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명을 제조하는 자들

2011-12-09     제라르 포미에

미국정신의학협회(APA)가 2013년 일명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이라 부르는 정신질환 편람 제5차 개정판을 발간할 계획이다. 그에 앞서 다양한 의견 청취를 위해 개정판 시안을 온라인에 공개했다. <<원문 보기>>

전세계 정신의학 교리가 된 DSM

<DSM> 발간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정신장애’ 진단을 위해 작성된 이 통계 편람은 애초 미국 실정에 맞춰 제작됐지만,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948년 창설된 세계보건기구(WHO)가, 미국 전쟁부(War Department)(1)의 <메디컬 203>에 이어 <DSM>을 국제질병분류(ICD·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s)를 작성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 급히 활용해 세계적 영향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과연 이 지침서는 얼마나 과학적 가치를 지녔을까? 이 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책의 진단 방식이 모든 과학적 기준에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일반적으로 어떤 소견이 과학성을 지니려면 그 소견에 진실을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결정적 불변조건(Invariants)이 담겨 있어야 한다. 하지만 두통 등의 예에서 보듯, 어떤 증상은 다양한 질병의 공통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 진단은 먼저 환자를 문진(환자의 증상을 찾아내는 과정)한 다음, 의학적 검사(임상학적 증상을 밝혀내는 과정)를 하는 순으로 진행해야 한다. 검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일단 불변조건이 확립되면 각 소견은 예측 가능성을 지니게 되고, 경험을 통해 진실 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이를테면 질병의 원인이 심리적 요인에 있다면, 심리적 갈등이 신체의 고통으로 나타난 이른바 ‘전환’(Conversion) 장애에 해당한다.  진단이 내려지고 나면, 다음은 그 결과를 토대로 심리적 원인을 해결할 차례다. 다시 말해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DSM>의 접근 방식은 정반대다. <DSM>은 장애를 일으킨 원인은 무시하고 겉으로 드러난 각종 ‘장애’만 나열하기에 바쁘다. 장애를 일으킨 상황이나 병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대체 임상의가 ‘장애’라는 한 가지 증상만 가지고 감히 병을 진단하는 의학 분과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DSM>은 이런 식으로 각종 기능장애를 기술하는 데 만족하며, 정신적 고통에 피상적 성격의 상투적 병명만 갖다 붙일 뿐이다. 그럼에도 <DSM>에 분류된 병명은 한없이 늘어만 가고 있는 실정이다. 1952년 <DSM> 목록에는 106가지 정신질환이 기재됐다. 오늘날 이 책에는 무려 410개에 이르는 각종 ‘장애’가 나열되어 있다. 앞으로 발간될 개정판에는 최소 20가지 병명이 추가될 것이다. 가장 최근에 등재된 병명 중에는 ‘과잉성욕장애’(Hypersexuality Disorder)나 ‘강제적 성도착장애’(Paraphlilic Coercive Disorder) 등이 있다. 도착증(Perversion)이라는 기존 부정적 병명을 대체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 전에도 ‘성격장애’, ‘과잉행동장애’, ‘우울증’ 등 잡다한 병명이 있었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수많은 의학용어가 난무하면서, 그만큼 무분별한 의약품 처방이 더욱 쉬워졌다.

의학적 방식 무시한 단선적 접근

더 우려스러운 사실은 이제는 병명을 늘리다 못해 심지어 미래에 발생할 정신장애까지 병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환자다. 다만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쥘 로맹의 희곡에 등장하는 크노크 박사의 주장대로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모두 잠재적 환자”인 셈이다. 이른바 ‘전문가’라는 무리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우울증을 앓는 환자가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며, 이를 위해 예방적 차원의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위험증후군’(Risk Syndrome)이 등장함에 따라, 앞으로 정신장애의 전성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본다. ‘정신질환 위험증상증후군’(Psychosis Risk Syndrome)이라는 병명이 새로 생겨나면서, 이제는 예방이 아니라 예측 차원에서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수많은 청소년을 항환각제로 치료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 셈이다.

정신이상의 위험성을 ‘예측’하는 행위는 아직 정신질환자도 아닌 사람을 평생 환자로 낙인찍어 약에 의지해 살아가도록 만들 수 있다. <DSM>은 서문에서 이 책이 어떤 이념에도 경도되지 않고, 어떤 이론도 전제하지 않은 철저히 객관적인 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심리상의 인과관계를 부인하는 것만으로 <DSM>은 본래적인 생체상의 인과관계를 더 중시하는 셈이 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그 어떤 경험적 증거, 심지어 저명한 신경과학 연구로도 증명할 길이 없는 영역이라는 점이다.(2)

<DSM>이 추구하는 방법론이 객관적이지 못한 이유는 또 있다. 이 책은 임상학적 관찰 결과를 토대로 정신질환을 분류한 것이 아니다. 무작위로 취합한 정신과 전문의의 의견을 근거로 삼고 있다. 결코 모범적인 과학 방법론의 사례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론을 활용한 결과는 어땠을까? <DSM>은 1987년까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고대시대부터 줄곧 병으로 인정돼온 히스테리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신경증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DSM>을 강요한 것은 의학계의 외부 세력이었다. 먼저 보험회사가 여러 나라에서 보험료 지급 기준으로 <DSM>을 요구했다. 제약회사도 <DSM>에 분류된 질환과 처방약을 짝지은 기준표를 선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에서도 <DSM>을 수업과목으로 채택했다. <DSM>과 시각을 달리하는 학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심리상의 인과관계’는 너무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개념이라는 이유로 배척됐다. 그 결과 이 주류 의견에 딴죽을 거는 학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미래의 임상의들은 전통 임상학을 전혀 배우지 못한 채 의학 과정을 마쳤다. 학계는 기존 이론과 완전히 단절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프랑스 정신의학 연구는 모조리 <DSM>과 약리학 지식에만 의지했다. 그저 몇몇 심리학과만 학문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이론을 통한 접근법을 간신히 유지할 뿐이었다.

의사인가 마약상인가

이런 현실이 치료 과정에 미치는 영향은 심히 우려스럽다. <DSM> 진단은 겉으로 나타난 행동을 보고, 이에 상응하는 피상적 병명을 찾아내기에만 급급하다. 정신병리학적 심리구조는 심도 깊게 살펴보지 않는다. 임상정신의학에 완전히 역행하는 셈이다.(3) 데이터로 정리된 표만 보고 평가가 가능하다는 태도일 수 있다. <DSM>만 놓고 보면 굳이 정신과 전문의나 의사, 간호사가 따로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저 합법적인 마약상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약만 처방할 경우, 이상 증세를 완화해주는 것이지, 결코 병의 원인까지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 번의 약 처방은 또 다른 약 처방을 불러온다. 급기야는 중독으로까지 치닫는다. 결국 처음에 효과적이던 약도 최종적으로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우울증’ 경우를 살펴보자. 의사는 우울증을 정신질환으로 진단한다. 우울증이 다양한 심리구조에서 비롯된 증상이라는 점은 무시한다. 한번 우울증을 진단받고 나면 환자는 평생 항우울제만 무분별하게 처방받는다. 특히 약이 효과 없을 때, 약 처방은 더욱 증가한다. 대표적인 예가 ‘프로작’(Prozac)이다. 과거 프로작은 대중 사이에 널리 소비된 의약품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위험한 약으로 통한다.(4)

수많은 나라에서 <DSM>을 의료예산을 책정하는 기준으로 활용하면서 <DSM>은 각 나라의 의료 시스템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기반을 둔 치료법은 전문적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실력 있는 의료 인력을 고용하는 데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초기 비용만 비쌀 뿐이지, 결과적으로는 더욱 경제적인 방법이다. 비용 차이는 <DSM>을 진단 기준으로 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의 약 처방 실태만 봐도 잘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약 1만5천 명의 어린이가 ‘과잉행동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리탈린’(Ritalin)을 처방받고 있다. 반면 영국에서는 이 수치가 무려 15만 명에 달한다.

좀더 일반적 상황을 살펴보면, 보통 신경증의 경우 관계에 기반을 둔 치료를 하는 동안 향정신성 의약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또 경미한 정신질환에는 아예 약을 먹이지 않거나 가끔 약을 복용하도록 한다. 프랑스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어린이가 약을 복용하는 사례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약 복용이 치료 과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병세를 호전시키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치중한 치료이다. 제5차 개정판 <DSM-5> 편찬에 참여 중인 전문가위원회가 제약산업과 돈으로 끈끈하게 얽힌 사이라는 점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이 관계는 수십 번 폭로됐다(5)). 그도 그럴 것이 향정신성 의약품은 수익성이 높은 시장이다. 2004년 미국에서는 항우울제가 203억 달러, 항환각제는 144억 달러의 수익을 안겨준 효자상품이었다. 신약 마케팅의 필요성에 의해 새로운 유형의 정신질환이 <DSM>에 등재될지도 모른다.

시장 이데올로기에 구속된 머리

더 심각한 문제는 <DSM>이 인간에게 신자유주의 정신을 주입하는 데 기여하는 점이다. <DSM>이 과학적 타당성이 부족하고, 심리치료에 걸림돌로 작용하며, 국가에 많은 사회비용을 발생시키고, 학문과 교육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비난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하지만 의료 부문이 민간의 상업적 이익에 활용되는 현실을 단순히 비난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시장 이데올로기에 의해 합리화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오늘날 경쟁을 거의 법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상을 여기저기 확산시키고 있다. 대체 자유주의의 강력한 힘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막스 베버가 말한 천국행을 선택받은 자와 지옥행을 언도받은 자를 구분하는 프로테스탄트 문화가 아닐까? 결국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정치적 계명이 오늘날 공격적 자본주의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존속하는 셈이다. 그 정신이 이제 우리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장애’, ‘부전’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실패를 상징하는 징표로 인식된다. 사회규범과의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선인 셈이다. 새로운 질병 목록을 작성할 때마다 차츰 ‘병리적’으로 보이는 증상까지 질병의 범주에 포함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예절에 어긋난’ 태도마저 치료받아야 할 질병으로 취급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느끼는 슬픔이 2개월 넘게 지속되면 병으로 인식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그보다 더 기간이 짧아진 사례도 있다. 시장 경쟁에 적합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도 치료가 권장된다. 착취자 대 피착취자, 카우보이 대 인디언, 흡연자 대 비흡연자…, 이들 사이를 가르던 경계선이 이제는 <DSM>의 예언을 피해간 선택받은 소수와 고통으로 시름하는 인간 군상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늘어날 <DSM>의 범주를 그 누가 피해갈 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에 불만감이 든다고? 그렇다면 치료를 받으라! 질서유지에 정신질환까지 동원되는 이 세상에서 감히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 제라르 포미에 Gérard Pommier 정신분석가 겸 스트라스부르대학 명예교수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1) 1947년 전쟁부와 해군부와 합쳐져 국방부가 탄생했다.
(2) 장 피에르 샹죄, <뉴런 인간>, 아셰트 출판사, 파리, 1998.
(3) 오토 컨버그, <심각한 인격장애: 정신치료전략>, 프랑스대학출판부, ‘Le fil rouge‘ 총서, 파리, 1989.
(4) 크리스토퍼 레인, <정신의학과 제약산업이 어떻게 우리 감정을 의료의 영역으로 만들었는가>, 플라마리옹 출판사, 파리, 2009.
(5) Lisa Cosgrove, Sheldon Krimsky, Manish Vijayaraghavan, Lisa Schneider, ’Financial ties between DSM-IV panel members and the pharmaceutical industry‘, <Psychotherapy and Psychosomatics>, 제3권, 매사추세츠대학, 보스턴, 200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