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자’ 슈미트가 ‘적’을 규정하는 법

2022-05-31     에블린 피에예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은 '위기'로 불린 최근의 사태에서 급진주의자들을 깎아내리고, 공포심을 도구 삼아 각종 형태의 긴급 사태를 발동했다. 자유주의의 이런 권위적인 성격은 당면한 상황에 의해 좌우되는 것일까, 아니면 자유주의 정치와 경제의 필연적인 본질일까?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흔히 접할 수 있지만, 모호한 구석이 적지 않다. 한때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던 ’대중 민주주의’라는 개념에는 대치되며, ‘반(反)자유주의’에는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설명은 왠지 석연치 못하다. 경제적 자유주의와도 자연히 연관이 있다지만, 정말 그뿐일까? 최근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참모진 앞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모든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라며 환영할 만한 정의를 제시했기 때문이다.(1) 경제적 측면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자유롭고, 왜곡되지 않은 경쟁에 대한 권리는 모든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 문제로 귀결된다. 이어지는 다음 발언도 의미심장하지만, 의도는 좀체 파악하기 어렵다. “자유와 책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맥락을 이해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이후, 마크롱 대통령은 2021년 12월 31일 신년사에서 백신 접종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의중을 드러냈다. “자유로운 시민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의무는 권리에 우선합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시민들이 국가가 정의한 ‘책임’을 이행해야만 비로소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무책임한 사람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다.”(2) 마크롱 대통령은 시민권에 내재한 이 의무를 재차 강조했다. 마크롱은 올해 4월 대선 2차 결선을 앞두고 장시간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희망하는 정치에 관한 전반적인 생각을 밝히며 사회를 동요시키고 분열시킬 위험이 있는 사회적 긴장과 모순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무책임하다고 보는 것이 무엇인지도 설명했다. 그리고 노란 조끼 시위를 언급하면서 모든 종류(공개 토론의 경우를 포함한)의 폭력적인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경찰의 폭력 진압을 지적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지만, 명백히 시위대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관건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유대와 존중, 배려가 싹틀 수 있는가입니다.”, “폭력은 반목을 부릅니다.”, “그래서 이른바 ‘순순한 의지’라고 할 수 있는 급진주의와의 관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되짚어 봐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니까요. (...) 그러려면 타협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 더불어 살아간다. 하지만, 타협은 다소 비대칭적인 성격을 띤다. 타협해야 하는 주체는 오직 시민들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급진적이고, 얼마나 온건하든, 혹은 타협을 완강히 거부하든 여부와 상관없이 시민은 잠재적으로 폭력의 원천이며 ‘무책임한’ 존재라는 시각이다. 민주주의가 방어적으로 자유를 계속 보장하려면 급진적으로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이렇게 구성원을 배제하는 방식은 과연 법치주의와 어떻게 결부될까? 

정부 대변인 가브리엘 아탈(Gabriel Attal)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 권리보다 의무가 우선하는 사회계약을 재정의해야 할 것이다”라며 마크롱 대통령의 확고한 입장을 옹호하며 설명했다.(3) 하지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권리보다 의무를 앞세울 수 있을 것인가? 『Du Contract Social 사회계약론』의 저자 장자크 루소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고 직설적인 답을 내놓았다. “가장 강한 사람도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으면 영구히 지배력을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진정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나치를 지지했던 법학자 슈미트의 모순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자유주의를 둘러싼 쟁점과 모순적인 논리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슈미트는 그의 행적 탓에 악명이 높았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나치당에 입당해 ‘지도자는 법을 지킨다(Der Führer Schützt das Recht)’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 나치 독일이 1934년 6월 30~7월 2일 사흘에 걸쳐 독일 전역에서 돌격대와 독일 국방군 내 저항 세력, 반(反)나치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 당시 나치 돌격대(SA, Sturmabteilung)가 자행한 반체제 지도자 숙청을 법적으로 정당화했다. 1936년 법학자 회의에서는 독일 법에서 ‘유대인 정신’의 흔적을 없앨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슈미트는 저명한 입헌주의자이자 극도로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였고, 적극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1930년대에 자유 사상의 한계에 관한 몇 가지 분석을 내놓아 르네 카피탕(René Capitant, 법률가),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작가), 알랭 드브누아(Alain de Benoist, 뉴라이트 Nouvelle Droite 운동 창시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샹탈 무페(Chantal Mouffe,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철학자)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 법학자, 철학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우파는 강한 국가의 필요성에 관한 슈미트의 논증을 반겼다. 철학자 장-클로드 모노(Jean-Claude Monod)가 지적했듯이, 좌파에서는 폭력만큼이나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자유 질서에 대한 신화를 깨트린 점을 높이 샀다. 슈미트는 의회주의, 정당의 다양성이 거대한 속임수라며 냉소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개인주의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다양한 압력 단체의 권리 확장에 대한 요구로 이어져 사회를 정치화하고 국가를 비정치화한다고 봤다. 공통의 진리가 없이는 합의가 있을 수 없고,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는 영구적인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는 “현대 대중 민주주의의 결과로 생겨난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페이소스가 가져오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정치적 이상에 지배되는 국가의 민주의식 대립이 원인이다.”(4) 그러나 합의, 즉 토론을 통한 합리적인 타협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국가가 주도적으로 합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자유주의가 법치로써, 폭력의 영역이자 정복의 망령이나 다름없는 정치의 싹을 뿌리 뽑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는 적을 지정할 수밖에 없다.

 

레이몽 아롱, “슈미트는 나치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공적 논의라는 윤리를 바탕으로 이성이 만인 공통이라고 믿기 때문에, 오해나 이해에서 비롯된 반목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래서 민주적 기능 덕분에 갈등과 이해의 차이를 해소하거나 유예한다고 자부하는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이 증명하듯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자살 행위라고 봤다. 사람들이 동지와 적을 쉽게 나눌 만큼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적대감이 팽배해지면 그 적대감은 정치적 적대감으로 변하는데, 이런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힘을 시험하는 것이다.(5) 다시 말해, 논쟁, 타협, 의견의 다양성에 있어 무엇이 우위를 점하든 정치는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정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적을 규정해야만 행동이나 의사 결정이 가능해진다. “국가, 공화국, 사회, 계급이나 주권, 중립국이나 전체 국가와 같은 단어는 누가 이 단어를 수단 삼아 목적을 달성하고, 싸우고, 논쟁하며, 논박하는지 모른다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6)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적은 자유주의 가치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과격분자는 어떨까? 마크롱과 그 일원들이 보기에 급진주의자들은 공공 이익의 적수다.

공공의 이익이 위협받으면 당국은 ‘위기’가 닥쳤다고 말한다. 위기는 적을 상정하고, 적을 무찌를 만한 수단을 마련하게 해준다. 슈미트가 결코 나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할 만큼 그를 추종했고, 슈미트의 주요 저서 중 한 권을 편집하기도 했던 레몽 아롱은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에 “적을 이해하려면 도덕적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말 그렇다. 자유주의의 중심에서 정치를 탈정치화하는 근원적인 시도를 하려면 위기는 “자동으로 가치관의 충돌로 해석하게 되며” 계급적 적대감과 같은 논의는 회피하고, 위기를 넘기 위해 선택을 정당화하게 된다.(7) 위기는 이런 가치를 수호하고, 적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며, ‘비상사태’를 선포해 자유주의적 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슈미트에 따르면, 이는 법적 권한으로 법을 장악하는 초법적인 권한을 발휘해 반대 진영을 모두 위법으로 내몰 수도 있게 한다.(8) 

이러한 법치주의로부터의 초법적 이탈은 다양한 방식으로 각종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겠지만, 대부분은(최근 있었던 사건이나 테러, 혹은 전염병의 대유행 같은) 공동의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한다는 기치를 내세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권위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나?

프랑스에서 긴급 사태는 비상사태의 변형이다.(9) 1955년 4월 3일 법으로 제정됐으며 1960년과 2015년 11월 20일 법을 포함, 여러 차례의 개정이 있었다. 공공질서를 저해하거나 공격으로 인한 긴급한 위험이나 공공재난(자연재해)이 발생하면 각료 회의는 법령으로 긴급 사태를 선언할 수 있다. 긴급 사태 기간은 본래 12일이지만 의회에서 법률을 통과시켜 기간을 연장하게 된다. 비상사태가 가동되면 민간 당국의 권한을 강화하고 특정한 공공 단체나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1955~2015년 ‘정치적’ 사유(알제리 전쟁 중 공격과 2005년 테러 이후 시내 폭력 사태 포함)로 총 여섯 차례의 긴급 사태가 선포됐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2020년 3월 23일 법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법률 체제인 보건 긴급 사태가 가동됐고, 공중 보건법에도 임시 반영됐다. 안보가 아닌 보건에 관한 이 예외적인 체제는 대성공을 거뒀다. 100여 개국에서 자체적으로 긴급 사태를 가동했다.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법치주의는 국가를 법으로 지배하고, 삼권분립과 개인의 권리 보장을 위해 공공의 행동에 제약을 건다. 자유민주주의도 달려져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베르나르 카제뇌브(Bernard Cazeneuve) 당시 내무장관은 “긴급 사태는 특수 상황이 아닌 법치주의의 일부”라고 하면서 “특별법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법치주의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르몽드>, 2016년 7월 20일)라고 덧붙였다. 이는 복합적인 관념의 좋은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의회주의에 반대하지만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경제를 규정한 슈미트의 반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분명 큰 시사점을 준다. 합의에 기반한 현대사회의 새로운 국면에서 합의에 대한 자유주의 조직의 모든 저항은 구식으로 규정되고, 불건전한 것으로 취급된다.(10) 불협화음은 적이며, 비상사태는 그 구조에 알맞은 정치 이론으로 대두된다. 한편, 선량한 민주주의자들은 더 이상 시민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는 위험한 반민주주의자들로 전락한다. 안보와 보건 위기는 조만간 생태적, 경제적 위기가 되고, 위기의 순간에 선택된 분야에서 권위적인 국가가 등장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과 사회적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선의 이름으로 탈정치화된 질서를 의도적으로 가린다.

2018년 1월 3일에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에 따르면 “반(反)자유주의의 유혹은 극단적 개방성,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 채 어떤 형태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약점을 이용해 확산한다.” 슈미트를 제외하면, 이보다 더 정확한 평가가 어디 있겠는가? 마크롱 대통령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극단이 ‘극단적인 중도’이자 주도적으로 다른 ‘극단’에 대항하며 위험을 초래하는 자유주의의 적…, 즉 부르주아 진영인지는 불분명하다.(11) 1932년 당시 슈미트는 아직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았다. 철학자 그레구아르 샤마유(Grégoire Chamayou)가 설명했듯이, 슈미트는 “선동적이고 억압적인 기구를 통해 자유주의 경제를 실현하고 극단적 중도에 편승한다는 발상”을 옹호했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봐야 할까, 혹은 아닐까?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민주주의에 관한 선언, 2021년 12월 9일. 
(2) <르파리지앵 Le Parisien>, 2022년 1월 4일.
(3) <르파리지앵 Le Parisien>, 2022년 1월 29일.
(4) Carl Schmitt, 『La notion de politique, Théorie du partisan 정치적인 것의 개념』, Champs Flammarion, Paris, 1992. 
(5), (6) Carl Schmitt, op.cit.
(7) Marie Coupy, 『L’état d’exception, ou l’impuissance autoritaire de l’État à l’époque du libéralisme 비상사태, 자유주의 시대의 무력한 국가 권위주의』, CNRS Éditions, Paris, 2016.
(8) Carl Schmitt, 『Légalité et Légitimité 합법성과 정당성』,Maison des Sciences de l’Homme-MSH, Paris, 2016.
(9) Jean-Claude Monod, 『Penser l’ennemi, affronter l’exception 적을 생각하고, 예외를 마주하다』, La Découverte/poche, Paris, 2016.
(10) Chantal Mouffe, 『Penser la démocratie moderne avec, et contre, Carl Schmitt 카를 슈미트에 대한 찬반으로 현대 민주주의를 생각하기』, <Revue française de science politique>, 42-1, 1992.
(11) Les Matins, <France Culture>, 2022년 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