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정치와 춤을…

2022-05-02     장루이 맹갈롱 | 연출가

카를로스 가르델에서 아스토르 피아졸라까지, ‘고전적’ 버전부터 재창조까지, 탱고에 대해 사람들이 알 법한 것들이다. 드라마틱하고 열정적이며 독보적인 스타일을 갖춘 춤, 탱고. 그렇기에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이 춤이,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 각별한 서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탱고는 춤의 장르를 말한다. 동시에 음악 장르를 말하기도 하며, 노래 가락이나 시(詩)를 말하기도 한다. 탱고의 고향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소 막연하지만, 일반적으로 아르헨티나로 본다. 두 명의 댄서가 한 공간에서 열정을 춤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며, 탱고가 어떻게 창시됐는지를 질문하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탱고의 역사가 정치와 연관돼 있으리라고 추측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탱고는 정책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탱고는 탄생 초기부터 빈번하게 집권 정부와의 파란만장한 논란들에 시달려 왔다.

탱고의 역사는 1870년부터 시작된다. 라플라타 강을 끼고 인접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당시 국토의 대부분이 농촌지역이었다. 이에 양국 정부는 현대화 정책과 인구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외국 노동력이 대거 유입됐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수많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1870년 당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인구가 약 25만 명이었던 데 반해, 이후 30년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 및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항구에 발을 디딘 이민자의 수는 무려 15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수도 외곽 ‘콘벤티요(Conventillo)’라는 공동 거주지에 자리를 잡았다. 우물이 딸린 안마당을 끼고 4평 남짓한 집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는 빈민 주거시설이었다. 좁은 곳에 여러 사람들이 살며, 매춘이 성행했던 이 누추한 시설은 1920년 초까지 유지됐다.

이민자들은 주거지나 일터에서 매일 마주치며 공동체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사용하는 언어도, 즐기는 음악이나 악기도 각기 달랐다. 유럽 출신 이민자들도, 원주민인 흑인들도 각자 자기 나라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 흑인 인구는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 콜레라, 황열병과 같은 전염병과 높은 유아사망률, 전쟁으로 많은 흑인들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장에서 흑인들과 흑백혼혈인들이 총알받이가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라플라타 강을 통해 매년 약 10만 명씩 들어오던 흑인 노예의 후손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전체 인구의 1/3(현재는 0.4%)을 차지했고, 우루과이에서도 비슷했다(현재는 8%). 

여기에 스페인 식민지 출신의 가난한 ‘키리오요(Criollo)’ 들이나, 아르헨티나 국내 유랑민들인 ‘가우초(Gaucho)’, ‘파야도레(Payadore)’ 등도 이민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특히 가우초와 파야도레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즉흥곡 ‘파야다(Payada)’를 주고받는 독특한 문화로 유명했는데, 처음에는 농촌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점차 도시로 활동지를 넓혀갔다. 특히 이들은 지금까지도 라틴 아메리카 민속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쿠바의 ‘아바네라(Habanera)’, 아프리카의 ‘칸돔베(Candombé, 아프리카 문화의 영향력은 오랫동안 덮여있었다)’,(1) 집시들의 춤, 이탈리아의 가곡, 그리고 파야다가 ‘탱고’에 융화되어갔다. 동시에 탱고가 기존의 음악들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강렬한 리듬의 음악 ‘밀롱가(Milonga)’나 ‘발스(Valse)’처럼, 탱고도 무곡(舞曲)으로서 무용학원과 도박장, 유흥가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콘벤티요의 안마당이나 길거리에서는 배럴 오르간(손풍금) 소리가 들려왔고, 때로는 피아노, 기타 트리오, 바이올린, 플루트 등이 함께 연주되기도 했다. 이들 중 플루트는 점차 독일산 반도네온으로 대체됐으며, 이 악기는 점차 탱고를 상징하게 됐다. 

저녁이면, 다양한 출신의 남성 노동자들이 라플라타 강변 부둣가에 모여 외로운 여인들과 함께 춤을 추며 피로를 풀곤 했다. 매춘부들이 최고의 탱고댄서가 된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여성들은 주로 탱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했고,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남장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여성 역할의 비중은 점점 커져갔고, 이제는 여성이 탱고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또한 춤으로서의 탱고에서도 두 댄서의 관계가 '리더-팔로워'로 정립되면서부터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성 댄서 두 명이 함께 춤을 연습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관습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탱고가 금지 대상이 됐던 시기에도 여전했다.

 

탱고댄서와 허물없이 춤을 춘 푸앵카레 대통령

이렇게, 탱고는 빈민가에서 탄생해 마초적인 성향의 도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런 탱고의 탄생과 성장 배경을 보면, 엘리트의 관점에서 탱고가 좋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20세기에 접어들며 탱고는 호기심, 경멸, 또는 우려의 눈빛을 모두 받아야 했다. 하지만 탱고는 결국 거의 모든 계층에서 인기를 얻었다. 우선 서민들에게는, 적어도 춤을 추는 동안 가난한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 받았다. 또한 점차 유행을 타기 시작한 탱고는 기존의 애호가들을 넘어 중산층과 일부 상류층을 사로잡기에 이르렀다. 한편 향후 탱고의 제2의 발상지가 된 프랑스에서는, 아르헨티나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흐름이 나타났다.

탱고가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 것은 1911년 어느 저녁 열린 파리 상류층 인사들의 살롱 덕분이었다. 이 살롱에는 프랑스 시민들의 입에 막 오르내리게 된 탱고를 알기 위한 목적으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작가 리카르도 귀랄데스가 초대됐다. 귀랄데스는 모두의 앞에서 살롱에 참석한 한 여성을 껴안고 리드하며 탱고를 선보였다. 그 모습은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열광을 불러 일으켰다. 너도나도 탱고를 배우기를 열망할 정도였다.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파리 전체에 퍼졌다. 사교계에서는 ‘탱고 마니아’를 자칭하는 애호가들이 늘어갔다. 이후 탱고 열풍은 서민층으로 번졌고, 파리의 라플라타 탱고댄서들은 왕족과도 같은 입지를 얻었다.(2) 

물론 외국인혐오주의자들의 시기 섞인 비판도 없지 않았다. 특히 보수층은 앞장서서 이 ‘저주받은 춤’에 대해 맹공격을 퍼부었으며, 파리 대주교인 아메트 추기경부터 주임 신부 등을 비롯한 가톨릭계 역시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1914년 1월 10일, <르 피가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골뜨기들에게서 유래한 유행”을 “인간 존엄성, 도덕, 종교의 이름으로” 규탄한다는 디종 지역 주교의 글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속 문인인 장 리슈팽(1849~1926)은 이런 비판에 맞서 우아한 방어전을 폈다. 학사원에서 강단을 빌려, 탱고의 기원이 외국의 하류층 문화에 있고, 저속하고 선정적이라는 비난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은 영부인과 함께 국립농립학교에서 열린 무도회를 찾아 탱고댄서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샤를 드골도 현역 군인시절 파리 소재 ‘조르주 에 로지(de Georges et Rosy)’라는 무용학원에서 유명한 탱고 수업을 받기도 했다. 결국 탱고에 대한 가톨릭계의 견제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이 ‘저주 받은 춤’은 살롱 탱고, 혹은 무도회 탱고의 형태로 간소화된 후에야 용인됐다. 이후에도 탱고를 ‘중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선 후에야 ‘탱고 아르헨티노’ 같은 공연들 덕택에 프랑스 대중들도 라플라타 강변에서 펼쳐지는 실제 탱고를 접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프랑스에서는 탱고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됐다. 나아가 1920년대부터는 탱고 열풍이 전 세계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일례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 대통령도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에서 탱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본토인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가 군부 지배 하에서 ‘암흑기(1930~1943)’를 겪고 있었다. 탱고는 물론, 심지어 탱고를 추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까지도 검열의 대상이 됐다. 당시 탱고의 가사에는 부랑자들과 빈민층의 은어인 ‘룬파르도(Lunfardo)’를 많이 썼는데, 룬파르도는 전 세계 각지의 말들이 뒤섞여 있는 이른바 ‘잡종언어’에 가까웠다. 즉,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집권세력의 바람에는 어긋났다.

 

아르헨티나의 국가 음악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또한, 가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시인 엔리케 산토스 디세폴로가 지은 ‘캄발라체(Cambalache; 잡동사니, 난장판)’라는 곡이야말로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3) 하지만 그런 중에도 탱고의 전설적인 인물 카를로스 가르델(1887~1935)이 개척한 새로운 장르 ‘탱고 칸시온(Tango canción)’은 큰 성공을 거뒀다. 가르델은 탱고의 선정적 요소들을 감성적 요소로 바꿨다. 그리고 탱고 악단의 지휘자 후안 다리엔소가 고안한 독특한 리듬이 더해져 한동안 비어 있던 탱고 무대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침내 ‘탱고의 황금기’가 도래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국가적인 음악으로 승격되기에 이른다. 군인 출신이자 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1946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안 페론 대통령이 서민중심적인 사회 정책을 펴던 시기였다. 페론 대통령은 연단에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탱고를 언급했고 모든 지역에 무도장을 만들기도 했다. 탱고라는 음악과 춤이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들에게 탱고란 그저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닌, 표현의 수단이자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오메로 만시, 디세폴로 등 사회적 진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대의 시인들이 그의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정권이 강화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1955년 쿠데타가 일어나 페론 대통령이 실각하자 탱고는 다시 암흑기로 접어든다. 군부는 모든 형태의 대중 집회를 금지했다. 탱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Nuevo tango, 새로운 탱고)’ 시대가 찾아왔다. 누에보 탱고는 춤을 위한 음악을 넘어서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오스발도 푸글리에세(Osvaldo Pugliese, 1905~1995)의 악단을 비롯한 일부 악단들은 계속 탱고를 연주했다. 공산주의 운동가이기도 한 푸글리에세는 음악가 조합의 최초 설립자다. 그가 페론 대통령의 집권 전과 집권 중, 그리고 집권 후까지 감옥신세를 지자,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집권 세력이 바뀔 때마다 푸글리에세가 최소 20일 간 투옥되지 않은 채 활동을 지속하는지 지켜보라. 만약 투옥되지 않았다면 그 정부는 분명 민주주의 정부다.”(4) 

그러나 1955~1983년, 아르헨티나는 참혹한 폭력과 불안의 시기를 보냈다. 1976~1983년에는 군사독재가 시작되면서 3만 명이 ‘실종’됐고, 1만 5,000명 이상이 총살됐다. 결국 음악가들은 망명길에 올랐다. 후안 호세 모살리니, 구스타보 베이터만 등 많은 음악가들이 프랑스로 향했다. 특히 탱고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인 후안 세드론은 자신의 콰르텟과 함께 프랑스에 정착해 훌리오 우아시, 라울 곤잘레스 투뇬, 후안 헬만, 루이스 알포스타 등의 시에 강렬하고 울적하며 저항적인 곡조를 붙여 큰 성공을 거뒀다. 이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좌파의 예술적 동맹이 됐고, 망명 음악가들의 탱고는 언론과 대중에게 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2000년대 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시 브랜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탱고는 상징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과거 불순하고 상스럽다는 비난을 받으며 오히려 다른 나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던 탱고. 그 탱고가 마침내 국가 정체성의 상징이자 핵심 관광 콘텐츠로 발돋움한 것이다. 

 

 

글·장루이 맹갈롱 Jean-Louis Mingalon
연출가, 프리랜서 기자. 공저서로 『Dictionnaire passionné du tango 열정적 탱고 사전』(Editions du Seuil, 2015)이 있다.

번역·김보희
번역위원


(1) Juan Carlos Cáceres, Tango negro, Editions du Jasmin, Clichy, 2013.
(2) 사실 널리 쓰이는 표현인 '아르헨티나 탱고'보다는 '라플라타 탱고'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이 분야에서 우루과이의 중요성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탓이다.
(3) ‘Cambalache’, www.chants-de-lutte.com
(4) Fabrice Hatem의 개인 홈페이지 www.fabricehatem.fr 
 및 아르헨티나 탱고 전문 매거진 <La Salida> 43호(2005년 4~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