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왜 보고서를 감췄나

2011-12-09     오레리앵 베르니에

생태에 관한 국제회의가 몇 달 간격으로 두 건이 잡혀 있다. 더반(남아프리카공화국) 기후변화 회의(2011년 11월 28일~12월 9일)와 리우(브라질)의 지구정상회담(2012년 6월 4~6일)이다. 그러나 경제위기로 인해 이 회의에서 긍정적 진전을 장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09년 코펜하겐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담과 2010년 칸쿤(멕시코) 정상회담이 소득 없이 끝난 후로, ‘기후변화’와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주제는 부질없는 고민으로 치부됐다. 또한 지구정상회담은 10년마다 개최됐으나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1972년 스톡홀름 지구정상회담은 지구 보호 공동투쟁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지핀 반면, 1982년 나이로비 정상회담은 국제사회의 완전한 타협 실패만 확인시켰다. 1992년 리우와 2002년 요하네스버그 정상회담 때는 다국적기업들이 생태 복원을 주창했다. 2012년 브라질에서 또다시 개최되는 정상회담은 ‘녹색’ 자본주의에 대한 찬양 콘서트가 될 게 뻔하다.

지구정상회담에 관한 귀중한 기록들이 유엔 기록보관소에서 잠자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환경에 대한 유엔의 급진 적 선언이 역사에서 지워졌다. 1974년 10월 멕시코 코코욕에서 작성된 이 선언은, 현재 우리가 겪는 국제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국제질서의 윤곽을 선보였다. 유엔의 주도 아래, 1971년 스위스 제네바의 인근 도시 푸넥스에 선진국과 개도국의 환경·경제·사회·개발 분야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이듬해의 스톡홀름 지구정상회담을 위한 이른바 ‘푸넥스 보고서’가 작성됐다. 이들은 자국 정부로부터 어떤 권한도 위임받지 않은 채 비공식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이 보고서는 국가 간 협상 방향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빈곤이 최악의 오염물’이라며 빈곤 퇴치가 급선무라는 진단을 내놨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영향을 받은 푸넥스 그룹 회원들은 “산업화 달성엔 자유무역이 좋은 전략”이라며, 빈곤 국가의 산업화 권리를 옹호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개최된 스톡홀름 정상회담은 푸넥스 그룹의 견해를 참고했다. 정상회담 참가국들은 개발과 환경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자유무역의 배경 아래 국제 환경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 합의에 불만을 품은 일부 개도국들은 서구 열강의 패권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의 도입을 요구했다.

생태-사회 문제 연계한 1974년 보고서

1974년 10월 8~12일, 코코욕에서 새로운 포럼을 개최한 유엔은 국제 전문가들을 불러 ‘자원·환경·개발 전략에 대한 사용’을 논의했다. 캐나다 사업가 출신의 모리스 스트롱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국장과 스리랑카 출신인 가마니 코레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사무총장이 포럼을 총괄했다. 영국 경제학자 바버라 워드와, 반자본주의자와 반미주의자임을 솔직히 밝힌 노르웨이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요한 갈퉁이 패널로 나와 각각 천연자원과 개발의 문제를 다뤘다.  

코코욕에 모인 지식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석유회사·은행·보험사·학교 등을 국유화하며 공산주의 블록에 접근한 스리랑카 정부 내각의 경제기획원 차관인 가마니 코레아가 포럼을 진행했다. 개도국 출신 인사 2명이 포럼의 공동 의장직을 맡았다. 첫 번째 인사는 탄자니아 경제 및 개발계획부 장관 윌버트 K. 차굴라 박사였다. 그는 교사 출신인 줄리어스 캄바라게 니에레레 대통령이 1967년 정권을 잡자 경제개발계획부 장관으로 참여해 주요 산업과 서비스 산업체를 국유화하고, 복지정책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추진했다. 두 번째 인사는 멕시코의 토지개혁 연구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사회학자 로돌포 슈타벤하겐이다. 그는 연구 프로젝트의 초점을 농업계의 계급투쟁에 맞췄다.

루이스 에체베리아 대통령의 주도 아래 1970년부터 유엔 포럼을 개최해온 멕시코는 사실, 광산과 에너지를 국유화하고, 토지를 농부들에게 분배하며 진보적(혁명적이지 않은) 사회정책을 펼쳤다. 멕시코는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나 쿠바 혁명정권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에체베리아 대통령은 직접 코코욕 유엔 포럼에 참가했다.

10월 23일에 작성된 포럼 최종 선언은 사실상 서구 정책에 대한 규탄 선언이었다. 이 선언의 첫 단락은 유엔의 실패, 즉 1945년 입안된 유엔헌장이 부당한 국제질서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굶주린 사람과 노숙인 그리고 문맹이 유엔이 창설되었을 때보다 더 많다. 소수 국가의 손아귀에 집중된 경제 권력은 5세기에 걸친 식민통치의 산물이다.” 포럼 참가자들은 힘의 불균형 문제가 생산 자산의 부족과 연관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 자산의 ‘잘못된 분배와 오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개도국 급진 인물들이 주도한 포럼

이런 측면에서, 2000년대의 성장 반대론자들은 코코욕 선언이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할수록 세력을 확장하는 독재권력(경제권력)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들은 “경제성장 과정은 국가 간 혹은 자국 내에서 불균형을 유지하고 키우는 단지 극소수에게만 혜택을 준다. 그래서 성장은 발전이 아니라 착취다. (중략) 따라서 우리는 성장을 먼저 이룬 뒤에 이익을 공정하게 분배하자는 생각을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코코욕에서 주창한 개발 모델은 경제문제보다는 삶의 방식과 가치, 민중해방, 개인과 집단 권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 있다. 이 모델은 일자리를 가질 권리뿐만 아니라 일에서 개인의 성취를 찾을 권리, 인간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생산방식에 의해 개인이 소외당하지 않을 권리를 명기한 노동권을 담고 있다.

코코욕 개발 모델은 시장경제의 신화를 일소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권 문제의 해결책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한 자율 규제에서 나올 수 없다. 전통 시장은 자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길을 터주기보다는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준다. 그래서 전통 시장은 억지 주문을 부추겨 생산 과정에서 쓰레기를 유발시킨다. 심지어 일부 자원의 활용은 기대치 이하이다.”

GATT의 지배적 담론과는 반대로, ‘불공정한 경제 관계와 터무니없이 싼 원료 가격 탓에 환경 파괴가 초래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전문가들은 개도국들이 합당한 원료 가격을 요구하려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모델로 한 동맹기구를 창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탄탄한 법률 시스템을 구축해 ‘공유재산’에 대한 국제적 경영 관리를 주문하고 있다. 그 목적은 개도국들이 (폐쇄적인) 자급자족 체제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율경제를 운영하는 데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패널들은 부유국에 ‘원조’를 당부하기보다는 제값을 주고 원료를 구입하라고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코코욕 선언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모든 사람은 경제 시스템의 본질을 정확히 알 권리가 있다. 모든 이들이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특히 수십억 지구인 중 한 명으로서 경제 시스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노동이 올린 이익과 자신이 구매하고 판매한 이익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고, 이 이익이 세계 유산을 풍요롭게 하거나 악화시키는 방법을 알 권리가 있다.” 아울러 “환경 교육은 ‘지배’(Domination) 관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를 명시하는 더욱 광범위한 교육 프로젝트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자유무역과 GATT의 무역중재 역할을 옹호한 스톡홀름 정상회담 준비 과정 중에 작성된 푸넥스 보고서와는 반대로, 코코욕 선언은 유엔의 중추 역할과 ‘한 국가, 한 표’의 원칙을 명확히 천명하면서 “개발·환경·자원 활용 문제가 전세계 인류의 복지와 연관된 중요한 글로벌 사안이기 때문에, 각 정부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유엔의 메커니즘을 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또한 유엔은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쇄신과 강화가 필요하다고 우리는 굳게 믿는다”고 했다.

부유국·다국적기업 책임 명시

코코욕 선언이 인상적인 것은 이 선언이 보인 정치적 관점 때문이다. 이 선언은 저개발을 ‘개발 지연’으로 정의하지 않고, 부유국들의 ‘개발의 산물’로 정의했다. 요컨대 다국적기업이 개도국의 원료를 장악하며 자본주의가 팽창되어, 착취자와 피착취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시장경제와 그 이면에 있는 자유무역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코코욕 선언은) 시장경제와의 단절을 공공연히 주장한다. 단순히 (시장경제) 시스템을 개선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그 시스템에서 빠져나오라고 호소한다. 이 선언은 “국가 차원에서 볼 때, 현재 경제 시스템에서 일시적으로 발을 빼는 것도 자율성이다. (국가가) 경제적 의존성을 영속시키는 시스템에 전적으로 동참하며 자율성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따라서 코코욕 선언은 국가들이 외부의 의존성에 굴복하지 말고, 집단적 자율성을 확립하고 협력해 공동자산을 관리하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이 선언은 주권국들이 국제적 차원의 생태사회주의를 건설해주길 호소한다. 더 나아가 이 선언을 주도한 이들은 “부유국들이 과소비와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겠다”며 “생산과 소비가 늘어날수록 항우울제 소비와 정신병원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농담까지 했다.

코코욕 선언이 발표된 직후, 이 포럼을 주도한 의장은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에게서 “이 선언을 전면 거부한다”는 긴 전문을 한 통 받았다. 이어 경제대국들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경제대국들은 1973년의 경제위기 상황을 틈타 비판국들을 길들이거나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소외시켰다. (시스템에서) 소외된 국가들은 폭등하는 수입 가격 때문에 도탄에 빠졌다. 부유국들은 코코욕 선언이 주창한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에 대응하기 위한 후속 조처에 들어갔다. 이들은 개도국이 다수인 유엔의 영향력을 희석시키기 위해 회담 장소를 다각화했다. 1975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경제협력포럼에는 부유국 8개국과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주요 회원국 27개국만 참가했다. 그 어떤 나라도 자본주의의 근간이나 노동의 국제적 분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계화’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주요 개도국들은 미국·유럽·일본에 ‘세계경제에서 더 큰 역할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이 국가들에 오히려 득이 되는 행동을 했다. 게다가 이 개도국들은 (시장경제의) 규칙을 변경할 마음도 없었다. 1971년 8월 9일, 인디라 간디가 집권하던 인도는 소비에트연방과의 평화우호조약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경제정책, 이른바 ‘제3의 길’을 추구했다. 군부 독재정권이 들어선 브라질은 서구 자본에 유입되며 기록적인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결국 198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적 반혁명은 코코욕의 요구들을 수포로 만들어버렸다.

미국 등 전면 거부 뒤 비판세력 배제

현재, 유엔 사이트를 검색해야만 1974년 10월의 심포지엄(코코욕 정상회담)을 상기하는 몇 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이트에서 발견한 최종 선언의 짧은 문구는 이랬다. “가야 할 길은 절망의 길도, 세상의 종말로 치닫는 길도 아니며, 그렇다고 잇달아 내놓는 기술적 해결책에 마냥 낙관적인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 길은 (균형 잡힌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적 한계’를 편견 없이 꼼꼼하게 평가해야 하는 길이며, 집단연구를 통해 또 다른 ‘내적 한계’인 기본권(인간의 기본 욕구 충족)을 충족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길이며, 이런 권리들을 대변하는 사회구조를 구축해야 하는 길이며, 우리의 세계 유산을 풍요롭게 하고 보존하는 기술과 개발 스타일을 고안해야 하는 인고의 작업이 필요한 길이다.” 코코욕 최종 선언의 파격적인 정치적 전망이 철저히 지워진다면, 어느 누가 코코욕의 업적을 되새길 수 있을까?

/ 오레리앵 베르니에 Aurélien Bernier 작가
주요 저서로 <유럽연합에 대한 불복종>(Fayard·파리·2011) 등이 있다.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