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미국 대법원
공공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미국 법원의 역사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이 은퇴를 결정함으로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후임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후임자로 흑인 여성 커탄지 브라운 잭슨이 사상 최초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대법원의 정치적 균형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대법원은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브레이어는 사퇴하라.”
2021년 4월 9일, 워싱턴 DC. 트럭 한 대가 국회의사당 거리를 가로질러 대법원 계단 앞에 멈춰 섰다. 트럭에는 대법원의 최고령 대법관을 공격하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친민주당 성향의 한 단체가 후원한 이 캠페인은, 80세가 넘은 중도 진보 성향의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을 압박해 젊은 법관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요구했다. 진보 진영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에 타계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자진해서 은퇴했어야 한다며 원망을 내비쳤다.
이 페미니스트 대법관이 별세하자마자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대법관으로 임명한 탓에, 대법원에서 진보 성향 법관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법원이 정치적 독립성에서 정당성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한 브레이어 대법관이 이 트럭 사건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1) 여하튼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파악했다. 지난 1월 27일, 오는 6월에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법관들도 보통사람들과 같다”
과거에 법관 교체로 보수주의자들이 이득을 봤던 것과 달리, 이번 일이 대법원의 이념적 균형을 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2018년에 한 기자는 공화당 원내대표인 미치 매코널 의원에게 그의 임기에 이룩한 최고의 업적을 꼽아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는 자신이 제출한 주요 법안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의 진짜 업적은, 자신이 속한 당과 가까운 법관들이 대법원을 통제하도록 대법원을 개편한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인들이 법관의 이념적 성향에 이토록 집착하는 나라가 있는가? 여론이 대법원에 제출된 주요 소송 정보를 알고 경계하며 뒤쫓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미국에서도 심지어 뉴스 편집국이 무너지고, TV 채널에서 다루는 국제 뉴스라고는 시시하고 빈곤한 이슈들뿐인 상황에서, 미국의 주요 매체 중 대법원에 특파원을 파견하는 기관은 없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 각 진영의 변호사들이 9명의 대법관에게 자신들의 소송사건을 제출하면, 법원의 판결은 마치 사전 변론처럼 사실상 뉴스 현안을 낭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법관 9명의 질문과 반응은 온갖 예측과 공론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각 법관은 반대 의견을 발표하거나, 다수결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대법원의 권한 범위를 둘러싼 논쟁은 미국 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일어났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1787년 헌법 제정에 공헌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법관에게 국회의원의 의사에 반대할 권리를 허용하는 권력 체제를 옹호했다. 해밀턴의 이같은 의사는 법전의 최종 판본까지 유지되지는 못했다. 또 다른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3대 미국 대통령(임기 1801~1809) 토머스 제퍼슨은 “법의 통제”는 “매우 위험한 독트린이며, 우리를 과두정치의 횡포에 종속시킬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그는 “우리의 법관들은 보통사람들 수준으로 정직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들도 보통사람들처럼 당, 권력, 자기 집단의 특권에 집착한다”라고 덧붙였다.(2)
1803년에 미국 대법원은 스스로 이 논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했다. 대법원은 최초로 연방법을 무효화했으며(마버리 대 매디슨 판결), 헌법과 관계된 사건에서 사법권을 신성화했다(이와 관련한 로마조약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많은 판결들을 통해 유럽 사법재판소가 이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헌법의 권리는 아프리카 출신과는 무관하다”
수십 년이 흐른 뒤인 1857년에 대법원은 드레드 스콧 사건을 심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흑인 노예인 드레드 스콧의 주인이 미국에서 노예제가 불법인 지역으로 그를 데려가면서 스콧은 자동적으로 자유민 신분이 됐다. 하지만 법원은 헌법에 명시된 권리는 자유민이건 노예이건 아프리카 출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면서 노예 소유주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에 빗발친 항의의 목소리는 1860년에 발발한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훗날 헌법에 통합된 ‘평등보호조항’이 채택되는 데 기여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1861년 3월 4일 취임 첫 연설에서 모든 형태의 법적 횡포를 거부했다.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정부 정책이 대법원의 결정으로 돌이킬 수 없이 수정돼야 한다면, (…)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 되기를 중단하고 이 잘난 법정의 손에 습관적으로 국가의 통치를 맡길 것이다.”
링컨의 경고는 무시됐다. 1883년에 법원은 전후(戰後) 시민권법을 무효화했다. 당시 노예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법원이 “자국 영토에서 자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힘이 전혀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1895년에는 법관 9명 중 4명이 반대했음에도, 법원은 연방소득세에 집행할 수 없는 조건을 붙여 폐지해버렸다(이 중 한 법관은 법원의 결정이 ‘그야말로 부유층에 세금을 부과할 권한을 포기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런 제한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1913년에 헌법이 개정됐다. 또한 법원은 1905년에 뉴욕 주가 제빵사의 최대 노동시간을 1일 10시간, 주당 60시간으로 정한 것을 기각했다.
법원이 이런 결정을 내리자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진보당은 분노를 표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관련 법안들을 다수 무효화했다. 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제도 개혁을 시도하는 것으로 반격했다. 자신의 계획에 찬성하는 법관 6명을 증원해 대법관 수를 9명에서 15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격렬한 항의가 빗발쳤고, 그는 개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 성향의 법관이 그렇지 않은 다른 법관들로 교체되면서 갈등은 가라앉았다.
1954년, 이번에는 법원이 가장 보수적인 집단의 심기를 건드렸다. 같은 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서, 법원은 만장일치로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로 인해 옛 남부연합 주들은 사법부가 특권을 남용했으며, 학교 시스템을 제멋대로 조직하기 위해(연방의 범위를 벗어나는 책임) ‘주의 권리’를 짓밟았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됐다. 이 판결은 얼 워런(1891~1974)이 대법원장으로 재임했던 20년 동안, 법원이 학교 내 차별 철폐를 옹호하는 입장뿐 아니라 피고의 권리와 언론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한 시대를 열었다. 근본적인 분열은 그 뒤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은 의회(국회 및 지방의회)에 속하는 영역에서 ‘사법 행동주의’에 반대한다.
동성 간 연애와 결혼, 낙태의 권리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어떤 주에 거주하건, 모든 소송 당사자들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보수파가 다수여도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법관 중 한 명 이상이 ‘민주당’ 소수파에 합류하는 경우 이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 1989년에 법원은 한 젊은 운동가가 미국 국기를 불태운 사건에 대해 형사처벌을 금지했는데, 이것은 50개 주 중 48개 주에서 시행 중인 법을 무효화한 조치였다. 또한 2003년에는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는 텍사스 법을 폐지했고, 이 차별을 인정한 한 판결을 뒤집었다. 12년 뒤, 법원은 모든 주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처럼 소수자들의 보호자(로 추정되는) 역할을 자처한 눈부신 업적으로 인해 대법원은 사법부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애쓰는 정치인들에게 오히려 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대법원의 역사에서 아마도 워런 법관 시절을 제외하고, 대법원이 공공의 자유를 확실하게 옹호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추방을 승인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계 미국인들의 구금과,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쳤을 때 미국 공산당과 당원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절차에 찬성했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실시한 무슬림의 입국 금지를 지지했다. 더 나아가 법원은 ‘제왕적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을 받아 해외에서 군사작전을 개시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1976년에 대법원은 그 유명한 수정헌법 제1조를 해석했다. “의회는 표현의 자유를 막거나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 어떤 법도 제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선거 후보들은 이후 돈도 일종의 표현 수단이라고 주장하며 거의 무제한의 자금을 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50년도 더 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이다. 1973년에 법원은 남북전쟁 이후의 수정헌법이 미국 내 모든 주에서 낙태할 권리를 포함한다고 결정했다. 오늘날 다수의 법관(그중 셋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했다)은 낙태 금지를 희망하는 주들에서 낙태 허용을 금지하는 쪽으로 돌아설 의향이 있어 보인다. 오랫동안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온 이 결정을 없애려는 계획 덕분에 모든 세대의 공화당 후보들은 복음주의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반전이 일어난다면 관련 주들은 두 단계를 거쳐 낙태를 금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보수주의자들은 임신 유지를 선택하려는 여성들을 다시 동원하는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그리고 좌파는, 대법원이 미국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기관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법관은 헌법의 해석자에 불과한가?
이 시점에서 미국에 민주주의를 확대하려는 한 국회의원의 당혹스러움을 상상해보자. 선거 비용 제한법은, 아마 2010년에 확대 해석된 1976년 판결에 준해 위헌 판결을 받을 것이다. 미 전역에서 총기를 규제하는 법안에 대해서, 법원은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부유세와 관련해 법관 9명은 이 조치를 무효화하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공화당에 유리한 선거구 분할을 매듭지을 민주적 법안을 현행 법원이 받아들일 거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정치제도가 꽉 막혀 있다면, 야심찬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과연 남아 있을까?
여기서 어떤 변화라도 가능하려면 헌법을 매우 임의적으로 개정할 수 있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3) 말하자면 상하원 각각 2/3 이상이 발의하고 각 주들의 3/4이 비준한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법관의 권한이 너무 강하다고 공격하는 것은 전문직과 도시 계급, 특히 변호사들이 지배하는 민주당의 관심을 거의 자극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은 강력한 사법부의 권한이 필요하다는 해밀턴의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퍼슨, 링컨 및 두 명의 루스벨트가 가장 두드러지게 대변했던 절대적인 법의 통제에 반대하는 것은 그렇게 강력한 정치적 계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대법원을 공격함으로써, 루스벨트는 법관들이 대중의 압력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당시 한 법관은 자신이 계속해서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한다면 “현존하는 법원에 커다란 긴장과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해, 대선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재고한 바 있다고 털어놨다. 오늘날에도, 법원은 지나친 권한을 행사하면 자신의 합법성이 도마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의 일부 좌파 세력은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대법원의 권한 범위를 확장한 유명 민주당 전임 대통령의 전례를 따르라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이런 식의 개편은 당분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반전이 일어나, 현재 대법원의 보수 세력은 논란이 분분한 판결을 늘림으로써 대중 정서에 적대적인 기관에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최근 대법원 법관들은 미국 국민들에게, 자신들은 헌법의 객관적 해석자에 불과하다는 발언과 저작을 내놓고 있다. 이를 달리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일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임명했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2018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한 대법관에게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공격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도 트럼프 판사도 없다. (...) 우리에겐 최선을 다하며 헌신하는 훌륭한 판사들이 있다.”
지난해 9월, 갓 임명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연설에서, “저의 목표는 여러분에게 대법원이 당파 싸움의 소굴이 아니라는 확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연설의 청중은, 루이빌대학교 매코널 센터 대학생들이었다. 매코널 센터는 어떤 곳인가? 공화당 상원의원이자 원내대표인 미치 매코널의 이름을 딴 센터다. 매코널은 그 자리에 참석해,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말에 민주당 의원 전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방대법관으로 임명한 배럿 판사에게 박수를 보냈다.
글·알랭 오디 Alan Audi
변호사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Stephen Breyer, ‘The Authority of the Court and the Peril of Politics’,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21.
(2) ‘From Thomas Jefferson to William Charles Jarvis, 28 September 1820’, Archives nationales des États-Unis, https://founders.archives.gov
(3) Daniel Lazare, ‘Cette pesante Constitution américaine 이 불가항력적 미국 헌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