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그 ‘사치’스러운 직업

2022-05-02     파스칼 부아지즈 | 가수 겸 작가

평론가들과 열성적인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한편, 라디오나 TV에 전혀 출연하지 않는 예술가들. 그들의 직업생활은 어떨까? 전문가들만의 호평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적인, 혹은 사회정치적인 현상일까? ‘수준 높다’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한 가수의 속내를 들어본다.

 

제 이름은 파스칼 부아지즈입니다. 가수이고, 49세랍니다. 제 이야기를 할게요. 제가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주제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가리켜 ‘가수’라고 했습니다만, 다른 일도 해왔습니다. 30년 전부터 부업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순전히 가수로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랍니다. 이는 음악가들 대다수에게 무척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몇 년 전부터 극단에 속해 전일제 예술가로 사는 사치를 다시 누리고 있습니다. 공연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요. 젊었을 때 잠깐씩 해본 적이 있는 일입니다. 가난을 지고 살았지요. 빚,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생활비. 심지어 몇 푼도 없이 지내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병든 몸을 선호하는 기생충처럼, 은행은 터무니없이 수수료를 빼갔습니다. 현금지급기에 출금 카드를 넣을 때마다 불안감이 밀려왔습니다. 가수라는 건 곤혹스러운 직업입니다.(1)

최근 저는 온전히 예술 작업으로만 노동시간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음악가 대부분에게는 엄청난 시간이지요. 그러자 그때부터 공연 노동자 구직 센터에서 월 실업급여 1,290유로(한화로 약 173만원)를 지급했습니다. 생활비로는 충분하지 않은 액수입니다. 파리에서, 그것도 아이들과 생활하는 이에게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유일하면서도 훌륭한 제도니까요.

25년 전부터 전 ‘멘델슨’이라는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눈이 밝은 평론가 일부는 호평을 하고 환영하는 그룹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아마 그들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눈이 밝겠지만) 완전히 무명인 그룹입니다. 멘델슨은 한 줌의 행복한 소수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고, 그들은 프랑스 전역에 흩어진 수백 명에 불과하지만, 때로는 감동할 만큼 저도 끈기 있게 저희 그룹의 행보를 따라갑니다. 멘델슨은 라디오 출연이 드뭅니다. 콘서트도 몇 번 하지 않습니다. 일정을 잡기 어렵거든요. 왜냐고요? 

콘서트 기획자들이 지나치게 소심해서일까요? 관객이 너무 적어서일까요? 저희가 버는 돈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질문에 가장 답하기 힘든 사람이 바로 저일 겁니다. 물에 빠진 당사자가 자기 익사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최후의 인물인 것처럼요. 그리고 아마도 제가 내세울 추측들은 엄청난 자만과 독선을 드러낼 겁니다. 제 말을 믿는다면, 이 세상 전체가 틀렸고, 저만이 옳다는 소리가 되니까요. 멘델슨이 이른바 록, 이따금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적어도 저희 눈에는 무척 중요한 가사를 프랑스어로 노래하는 진정한 록그룹이라는 것 하나는 사실입니다.

공연장을 차지하고 라디오와 잡지 지면을 독점하는 우리 세대 팝음악 가수들의 상당수가 록음악이나 전위음악보다 아동용 음악(점잖은 표현으로)을 많이 다룹니다. “달에게 부탁해요”, “바람을 타고 너와 함께”, “사랑해, 사랑을 나의 행성에 심겠어” 등은 아동/청소년 전집에 나왔을 법한 표현이잖아요. 이런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아마도 무척 점잖겠지만, 그 노랫말은 뭐랄까… 우아하게 말해서… 점잖아요. 그래요, 우리 같은 반항아들의 의도와는 몇 광년 떨어져 있어요. 프랑스는 아마 영원히 예예족(1960년대 춤과 노래를 즐기는 청년들을 지칭하는 단어)의 나라일 겁니다. 빈곤한 노랫말에 어떻게 해석해도 자유주의의 미소가 담긴 광고 같은 노래가 유행하겠지요. 저처럼 의심을 품은 가수가, 한 줄 가사에 몇 년이고 목매는 작곡가가 조니 할리데이를 국가적 보물로 찬양하는 프랑스에서 생활하고 생존하려면 부조리의 연속입니다.

프랑스에서 음악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입니다. 연극, 영화, 문학에서 까다롭고 날카롭고 씁쓸하고, 암울한 작품들로 충분한 수의 관객을 만나는 것(영화감독 쥘리앵 고슬랭, 영화인 브뤼노 뒤몽, 최근 작고한『 라인』의 저자 조제프 퐁튀스 등)에 큰 결심이 필요한 것처럼 음악에서는 상투적인 문구와 허약한 노랫말, ‘듣기 좋은’ 노래를 요구받는 듯합니다. 모리스 슈발리에의 ‘번영(욥 라 붐)’의 유산을 물려받아야 하는 마트 전용 노래처럼요. 무엇보다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멘델슨은 프랑스 공연장 기획자들이 반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공연에 뭉클해질 수 있겠지요. 

신중한 공연 기획자들은 관객들이 엉덩이를 흔들고 ‘머리를 비우기’만을 원한다고 가정합니다. 

우리가 3~4년에 한 번씩 앨범을 출시하면서 이 앨범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콘서트를 15일 이상 잡는 일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진기한 일이 지속되려면, 4년에 15일이 아니라 1년에 43일은 공연을 해야 합니다. 멘델슨이 콘서트를 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잡으려면 제가 순수임금 100유로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80유로 언저리에 있는 법정 최저임금을 약간 넘는 거죠. “콘서트를 열면 돈을 얼마나 벌어요?”라고 12세 아들이 물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대답하려고 했지만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콘서트에서 노래를 한 곡 부르면, 다음해에 SACEM(2), SPEDIDAM,(3) ADAMI(4) 등의 단체에서 저작권료 몇 센트를 지급받습니다. 또한, 콘서트 당일은 실업급여 지급일 수에서 제외되는 것까지 계산하면 콘서트 회당 순수임금은 약 60유로(한화로 약 8만원)에 불과합니다.

저희가 ‘일’을 한 것으로 인정받으려면, 다음의 모든 과정을 수행해야 합니다. 

우선 공연 전날 트럭을 빌립니다. 그리고 공연 당일 그룹 구성원 6명이, 전날 빌린 트럭에 올라타 공연장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해서 갑니다. 공연장에 도착하면, 오후에 있을 공연용 장비를 트럭에서 내려 무대에 설치합니다. 그리고 예행연습을 하며 콘서트 시간을 기다립니다. 몇십 명의 관객 앞에서 약 한 시간 반 공연을 합니다. 그리고는 장비를 정리하고 현지 숙소에 묵었다가, 다음날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해 돌아옵니다. 그리고 장비를 각자의 집에 내린 후 빌린 트럭을 반납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끝내야 비로소 ‘일’이 끝납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임금은 약 60유로에 불과합니다. 저는 불평하지는 않습니다. 제 삶을 다른 삶과 바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하지만 49세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프랑스에서 가수를 한다는 것이 계속할 만한 일인지, 권장할 만한 직업인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참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지방공연때 마다 적자, 예술가의 곤혹스런 현실

그래도 멘델슨은 운이 좋은 그룹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남았습니다. 멘델슨은 자기 음반을 만들 제작사와 그 음반을 매장에 배포할 배급사, 세상에 음반 출시를 알려줄 언론 담당자, 관객과 연결하는 데 투자할 당위성을 공연 기획자들에게 설득할 기획 담당자도 있습니다. 최근에 멘델슨이 이번 겨울에 콘서트를 열, 꽤 알려진 공연장에서 공연 기획 예산안을 보내줬습니다. 공연장에서는 입장권 150장을 판매하길 바랐습니다. 

공연장이 꾸려지고 간이매점과 표 판매처가 설치되고 보안 시설을 세우고 멘델슨 출연료(약 2,500유로인데 여기서 음악가들 급여, 트럭 임대료, 기름값, 마찬가지로 최저임금 수준인 기획 담당자 급여 등이 나가죠)를 비롯해 기타 모든 비용을 고려하면, 그러니까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 공연장의 예산은, 입장권 150장을 판다고 했을 때, 적어도 3,000유로가 적자더군요. 장부에 3,000유로가 구멍이 나는 겁니다. 제가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손해가 발생하는 거지요. 매번 제가 적어도 3,000유로를, 사회에 손해를 입히는 겁니다. 

여하튼 공공병원이나 공립학교를 짓는 등 보편적인 공공 서비스를 위해, 또 본질적으로 공공 서비스에 해당되는 문화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멘델슨이 콘서트를 여는 데 드는 실제 비용을 알게 된다는 것은, 선의를 보이는 일부 공연장의 취약한 재정구조를, 그리고 지난 정부의 예의 주시를 받으며 우리 공연을 위해 재정적 위험을 감수한 많은 단체의 현실적 어려움을 직시하게 되는 일입니다.

저는 구름 위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며, “나는 예술가”라며 현실을 인식하지 않아도 될 특권이 있는 듯 행동하는 예술가들을 경멸합니다. 물론 역으로 적자인 공연을 기획하는 것도 수준 높은 문화정책을 유지하려고 지급되는 지원금을 받는 공연장 대부분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멘델슨은 ‘수준 높은 문화적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에서 멘델슨이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으려면 그 일의 예술적 정당성을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저는 가수입니다. 눈이 밝은 평론가들은 제가 ‘수준 높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사회 입장에서 저는 깊은 구멍입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힘듭니다. ‘양’을 맞추지 못한 채 ‘질’만 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불평이 트렌드니까요. 전염병이 휩쓴 지난 2년간 소중한 관객을 빼앗긴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에 불평하는 예술가들의 비참한 사연을 라디오에서 계속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신음하고 속내를 털어놓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파리의 숙소에서, 솔로뉴에 있는 정원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어떤 라디오 방송은 매일 아침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생방송으로 자기들의 불행을, 그리고 용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주로 용기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요. 인이 박히게 들은, 계속해야 한다는 의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저는 지나치게 울어서 라디오를 껐습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저와 같은 직업적 운명을 갖고 있었지만,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신중함과 절제심이 발명되지 않은 어딘가에서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판단할 수 없어요.

예술가라는 것은, 정말 곤혹스러운 직업입니다. 

 

 

글·파스칼 부아지즈 Pascal Bouaziz
가수이자 『멘델슨. 전집(1995~2021)』(Médiapop, Mulhouse, 2021)의 저자.
 
번역·서희정
번역위원

(1) 올리비아 로젠탈과 그녀의 저서 『On n’est pas là pour disparaître 우리는 사라지려고 있는 게 아니에요』(Gallimard, ‘Verticales’ 총서, Paris, 2007)의 중독성 강한 후렴에 대한 오마주.
(2) SACEM, Société des Auteurs, Compositeurs et Éditeurs de Musique; 작사자, 작곡가, 음반 제작자 협회(프랑스 음악저작권협회)
(3) SPEDIDAM, Société de PErception et de DIstribution des Droits des Artistes-Interprètes(de la Musique); 예능 실연가 저작권료 징수 및 분배 협회
(4) ADAMI, Administration des Droits des Artistes et Musiciens Interprètes, 예술가와 예능 실연가 저작권료 관리를 위한 시민협회, SPEDIDAM의 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