금융자본론』에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 제국주의에 관한 거대한 보고서를 완성했다. 그리고 1914년 8월, 빈에서 열릴 국제 사회주의 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7월 31일 장 조레스가 암살됐고, 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학회는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국제 사회주의의 거대한 희망을 짓밟았다. 4년 후, 거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유럽 지도에서 사라졌다. 오스트리아 영토는 프랑스 정도로 작아졌다. 1918년 11월 12일, 빈에서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됐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민주화한 후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앙 유럽 내 거대 공화국으로 탈바꿈시키길 원했었다. 즉, 사회주의 ‘중유럽’의 탄생을 바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룰 수 없는 바람이 돼버렸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한때 베를린과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1848년 혁명 계획을 다시 한번 시도해 거대한 민주주의 독일 공화국을 꿈꿨다. 그러나 동맹국, 특히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가 작은 영토로 남도록 압박을 가했다. 

국적 문제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체코, 폴란드 그리고 그 외 다른 국가 국민들도 각자의 국가가 생겼다. 그런데도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자’ 앞에는 여전히 좋은 시절이 남아있었다. 우선 오스트리아인들은 새로운 국제 사회주의를 세우고자 했다. 러시아와도, 독일 사회민주당(SPD)과도 관련 없는 그들만의 독자노선을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1920년대 오토 바우어의 사상 하에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전체 사회주의’ 견해를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중 가장 좋은 것으로만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소련의 시도를 규탄하기를 거부했고,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독일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후 집권한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흐름을 같이 했다. 막스 아들러를 중심으로 한 가장 좌파에 치우친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 위원회에 희망을 걸었다. 이 위원회는 1918년과 1919년에 중앙 유럽, 특히 빈에서 발달했는데(6)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노동 민주주의의 싹을 본 것이다. 이런 역동적인 정치 이론의 흐름은 독일 및 프랑스와는 반대로 강력한 공산주의당의 탄생을 막았다. 그리하여 강력한 당이 아닌 작은 투쟁단체로 남게 됐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특성 때문에, 유럽 역사상 유례없는 당이 탄생했다. 1920년대에 오스트리아 국민 6명 중 1명이 사회민주당(SDAP)에 가입한 상태였다. 1929년에는 가입자가 약 72만 명에 달했다. 사회민주당은 산업 대도시에 강력하게 자리 잡았으나, 오스트리아 다른 지역에서는 힘이 약한 상태였다. 경제 정치 위기 때문에 가입자들의 수는 급격하게 줄었다. 그러나 1932년에 가입자 수는 여전히 약 65만에 가까웠고, 그중 절반 이상이 노동자였다. 1927년 샤텐도르프의 작은 마을에서 노동운동가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는 내전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 사건은 여러 편의 문학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이미토 폰 도데러의 『악령들』과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이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력한 움직임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의 이들의 역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19년부터 1934년 2월까지 도시를 지배한 건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좌파의 빈’은 국제적 차원에서 사회민주주의 실현의 진정한 모델이었다. 빈은 ‘사치세’를 창설했다. 거대한 사회주택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을 마련하려는 방안이었다. 이 사회주택을 구상한 사람은 향후 르 코르뷔지에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였다. 즉, 소비에트 연방을 제외하고 수도에서 강력한 사회주의 정책이 시행된 유일한 국가가 오스트리아였다. 

사회민주당은 문화(영화, 연극) 부문에 전례 없는 투자를 했고 스포츠 활동을 지원했다. 빈은 또한 예술과 지식의 거대한 중심지가 됐다. 많은 사조가 부흥했는데 그 유명한 ‘빈 학단(學團)’, 그리고 빈 학단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오토 노이라트 철학자도 이 시대의 산물이다.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같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많은 지식인도 수도 빈의 정치를 지지했다. 

 

좌파의 이상을 계승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KPÖ)

 

그러나 1934년, 이 체계는 무너졌다. 빈은 좌파의 도시였으나 그 외 오스트리아 다른 지역은 대다수 사회 기독교 신자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기독교 신자들이 오늘날 보수 정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치 범게르만주의자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1934년 2월, 사회 기독교 신자들은 무력을 사용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이탈리아 파시즘에 가까운 새로운 체제를 구축했다.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무기를 쥐고 대도시에 나와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은 ‘오스트리아식 파시스트’들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수도 빈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잘 보이지 않던 다른 현실들도 차츰 드러났다. 수도가 소위 ‘빨갱이’의 손에 있다는 것에 혐오감을 표하는 이들이 있었고,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와 초기의 반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 연합했다. 이들은 서슴지 않고 빈을 “유대인 양성소”라거나 “소련 공산주의의 오스트리아 버전”이라고 불러댔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극우파의 공격에 반격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 극우파는 1920년대 말부터 내전의 기운을 계속 풍기고 있던 터였다. 

1934년 쓰러졌던 노동 운동은 1938년 나치의 강제 병합으로 인해 끝장났다. 일부는 저항운동에 뛰어들었다. 1945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시 빈에서 정권을 잡았고, 전임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정책들, 특히 주택 정책을 이어서 펼쳤다. 그리고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이번에는 브루노 크라이스키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다. 이 정책은 사회적 차원에서 중도의 형태로 남아있으며, 극좌파가 반향을 일으키는 시국이 되자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기준들이 다시 부상하게 됐다. 

프랑스에서는 1971년에 사회주의당이 새롭게 출범했다. 사회주의 연구·조사·교육 센터(CERES)(7)가 세워져 오토 바우어와 그의 ‘전체 사회주의’를 향한 관심을 끌어모았고 이들은 이를 대안으로 여겼다. 소비에트식 모델과 많은 사회민주주의가 주도한 초기 반공산주의 모델이 한계에 직면했던 시대에 디디에 모찬과 장 피에르 슈벤느망 같은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수많은 평론을 발표했다. 장 피에르 슈벤느망은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 시절 장관을 역임하면서 1982년 2월에는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학회를 열었다.(8)

그러나 1983년 정치 흐름의 급변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은 식어버렸다. 그때부터 (여전히 사회민주주의가 주도하던) 오스트리아 빈은 ‘사회주의가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도시’로 알려졌다.(9) 어떤 사안들, 특히 주택 분야의 경우에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었다. 안 이달고 현 파리 시장도 미미하지만 꾸준히 오스트리아 빈에서 실시됐던 정책을 참고하고 있다. 1970년대 정치를 재정립하려던 야심은 이제 머나먼 이야기다.

2021년 9월,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그라츠 시 의회에서는 오스트리아 내 소수당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KPÖ)(10)이 승리했다. 그들이 선거운동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주거문제였다. 좌파가 지배했던 빈에서 탄생한 이상향이, 사회 일부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증거다. 

 

글·장 뉘마 뒤캉주 Jean-Numa Ducange 
프랑스 대학 연구소 및 루앙 대학 현대사 교수. 저서로는 엘렌 르클레르(Hélène Leclerc)와 함께 저술한 『오스트리아 1918~1938년』가 있다. 

번역·이정민
번역위원


(1) ‘오스트리아식 파시즘’은 사상 내지는 그런 사상을 구현하려는 체제를 가리키는 용어다. 유일당 사상에 기반한 무솔리니 파시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 사상은 반마르크스주의와 반나치주의가 특징이다. 
(2) SozialDemokratische Arbeiter Partei [조치알데모크라티셰 아르바이터 파르타이], 1945년 이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KPÖ)으로 명칭을 바꿨다.
(3) Otto Bauer, 『La question des nationalités 국적 문제』, Syllepse, Paris, 2017년. 
(4) Jean-Numa Ducange, 『Quand la gauche pensait la nation. Nationalités et socialismes à la Belle époque 좌파가 국가를 생각할 때. 벨 에포크 시대의 국적과 사회주의에 대해』, Fayard, Paris, 2021년. 
(5) Rudolf Hilferding, 『Le capital financier : étude sur le développement récent du capitalisme 금융자본론. 자본주의의 최근 발전에 관한 연구』, Éditions de Minuit, Paris,1970. 
(6) Hans Hautmann, 『Die österreichische Revolution. Schriften zur Arbeiterbewegung 1917 bis 1920』, Promedia Verlag, Vienne, 2018. 
(7) Centre d’études, de recherches et d’éducation socialiste 1966년 설립됐으며, 1971년 좌파 사회당(PS)에 편입됐다. 
(8) ‘L’austro-marxisme : nostalgie et/ou renaissance ? 오스트리아식 마르크스주의, 추억인가, 부활인가?’, <Austriaca>, n°15, 1982.
(9) https://www.eiu.com/n/campaigns/global-liveability-index-2021/
(10) Sozialdemokratische Partei Österreichs [조치알데모크라티셰 파르타이 외스터라이히스], 사회민주노동당(SDAP)의 정신을 계승한 정당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