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페인당의 승리, 북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까지

브렉시트의 결과와 연합주의자들의 실수

2022-05-31     대니얼 핀 | 기자, 역사학자

2021년 5월 6일 총선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이 승리를 거두자, 영국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문제로 고민해왔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2023년 이전에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분리독립의 움직임은 북아일랜드에서도 계속됐다. 정부 주도권을 잡은 신페인당은 10년 이내에 아일랜드 통일 문제를 투표에 부치기로 약속했다.

 

지난 5월 5일에 시행된 북아일랜드 총선은 신페인당(Sinn Féin)의 2년에 걸친 승리를 대대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중도우파인 통일아일랜드당(Fine Gael)과 아일랜드공화당(Fianna Fáil)이 구축해왔던 양당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2020년 2월 선거에서 아일랜드의 다수당이 된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당은 이제 북아일랜드에서도 주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신페인당은 역사적 적수였던 민주연합당(DUP)을 물리쳤다. 

친아일랜드 성향의 민족주의자들이 친영국 성향의 연합 주의자들에게 승리를 거둔 것은 1921년 북아일랜드가 영국령이 된 이래로 이번이 처음이다. 1990년대 평화 프로세스 시기에 당에 합류한 메리 루 맥도널드(아일랜드), 미셸 오닐(북아일랜드) 두 대표가 주도하는 신페인당은 2019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영향력으로 아일랜드 정치계를 뒤흔들고 있다. 

 

경제 위기를 기회로, 집권당으로 급성장

힘겨운 성공의 원동력, 그리고 그 뒤의 고충들을 이해하려면 최근 신페인당이 극복해야만 했던 반혁신주의와 위기의 순간들을 살펴봐야 한다. 2008년 경제위기 직전, 1994년의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의 휴전으로 시작된 낙관론의 시대가 고착상태에 빠진 듯 보였다. 아일랜드에서 신페인당은 아일랜드공화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2007년 총선 승리를 기대했으나 참패했고, 5석 중 1석을 잃었다. 한 보수주의 논객은 신페인당에 대해, “북아일랜드에서 민족주의 진영을 주도하면서 이제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일랜드에서는 극좌파와 열렬한 공화당파의 틈새에 머물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분석했다.(1) 

북아일랜드에서 2007년은 징조가 좋아 보였다. 성앤드류 협정(신페인당은 경찰 공권력을 인정하고 민주연합당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수락)에 힘입어, 이언 페이즐리가 이끄는 민주연합당(DUP)과의 성공적인 협상 이후 게리 애덤스와 마틴 맥기네스는 총선에서 신페인당 선거운동에 매진했다. 신페인당은 주요 적수인 사회민주노동당(SDLP)과 격차를 벌이면서, 공화주의 진영에서 주요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나약했던 전임자들과는 달리 민주연합당(DUP)과 합의에 도달해서 10년 이상 지속된 연립정부를 형성했다. 그러나, 신페인당의 주된 목표인 아일랜드의 통일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1998년 성 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을 체결하면서 애덤스와 맥기네스는 북아일랜드의 영국령 지속을 묵인했고 이 상태는 유권자들의 과반수가 독립에 찬성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협정 이후 10년이 넘었음에도, 그런 격변을 예측할 신호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아일랜드 정부에서 배제된 신페인당은 통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영원한 적수들 옆에서 영국의 가장 작은 영토, 북아일랜드를 이끌어야 했다. 2007년 두 차례의 선거 이후 정치학자인 케빈 빈의 신페인당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공화주의 운동 전체는 ‘끝장난 기분’에 빠져 있었다.(2) 

그러나, 15년 후 상황이 변했다. 아일랜드에서 신페인당의 득표는 2011년 10%, 2016년 14%, 그리고 2020년에는 24,5%로 가파른 성장을 보였다. 코로나 팬데믹을 견뎌낸 신페인당의 인기는 차기 정부를 이끌 최상의 기회를 부여했다. 2021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쟁자인 통일아일랜드당보다 훨씬 많은 31%의 유권자가 신페인당 지지 의사를 밝혔다. 동시에 북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균형은 급격하게 흔들렸고, 더 이상 통일을 위한 국민투표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이런 변화의 책임은 결국 보수당과 민주연합당 지도부로 돌아왔다. 브렉시트에 대한 2016년 국민투표 시기와 그 이후의 무모한 선택들은 연합주의 진영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아일랜드 해(海)에 세관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3)

선거에서 참패하고 신페인당의 승리로 모멸감을 맛본 민주연합당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에서도 이 중대한 정치적 전환점은 2008년 경제 위기와 이후 10여 년의 긴축정책과 더불어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경기후퇴로 인한 사회적 여파가 중도우파 정당들의 인기 하락에 크게 영향을 미친 아일랜드에서 이런 현상은 특히 자명했다. 북아일랜드 세계 경제 위기의 결과는 브렉시트 운동을 전개한 영국정부의 의지와 맞물렸고, 정치적 불안정은 영국 중심부에서 주변부까지 확장됐다.

  

“아일랜드의 분단을 끝내자”

이런 중대한 정치적 급변이 없었다면, 신페인당은 오늘날의 위치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페인당이 아일랜드에서 보수주의자들을 제거했을 때, 2008년 경제 위기로 인해 정치권 전면으로 내몰린 유럽의 반체제 정당들과 지도부들의 대부분은 이미 무력화된 상태였다. 신페인당이 다른 많은 정당들처럼 쇠퇴를 면하고 유권자들에게 약속한 변화를 실현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신페인당의 우선 목표는 아일랜드의 분단을 끝내는 것이다. 통일에 대한 이런 열망은 아일랜드 정치계에서 전혀 특별할 것이 없다. 신페인당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무기를 내려놓기 전에는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주의 정당이었던 사회민주노동당(SDLP)을 비롯해서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여당들인 통일아일랜드당(Fine Gael), 아일랜드공화당(Fianna Fáil), 노동당 등과 함께 이런 열망을 공유한다. 

신페인당이 1990년대 평화 프로세스에 개입하기 전에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양쪽에서 이 정당의 차별점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페인당은 북아일랜드의 헌법 변경에 국민 대다수의 지지가 전제조건이라 보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자들은 테러로 규정했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성금요일 협정은 이런 차이를 흐려놓았다. 평화 프로세스를 지지한 신페인당은 무기를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반대파 공화주의 집단들을 비난하면서 과거에 취했던 입장으로부터 벗어났다. 새로이 도입된 북아일랜드경찰(PSNI)을 어쩔 수 없이 지지하면서, 신페인당은 군대식 무장 세력의 폭력을 진압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 속에서 경찰들에 협력하도록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성금요일 협약은 정치적 행동 방법으로서의 폭력을 금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통적인 공화주의 노선을 무력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아일랜드 전역의 민족주의자 과반수가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자 과반수를 물리치고 승리해야 했다. 헌법과 관련된 협약의 첫 부분에서 아일랜드는 통일을 위해 합법적으로 헌법을 변경할 수 있지만 “북아일랜드 국민들의 과반수 동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페인당은 분단 상황을 끝내려면, 북아일랜드에서 국민투표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결국 받아들였다. 이런 양보를 통해 신페인당은 경쟁자들, 한층 온건한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동일한 위치에 섰다. 

그러나, 남북 두 영토에 확장된 국경 없는 ‘아일랜드인 정체성’은 아일랜드의 아일랜드공화당(Fianna Fáil), 북아일랜드의 사회민주노동당(SDLP)과 신페인당을 분명히 구분 지어준다. 신페인당이 이끄는 정부는 아일랜드공화당이 결코 표출한 적이 없었던 열정으로 아일랜드 통일이라는 목표를 추구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양쪽 의회에서 신페인당의 강한 존재감은 새로운 정치적 현상을 일으켰다. 신페인당은 1980년대 초반이 돼서야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궤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현대적 정당의 면모를 갖췄다. 이후 북아일랜드에서 민족주의 정당들 중 두 번째, 전체적으로는 네 번째 정당이 됐다. 

애덤스는 아일랜드에서의 정치적 입지와 함께 북아일랜드에서의 강력한 진출을 결합하고자 했지만, 아일랜드에서 신페인당의 선거운동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무기를 내려놓기 전에는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1997년, 신페인당은 2.5%의 표를 얻었고 아일랜드 의회에서 첫 번째 의석(총 166석)을 차지했다. 그 해, 북아일랜드에서 신페인당은 선거에서 16%의 표를 획득해, 영국의회에서 북아일랜드가 보유한 18석 중에서 2석을 차지했다. 따라서 신페인당은 북아일랜드에서 독립주의의 목소리를 전달할 만큼 강력한 위치를 되찾았다. 인기가 없었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새로운 선거운동을 지지해야 했던 의무에서 벗어나자, 신페인당은 유일한 적수인 사회민주노동당(SDLP)의 눈엣가시가 됐다. 

 

당은 통일, 유권자들은 보건과 주거

기회가 닿을 때마다 통일을 주장하는 분명한 메시지, 단결된 지도부, 견고한 투쟁 기반으로 무장한 신페인당은 평화협상 속에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최선이라는 점을 과반수 민족주의자들에게 무난하게 설득할 수 있었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신페인당의 투표율은 평균 26%에 도달했다. 올해는 29%까지 상승했다. 아일랜드에서 정당들 간의 정치적 상황과 경쟁 규칙들은 확연히 다르다. 애덤스가 1980년대에 파악했듯, 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는 아일랜드에서 신페인당의 투표율 상승을 보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통일 아일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집착은 강렬했지만, 투표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983년, 애덤스는 신페인당이 대처리즘의 정치적 통화주의 정책과 지배 정당들에 반대하는 좌파로 자리매김해야만 했다고 설명했다.(4) 이런 전략의 효과는 애덤스가 기대했던 것처럼 그리 빨리 찾아오지는 않았다. 신페인당은 통일아일랜드당(Fine Gael)과 아일랜드공화당(Fianna Fáil)의 강력한 존재감에서 멀리 떨어져서 녹색당에 비견되는 군소 정당으로 여전히 간주됐다. 더블린과 코크에 얼마간의 지지층이 있었지만, 벨파스트 혹은 데리에서 가능했던 대단위 군중들의 결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판을 뒤흔들었다. 아일랜드에서 신페인당 지지자 수는 2007년에서 2020년까지 거의 4배가 됐고, 다음 선거에서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아일랜드 섬의 양쪽에서 인구의 1/4~1/3이 이제는 신페인당을 지지한다. 현대 유럽에서 그 어떤 정당도 동시에 다른 두 개의 국가에서 동일한 지지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신페인당은 이제 좌파 세력으로서의 역량을 스스로에게 부과할지 그렇게 하지 않을지를 결단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당은 아일랜드의 통일이 핵심 목표이고 다른 측면들(특히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은 그다음 문제라고 항상 주장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로서의 대의가, 아일랜드에서 입지를 넓히고자 신페인당이 주장했던 진보적 정책들과 반드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에 반대하는 이들은 영국과 단절된다면 북아일랜드 국민들은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의료보험 혜택을 상실할 것이므로 현재 상황을 보전하는 것이 유리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신페인당이 아일랜드에서 정권을 잡고 보다 견고하고 평등한 보건체계를 설립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신페인당의 지도부가 좌파 정책보다 아일랜드 통일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면, 아일랜드 유권자들이 이런 측면을 우선시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그들은 통일 이상으로 보건 및 주거 등 사회적 이슈들의 구체적인 진척을 초조하게 기대하고 있다. 그들을 신페인당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이슈들이다. 차기 아일랜드 총선은 2025년에는 시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시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북아일랜드에서 민족주의 진영의 투표율은 올해 40%에 달했다. 이는 연합주의자들에 대한 전체 투표율보다 약간 높은 수치다. 연합주의와 민족주의, 모두에 동조하지 않는 정당들 진영을 합친 주요세력인 동맹 정당은 13.5%의 투표율로 선거에서 세 번째 순위를 차지했다. 아일랜드에서 앞으로 5년 이내에 독립과 관련된 국민 투표가 실시될 수도 있지만, 성공이 확실하지 않다면 당이 국민투표를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신페인당이 서유럽 국경을 바꾸고자 열망하는 것은 카탈로니아, 스코틀랜드, 바스크 지방, 웨일스에서의 경우들처럼 냉전 종식 이래로 그 어떤 정당도 성공하지 못했던 위업을 바라는 것과 같다. 그것은 확실히 원대한 도전이다. 그러나 현재의 입지를 강화하고 목표에 이를 수 있는 방편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신페인당은 우선 그토록 많은 좌파 정당들이 동일한 시기에 유럽에서 부딪혔던 장애들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글·대니얼 핀 Daniel Finn 
기자, 역사학자. 저서로『One Man’s Terrorist: A Political History of the IRA 한 사람의 테러리스트: IRA의 정치사 』(Verso, 2019)가 있다.

번역·권정아
번역위원


(1) ‘Predicting election outcome a precarious endeavour’, <The Irish Times>, Dublin, 2007년 6월 2일.
(2) Kevin Bean, 『The New Politics of Sinn Féin』,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7.
(3) ‘Quand le Brexit rapproche les deux Irlandes 브렉시트는 두 아일랜드를 통일시킬 것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7월호, 한국어판 2021년 8월호.
(4) Michael Farrell, ‘We have now established a sort of Republican veto’, <Magill>, Dublin, 1983년 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