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루스코니즘 40년, 쇼는 끝났다

2011-12-09     피에르 뮈소

 베를루스코니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이탈리아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인 자유국민당(Popolo Della Liberta·‘포르자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18년 전 창당)의 당수로서 국회의원직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총리 사임 뒤 11월 16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다시 경영인으로 돌아간다. 이번엔 한 정당의 경영인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재조직해야 한다.” 자유국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선 북부동맹과 함께 하원에서 상대적 다수의 위치를 점하며, 상원에서는 표결 저지가 가능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 총선(늦어도 2013년 봄)까지 베를루스코니는 마리오 몬티의 ‘테크노크라트 정부’ 운명을 손안에 쥔 셈이다.

‘일 카발리에레’(Il Cavaliere·기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베를루스코니는 마리오 몬티 정부가 노동권과 연금 축소, 세금 인상, 민영화 확대, 다양한 분야의 규제 완화 등을 추진하면서 인기가 하락할 경우 다시 복귀할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베를루스코니의 사임 이유가 총선 패배 등이 아니라 금융시장과 유럽·국제기구의 압력 때문이라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탈리아에서 정치·경제·언론 등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금융 테크노크라트의 압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공부채가 1조9천억 유로로 세계 4위를 기록하는 동안, 금융시장 투기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국채 금리와 스프레드(1)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권력의 민주적 정당성은 운명처럼 초국적 자본의 정당성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철학자 미첼레 프로스페로가 ‘정치 코미디언’(2)이라고 묘사한 베를루스코니라는 인물이 이 상황을 대변한다.

베를루스코니의 인기는 2010년 여름, 지안프란코 피니와의 결별로 의회에서 다수당의 지위가 흔들리고, 지방선거와 지난봄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면서 22%까지 떨어졌다. 끊이지 않는 소송 사건, 법관들과의 불화, 경영자들에 대한 방임, 그리고 무엇보다 무분별한 섹스 행각(‘붕가붕가’라는 말을 유행시킨) 때문에 가톨릭과 여성 유권자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지난 40년 동안 베를루스코니는 ‘베를루스코니즘’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이탈리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침체의 시대’(1960년대 말~1980년대 말)의 극적인 상황에서 그는 최초로 대규모 상업방송사를 차리고 이탈리아 시청자에게 오락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 뒤 전국 채널 3개, 영화사, AC밀란 축구팀, 대형 출판사와 언론사를 모두 아우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미디어 회사 피니베스트(Finivest)를 설립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이탈리아의 최고경영자(CEO)’, ‘경영 대통령’을 자칭했다. 베를루스코니즘은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와 지식인 사회를 양분한 기독민주당과 공산당을 대신하는 제3의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베를루스코니는 텔레비전을 적극 활용하며 이탈리아인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정치를 펼쳤다. 그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뒤섞어버림으로써, 국가 지도자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이탈리아 역사와 동일시했다. 2001년에는 이탈리아의 모든 가정에 자신의 삶을 기록한, 120쪽에 달하는 컬러 사진 에세이 <이탈리아의 역사>(Una Storia Italiana)를 보내기도 했다. 유권자-시청자는 나르시시즘과 스펙터클에 사로잡혀 그를 마치 텔레노벨라(사회적 이슈를 담은 남미의 드라마 형식) 혹은 시트콤의 주인공인 양 여겼다. 마치 구조가 전도된 파놉티콘(원형감옥) 속 죄수처럼 이탈리아 국민이 일상적이고 가상적인 찬반투표(‘베를루스코니를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나 혹은 그들’(O me o loro))에 참여하는 동안 지도자의 통제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덕분에 이 이탈리아의 ‘기사’는 총 3300일을 집권하면서 전후 최장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즘이 진정한 승리를 쟁취한 곳은 문화적 혹은 인류학적 영역이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의 집단의식 속에 ‘네오 텔레비전’(3)의 문화적 코드와 마케팅 슬로건, 소비주의적 환상을 심는 데 성공했다. 가수인 지오르지오 가베르는 “내가 두려워하는 이는 내 밖에 있는 베를루스코니가 아니라 내 안에 살고 있는 베를루스코니다”라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즘은 이탈리아 사회의 한 정치적·지적 경향으로 자리잡았고, 오락과 낙관주의,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는 일찌감치 “이런 비속화의 거대한 경향이 단지 ‘소비하는 인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소비 이데올로기 외에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산업계급이 원하던 사회 모델을 강요하고 있다”(4)고 간파했다.

1990~2000년대 베를루스코니만큼 이런 ‘문화’를 잘 대변한 이는 없었다. 정치가 위기에 처하자 그는 자신이 직접 정치 무대에 나서서 이탈리아인들의 상상력을 ‘소비에의 열정’, 즉 파솔리니가 말한 ‘복종에의 열정’에 가둬버렸다. 그에 굴복한 대가로 이탈리아인들은 현재 테크노크라트와 금융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쇼는 끝났다.

/ 피에르 뮈소 Pierre Musso 렌2대학 교수
<사르코베를루스코니즘: 최후의 위기?>(Editions de l’Aube·라투르데귀·2011)의 저자.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두 국가 간 국채금리 차이. 독일에 대한 이탈리아 국채 스프레드는 베를루스코니 사임 직전 5%까지 치솟았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 정부보다 채권자들에게 5% 비싼 이자를 물어야 한다.
(2) Michele Prospero의 책 제목에서 인용. <Il comico della politica. Nichilismo e azindalismo nelle comunicazione di Silvio Berlusconi>, Ediesse, 로마, 2010.
(3) 움베르토 에코는 1983년 주간지 <L’Espresso>에 기고한 글에서,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팔레오 텔레비전’(1960년대의 공영방송)과 베를루스코니 소유의 방송채널처럼 시청자와 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네오 텔레비전’을 구별했다.
(4) Pier Paolo Pasolini, <해적판 글>, Coll. ‘Champs arts’, Flammarion, 파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