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꿈을 되살린, 『레미제라블』과 『삼총사』
19세기는 혁명에 사로잡혀 있었다. 억압을 상징하는 바리케이드, 프롤레타리아, 지식인, 활동가는 혁명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두 소설 작품은 배반당한, 그리고 고집 센 민중에게 전설과 영웅을 선사했다. 『삼총사』와 『레미제라블』은 민중의 집단적 상상 세계를 위대한 이야기로 구현해냈다.
어렸을 때 나는 영화관에 자주 가지 못했다. 엄마가 도로 청소부들을 위해 새벽 5시부터 카페 문을 여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엘도라도 극장에는 두 번이나 가보았다. 가로등과 빨강 신호등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밤길을 엄마와 함께 걸었던 호사스러운 순간들. 첫 번째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러 갔던 날이었다. 아마도 명배우 장 가뱅이 나왔었던 것 같다. 두 번째로 갔을 때는 <독재자>를 봤다. 당시 나는 7살밖에 안 되었던 터라 내용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뜻하지 않게 갖게 된 휴식 기간에 나는 『브라질론 자작』을 읽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완전히 몰입할 수는 없었다. 『브라질론 자작』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달타냥 3부작』 중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데, 나는 앞의 두 권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질론 자작』에는 내가 모르는 삼총사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때는 크리스마스였고, 엄마 집에는 나머지 두 권이 없었다. 엄마는 지겨워지면 언제든지 이사를 하고 가구를 바꿀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살림살이만을 유지했다. 엄마가 이사할 때마다 들고 다니던, 녹색 가죽 커버를 댄 6권의 무거운 책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처음부터 서민의 대표주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엄마는 하녀, 공장 노동자, 서빙 직원, 마권 판매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래도 엄마는 의무 교육을 이수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노동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희한하게도 잘 기억했다. 1869년 할머니의 고향 리카마리에서 벌어진 광부들의 투쟁, 1913년 프레생제르베에서 열린 장 조레스의 회의 등이다. 엄마는 실종된 소녀, 불행한 자, 사회 부적응자, 불운한 자를 심판하는 자들에 동조하지 않았다. 『레미제라블』도 『삼총사』도 읽지 않았다. 다만 영화는 봤다. 그래서 줄거리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두 작품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제외하면 알고 있는 다른 이야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엄마는 그 작품들 속 주인공들과 친밀감을 느꼈다. 엄마는 결코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엄마의 타고난 기질이 그랬다. 전 세계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물론 당시에는 엄마와 같은 서민층이 즐겨 읽던 다른 대중 소설들도 있었다.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대중 소설은 읽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아마 『돈키호테』도 대중 소설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애정 어린 모욕의 대상, 실상은 엉망진창인 정의의 사도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풍차와 싸우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의미 없는 명분을 위해 싸울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따라서 돈키호테는 오히려 반란을 억제하는 인물이자, 포기의 정당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현명한 인물이다. 유복한 자, 실망감을 느낀 자, 그리고 패배자의 먼 후손이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들은 투쟁의 무의미함을 일찌감치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가능한 것들은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반대로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뒤마의 『삼총사』는 세간에 어떠한 조롱이나 애석하다는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반란으로 이어지는 기쁨의 순간 또는 눈물의 순간에 열광했다. 사회질서를 사랑하는 이들, 예를 들어 기득권층의 취향에 절대복종하는 관료나 혹은 자신이 기득권층과 그 취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관료도, 이 두 소설을 향해 점잖은 경멸만을 표현했다.
스스로 교양있다고 생각하는 중산층을 대변하는 잡지 <텔레라마>는 2008년에 100명의 프랑스 작가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 10권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이 조사는 당연히 작가의 진심에서 우러난 고백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에게 자신의 능력을 홍보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기획됐다. 문인들의 신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작가는 해당 작품에 확실하고도 멋진 가치를 부여해야 했다. 따라서 단 3명만이 『레미제라블』을 언급했고, 『삼총사』를 꼽은 작가는 1명뿐이었다. 반면 플로베르의 작품은 수많은 작가에 의해 선택됐다. 불쌍한 플로베르…
플로베르는 자신의 소설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무허가약제사 오메(Homais)가 갑자기 유명해진 것처럼, 평범한 작가들의 우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교양을 강조하고 혁명의 움직임을 경시하는 시골의 연금생활자 오메를 사랑했다. 위대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예술가들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소설가 뒤마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도대체 대중에게 예술, 시, 양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중은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략) 뒤마의 소설이 어떻게 그런 경이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중략) 적어도 그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뒤마의 소설은 머릿속에 아무런 감상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줄거리는 맑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에, 책을 덮고 나면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대단하지 않은가!” 1853년 6월에 플로베르의 연인 루이즈 콜레가 쓴 글이다.
『레미제라블』은 전설, 『삼총사』는 동지애의 이상향
반면 위고의 작품은 맑은 물이 아니라 더러운 물에 가까웠다. 크루아세의 연금생활자 플로베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레미제라블』은 나를 화나게 한다. 위고는 소외된 자들의 고통에 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마치 고발자와 같다.” 그렇지만 모든 문학의 거장들은 그것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나? 『레미제라블』을 형편없는 소설로 깎아내린 플로베르 자신만 해도 그렇다. “『레미제라블』은 의도적으로 부정확하고 수준 낮은 스타일로 쓰였다. 그것이 위고가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한 마디로, 위고의 작품은 “가톨릭과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사기꾼, 철학과 복음주의를 신봉하는 인간쓰레기”를 위한 것이라고 플로베르는 1862년 7월 로제데주네트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비난했다. 플로베르가 말한 사기꾼은 부르주아 계급의 플로베르와 그 동지들의 행복한 박수를 받으며 9년 뒤에 처형됐고, ‘인간쓰레기’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들에게 『레미제라블』은 전설이었고, 예술 따위에 관심 없는 대중은 『삼총사』를 빛나는 동지애의 이상향으로 여겼다. 대중은 위고의 작품들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게 됐고, 아름다워지고, 더 단단해졌다. 혁명 망명자의 환상과, 혁명이 인간성을 회복해 줄 것이라 믿는 고아의 환상 간의 만남. 그 만남이 혁명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민중은 언제나 그것을 꿈꾸었고 심지어 그것에 관한 악몽까지도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19세기 전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혁명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바꾸었고,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개인의 개념에도 변화가 있었다. 혁명의 결과로서 민중과 박애가 생겨났다.
민중은 혁명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실 민중의 대부분은 비주류였다. 주변인, 농부, 노동자, 내의 제조업자, 방랑자 등과 같은 부류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이들이 민중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들이 무대를 장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공화국이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일이었다. 모든 기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약 문맹인도 지식인과 똑같이 발언하고 전문가와 다름없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면, 만약 바보도 어엿한 국가의 일원이라면, 우리는 더는 민중을 어린애, 무책임한 자, 말썽꾼으로 여기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의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의 위계질서까지도. 즉, 봉건제도의 종말이다. 이제 이성은 왕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두운 세계, 꿈틀대는 욕망, 환상 세계의 탈주자에게는 더이상 민중을 억누를 수 있는 동물적인 힘이 없다. 해방이든 또는 내밀한 야만성의 수용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사육제의 승리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곧 시민이다. 실패한 인간의 내면과 외면, 여성, 광인, 통제할 수 없는 자, 무질서한 영역의 그림자까지도.
혁명은 운명의 질서를 바꾸었고, 인간은 민중으로 거듭났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혁명, 제국, 왕정복고 시대를 체험한 작가들
그러나 그들의 자손, 즉 1789년 이후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태어난 이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이들이 성장하자, 시대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불길했다. 우울한 난쟁이들의 오페레타처럼. 결국 모든 것이 과거와 같아졌다. 미래가 왔지만 미래는 과거의 반복에 불과했다. 혁명이 끝나자 제국이 세워졌다. 제국이 멸망하자 왕정복고 시대가 열렸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2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814년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낡은 세계와 낡은 인물들이 되돌아왔다. 급진파 혁명가 생 쥐스트는 1792년에 25세였고, 나폴레옹은 30세에 마렝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루이 18세는 60세에 왕위에 올랐고, 8년 뒤에는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왕위를 이었다. 낡은 자들, 추한 자들.
모든 것이 기괴했다. 더이상 영웅도, 놀랄 만한 사건도, 기대되는 일도 없었다. 역사로부터 갑자기 추방된 느낌이었다. 미라의 세계에서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는 비통함과 절망감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빛나는 기억들, 그러나 신경세포의 시냅스에는 남아있는 그 기억들에 관통당한 채로.
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청년들은 낭만주의를 만들어냈다. 낭만주의는 대립, 불일치를 의미했다.
진정한 작가로 거듭난 위고와 뒤마
낭만주의가 무르익을 때쯤에 새로운 혁명의 움직임,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새롭게 탄생한 희망과 기대가 등장했다. 희망의 기운이 곳곳에 스며들었다. 민중은 일어났다가 넘어지고, 또 일어났다가 넘어졌다. 청년들은 혁명의 배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넘어지는 민중을 만났다.
동시대 작가들 가운데 혁명 속에서 진정한 작가로 거듭난 것은 오로지 뒤마와 위고 뿐이었다. 시기적으로 직접 혁명을 겪은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혁명의 흐름에 동참하고, 그 혁명에서 비롯된 새로운 세계의 요구사항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덕분에 민중의 짓밟힌 꿈을 되살려 이야기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혁명 정신을 찬양하고 기리는 이야기로.
집단에게 개인이 갖는 중요성. 그리고 개인에게 집단이 갖는 중요성. 뒤마와 위고가 창조한 문학 세계는 고통과 프롤레타리아적인 힘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재배치하고 재발견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민중을 바라보고, 민중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뒤마는 가장 예민했다. 뒤마는 1830년 혁명을 계기로 현실에 눈을 뜨고 현실을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위고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깨달음을 얻었다.
* 이 글은 2022년 5월 13일 Agone Editions에서 출간 예정인 에블린 피에예의 『Mousquetaires et Misérables, Ecrire aussi grand que le peuple à venir (Dumas, Hugo,Baudelaire et quelques autres 삼총사와 레미제라블, 미래의 민중을 위한 위대한 이야기 (뒤마, 위고, 보들레르,그외 기타 작가들)』에서 발췌했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소연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