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와 소비에트의 틈, 푸틴 가라앉나

2011-12-12     니나 바시카토프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격투기 대회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군중의 야유를 받았다. 그가 2012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서면서 수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비관주의에 빠졌고, 다시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에 의문을 갖게 했다. 이는 12월 의원 선거에서 푸틴의 ‘통합 러시아’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 몰락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는 제국의 분열과 자체의 특수한 사정에서 파생한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는 러시아가 2011년 12월 의원 선거와 2012년 3월 대통령 선거에 접근하는 방식에 잘 드러나 있다. 현 정권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정치학자 릴리아 셰브초바는 지난 20년을 이렇게 요약한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소련은 세상의 어떤 나라도 일찍이 겪지 못한 도전에 직면했다. 러시아는 자신의 세력 범위, 영토적으로 통합된 제국을 가진 대체 문명의 축이라는 자신의 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1)를 구성하는 원칙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했다.” 러시아는 1992년 ‘시장경제’와 ‘서구 민주주의’라는 두 트랙의 과도기적 변화 과정을 거치려고 했으나, 형태를 명확히 그려내기 어려운 민족주의의 길을 선택해버렸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거대한 도전은 두 트랙에서 멀어져버렸다.(2)

소련의 국제적 자산 포기 못해

동시에 정체성 문제가 기묘하게 불거져나왔다. 러시아는, 옛 연방의 다른 공화국들이 예전 제국주의와 소련의 특성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와 다른 국제기구들의 의석, 해외 부채 및 재산, 핵강대국- 러시아가 자랑스러워하는 이런 것들은 러시아 처지에서는 거대 강국의 특성을 정당화해준다- 같은 국제적 권리와 의무를 소련에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이 제국주의적 특성을 지닌 러시아의 연방주의적·다민족주의적인 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1991년 옛 소련과 단절된 것 자체가 모호한 유산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단 러시아 사람들은 옛 소련의 다른 공화국들에 더는 필수품을 공급해주지 않고, 모든 수단과 에너지를 자신의 발전에 할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8세기 이래 가장 좁은 영토 속에서 쇠퇴하고 빈곤해지는 강국 러시아를 ‘문명화하기’ 위해 대규모로 도착한 서구 자문관들에 의해 재주 없는 학생으로 간주되는 강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1991~99)은 정체성 문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소멸한 뒤 국가적 컨센서스를 재창조하고, 개혁의 성공에 필수적인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정체성 문제에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1992년 옐친은 ‘러시아적 사고’(3)라는 유서 깊은 개념에 대한 현대적 버전을 정의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창설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혼란스런 논쟁만 일으켰을 뿐 어떤 결론도 내지 못했다. 그 뒤 같은 목표를 추구한 다른 위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후임 대통령들 모두가 문화·언어·종교뿐 아니라 다민족적·연방주의적 국가에 귀속감을 느끼는 공동의 감정적 기반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감정적 기반은 ‘그리스정교-차르-주민 공동체’라는 삼위일체적 집합으로 러시아의 정체성을 정의한 아주 오래된 개념을 연장시킨 것이다. 과거와의 연관성을 보존하려는 이런 근심은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이런 근심은 나라가 제국주의 이후 민주주의로 변화해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통일성을 보존하려는 일종의 긍정적 보수주의에서 생겨났다. 2006년 4월 국가두마(러시아 하원)의 부의장인 올레그 모로조프가 나름의 방식으로 지적했던 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계승자이며 동시에 모든 러시아 정부의 계승자다. 좌파나 우파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차르의 러시아와 사회주의 러시아를 동시에 계승하는 사람들이다. 조국에 봉사하는 오랜 전통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보수주의를 표방한다.”(4)

서구에 대한 거부감, 제국의 향수

그럼에도 여러 난관 탓에 이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다. 러시아가 연방주의 국가이고 다민족 국가라면, 러시아를 구성하는 주민들 역시 자신의 뿌리를 다시 찾으려는 것이 당연하다.(5) 주민들은 연방에 속한 것을 문제 삼지 않지만, 연방이 그들에게 제국주의 모델과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비에트적 인간)(6)와는 다른 새로운 정체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한다. 게다가 러시아는 수백만 명의 이민 노동자(모스크바 인구 10명 중 1명이 이민자임)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정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게 러시아 언어와 문화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

국제적 영향력과 직접 부딪히는 도시 사람들뿐 아니라 텔레비전 화면에서 전통적 문화와 완전히 다른 소비와 삶의 스타일, 토크쇼를 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시골 사람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설정된 러시아의 정체성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개념이다. 결국 정치학자인 안드레이 멜빌 같은 수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볼 때, 정체성을 ‘러시아적 사고’의 힘과 차이의 개념에 근거해 추구하는 한, 이는 러시아의 국제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돼버린다.

논쟁만 하다 끝나는 정체성 토론

지난 20여 년 동안 현대화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시행해왔지만, 러시아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 사회로 남아 있다. 정부 당국은 안정이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국민 대부분이 변화를 기회가 아닌 위험으로 간주하는 순간부터 국민은 안정을 구현해주는 체제를 달게 받아들인다. 공산주의 야당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대한 향수 때문에 연속성의 국가 형태를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회귀하자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공산주의 야당은 사회에서 괴리된 채 거리에서 선동하는 이상한 단체가 되어버렸고, 권력 그룹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정치적 침체를 옹호하고 있다. 1980~90년대부터 활동했던 똑같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야당에서 여전히 행세하고 있고, 특히 구엔나디 지우가노프(1990년 러시아 공산당 창당),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1990년 러시아 자유민주당(LDPR) 창당),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러시아 민주당)가 당사자들이다. 다른 야당 지도자들은 ‘전직’ 관료·의원·작가 등으로, 이들 중 몇몇은 자신이 현재 비판하는 결정을 예전에 옹호했던 인물들이다. 전직 총리인 미하일 카시아노프, 전직 부총리인 보리스 넴초프, 전직 의원인 블라디미르 리즈코프, 전직 에너지 장관인 블라디미르 밀로프, 전직 체스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 정계에 입문한 전직 작가 에두아르드 리모노프가 당사자들이다.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모호해서 좌파나 우파의 기준을 그들의 노선에 적용하기 불가능할 정도다.

그런데 대중은 서구의 전폭적 지원을 받지 않았다면 조직화되지도 못했을 공산주의 계열의 야당에 상당한 동정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 야당은 서구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비방하는 세미나와 회의를 개최하면서,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외국인들이 제안하는 개혁을 자신의 이익에 맞춰 추진하는 소수 특권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서구의 무조건적 지지에도, 자유주의적 야당 인사들은 권력에 의해 완전히 통제된 미디어로부터 배제당한 탓에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비관하고, 또 서구 파트너들에게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유주의 야당 인사들은,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정치화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정부 미디어들(7) 덕택에, 그들에게 투표할 수 있는 새로운 중산계층에 다가갈 수도 있었다. 만약 정치화된 대중이 단일 야당에 의해 조직화됐더라면, 두마에서 실제적인 견제세력의 형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10월 1~2일 모스크바 교외에서 열린 야당의 문화행사는 정치적으로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거기서 야당은 정책에 관해서는 거의 논의하지 않고,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된 선거 프로세스에 대해서만 많은 이야기를 했다. 논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집중됐다. 투표를 해야 하는가? 러시아에서 야당 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건 러시아자유민주당(LDPR)이건 무조건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해야 하는가? 투표용지를 무효화하기 위해 용지에 줄을 그어야 하는가, 혹은 찢어야 하는가? 카스포로프, 넴초프, 리모노프 같은 야당 지도자들은 만약 푸틴에게 초대받는다면 초대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 크렘린에 들어갈 때 특정 장관이 동석한 경우에만 말해야 하는지 등을 놓고 격렬하게 토론했다. 마침내 관중이 허락을 받아 질문을 시작하자, 그들은 질문자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늘 그렇듯, 크렘린의 교사자이자 비밀 공작원으로 취급했다. ‘다른 러시아’당의 블라디미르 리즈코프가 ‘가면무도회에 참석하지 않는’(8)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콧을 옹호한 반면, ‘인민민주연합’당의 미하일 카시아노프는 선거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서구가 선거를 인정하지 않도록 유럽의회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9)

정치권 좌·우파 모두 이념 모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는 △러시아인의 정체성 추구 △여러 공화국들과 다르면서도 동시에 예전의 소련처럼 강력해지려는 러시아인들의 의지 등 두 가지 상반된 의제를 하나로 통합했다. 이는 1990년대에 본 것처럼,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이유로 서구가 강요해온 모델을 거부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은 최고 권력자 주위에서 선택받은 소그룹을 끊임없이 경쟁시켜 힘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러시아식 전통을 현대적 버전으로 영속화하는 셈이다. 최고 권력자의 측근들은 특권과 자원에 대한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행정적 수단을 사용할 권리, 다시 말해 최고권력자의 말을 퍼뜨리고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연방·광역 정부·지자체의 예산과 국가조직을 사용할 권리를 누린다. 어느 누구도 투표를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여당이 이길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당은 득표율을 올리려고 노력한다. 득표율 상승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는 인상을 주고 미래의 결정들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 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아니면서 민주주의 요소를 포함한 ‘국민투표에 의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야당이 자유롭게 허용된다. 야당이 권력구조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크렘린은 현대사회가 단일 정당에 의해 지배될 수 없다고 끊임없이 반복해 말한다. 1990년대부터 대통령 관저에서는 야당들을 조직하려고, 심지어 야당들에 재정 지원을 하면서까지 두마에 야당들이 입성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옐친은 공산당이 투표를 통해 권력에 복귀하는 것을 막으려 한 반면,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여러 야당들을 통합해 미국이나 영국처럼 양당 체제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양당 중 하나는 당연히 그들의 당인 ‘통합 러시아’당일 것이다. 지난여름, 당수에 미하일 프로호로프를 앉히면서 ‘정당한 대의’당을 다시 활성화하려 했던 크렘린의 시도가 이를 증명해준다. 프로호로프는 억만장자로 당에 재정 지원을 할 수 있고, 자유주의 유권자를 유혹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장점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정당한 대의’당은 프로호로프가 정당 명부에 자기 수하들을 억지로 올리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거부했다.

신흥 중산층 실망시키는 야당들

크렘린은 사회적 화합에 해가 되지 않으면서 다양한 의견을 보장해주는, 그들이 ‘건설적 야당’이라 부르는 것을 중시한다. 메드베데프가 ‘통합 러시아’당의 지구당 당원들인 바르나울대학 학생들 앞에서 최근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혼란을 일으키며 외부에서 비난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것이 내 마음에 안 든다. 내부에서 상황을 바꾸는 것이 바로 내 일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10) 그러나 푸틴이 ‘통합 러시아’당의 전당대회에서 2012년 3월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고 발표한 것은 충격이었다. 몇 년 전부터 모스크바에 그런 소문이 나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밀이 잘 지켜져서 측근의 협력자, 장관, 심지어 당의 지도자들까지 그런 일이 진행되는지 몰랐다. 행정부를 맡고 있는 푸틴의 처지에서 그것은 2012년 3월까지 무위도식하겠다는 것이며, 그 뒤 대통령이 되어 선서를 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행정부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한 지인은 현재의 분위기를 “1945년 5월 히틀러의 벙커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묘사한다.

사람들은 여론조사가 푸틴을 출마하도록 부추겼다고 말한다. 여론조사는 푸틴이 현직 대통령보다 더 쉽게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전망했다. 민주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는 러시아식 민주주의에서 정부 당국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부터, 내리는 와중이나, 내린 후에도 끊임없이 여론조사를 한다. 2008년부터 러시아를 이끄는 두 단짝 파트너는 국가의 안정과 힘에 대한 대중의 이중적 열망- 푸틴이 메드베데프보다 이 열망을 더 잘 구현한 것 같다- 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푸틴이 1990년대의 혼란을 종식하며 구세주로 등장했던 2000년의 상황이 더는 아니다. 메드베데프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사람이 푸틴이고, 그에게 총리로 봉사한 사람도 푸틴이며, 국민에게 가장 불만을 사고 있는 부패와 고물가라는 해악을 만들어낸 사람이 메드베데프 집권 시기에 총리로 일한 푸틴이기 때문이다.

크렘린 손바닥 위의 민주주의

푸틴이 2000년에 그랬던 것처럼 2012년에 새로운 개혁을 시작할 것이고, 메드베데프가 더 개혁적인 팀을 구성하는 데 현 총리에 의해 좀더 강화된 정부 권력을 이용할 것이라고 상당수 낙관주의자들이 끊임없이 바라고 있지만, 수많은 러시아 사람들은 안정이 경기침체로 이어질까봐 걱정한다.

두마 역시 1999년의 상황이 아니다. 2007년부터 4개 정당이 두마에 자리를 잡았다. ‘통합 러시아’당이 315석(2003년보다 94석 증가), 공산당이 57석(6석 증가), LDPR가 40석(3석 증가), ‘공정한 러시아’당이 38석(2007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얻고 있다. 우리가 여론조사 결과에 신중해야 하지만,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통합 러시아’당, 공산당, LDPR의 3개 정당만이 의회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득표율(7%)을 넘을 것이고,(11) ‘통합 러시아’당은 간신히 과반수가 될 것으로 본다. 가장 최근 선거인 2011년 3월 지역 선거에서 ‘통합 러시아’당이 여러 곳에서 3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부진이 크렘린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어쩌면 푸틴의 복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선거 실패에 책임 있는 주지사들을 짧은 시일 안에 물갈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은 부동층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열띤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상대적 과반수에 만족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가 오래된 국가의 정당들에는 상대적 과반수도 만족스럽겠지만, 다른 정당들의 표에 의존하고 싶지 않은 ‘통합 러시아’당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선거운동 기간이 아닌데도, 크렘린은 벌써부터 당내의 뛰어난 인물들뿐 아니라 대통령 보좌관, 정부 관리를 나라 곳곳에 파견해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부동층이 많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이다.

푸틴은 여전히 선거에 이길 만큼 대중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든든한 이미지를 상실했고, 심지어 일부 대중에게서 조롱받고 있다. 사람들은 풍자가들이 그려내는 그의 매정한 성격, 풍자 인물화들이 드러내는 그의 폭력, ‘통합 러시아’당이 ‘사기꾼들과 도둑들의 정당’이라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서 그를 평가한다. 이 모든 것은 그의 대통령 입후보 방식이 엄청난 소통 오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메드베데프와 푸틴은 모든 것이 4년 전에 결정됐기 때문에(푸틴의 대선 재출마) 놀랄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여 민심을 악화시켰다. 국민은 속은 것 같다고 느꼈다. 국민이, 대안이 없어서든 또는 신념에 의해서든, 전직 대통령을 다시 뽑을 준비가 돼 있다 해도, 국민은 ‘통합 러시아’당에 불이익을 줄 것이다. 그럴 경우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총선에서 ‘통합 러시아’당의 정당 명부를 주도한 메드베데프가, 결과가 아주 좋지 않을 경우에도, 과연 권좌에 남을 수 있을까?

푸틴 대선 출마, 예상했으나 배신감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선거를 분석할 때 단순히 ‘사람들이 똑같은 인물들을 선택하고 똑같이 다시 시작할 것이다’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고 만족할 수는 없다. 12월의 총선과 내년 3월의 대선 결과가 어떻든, 정부 당국은 이전과는 다르게 일하는 방식을 찾아야 하고, 어쩌면 다른 세력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미래의 대통령이, 11년 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피곤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만큼 더욱 그렇다. 메드베데프 자신은, 대통령 선거를 포기한 이래, 해방된 사람처럼 느슨해진 것 같다. 게다가 푸틴이 2000년에 함께 데리고 왔던 정보국과 군대의 노련한 ‘견장 찬 사람들’ 중 일부 정치인들의 은퇴 시기가 코앞에 와 있다.

사회계층의 또 다른 맞은편에는 젊은 세대가 존재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콜호스(옛 소련의 집단농장 명칭), 중앙위원회, 콤소몰(옛 소련의 청년정치조직) 캠프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서구를 따라해야 하는지 거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들은 향수도 증오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부모들과 달리 인터넷, 미디어, 여행을 통해 세상이 개방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정상적’ 국가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 니나 바시카토프 Nina Bachkatov 
<인사이드 러시아 & 유라시아>(www.russia-eurasia.net) 편집장.   

번역 / 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릴리아 셰프초바, <러시아: 혼란스런 과도기, 옐친과 푸틴의 유산>, 국제평화 카네기기금, 워싱턴 DC, 2007.
(2) 블라디스라프 이노젬체프, ‘러시아식 독재, 러시아식 자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0월호 참조.
(3) 피오도르 도스토옙스키가 경영하는 잡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아주 자율적인 민족성을 갖고 있다. 우리 땅에 뿌리를 둔 고유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런 ‘러시아적 사고’ 개념은 19세기부터 유래됐고,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이지만 수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에 의해 옹호돼왔다. 오늘날 유라시아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다시 이어받은 이 개념은 서구와는 다른 자신들의 특별한 운명을 강조한다.
(4) 2006년 4월 15일. www.edinros.ru
(5) 러시아는 80%를 차지하는 러시아 민족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100여 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100여 개 소수민족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룹은 타타르족이다(인구의 4%).
(6) 로랑 바쟁, ‘국가정체성이라는 전염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2월.
(7) <노바야 가제타> 신문, ‘베도모스티’(www.vedomosti.ru)와 ‘코메르산트’(www.kommersant.ru) 같은 인터넷 사이트, <에코 모스크비>(Ekho Moskvy) 라디오 같은 미디어들.
(8) ‘크렘린의 정치 카르텔’, <The Moscow Times>, 2011년 10월 11일자.
(9) Guy Verhofstad, ‘러시아를 협박할 시점’, 유럽자유당 당수가 공동 사인한 공개 편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2011년 9월 25일자.
(10) <NTV>에 중계방송된 담화, 2011년 11월 1일.
(11) 새 선거법에서는 의회 교섭단체 구성 요건 비율이 5%로 낮아진다.


소련은 어떻게 ‘임종’했나

1991년 12월 8일, 3명의 대통령이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처럼 벨라루스 숲의 외진 곳에 있는 사냥꾼 호텔에 모였다. 자신들의 공화국이나 다른 공화국들의 위임장도 없이 러시아의 옐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는 이른바 ‘민스크 협정’에 서명했다. 민스크 협정에 따르면,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1991년 12월 31일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CIS)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당시 소련을 구성했던 다른 12개 공화국도 거기에 가입하도록 초대받았다.

12개 공화국은 허를 찔린 셈이었다. 대부분의 공화국들이 몇 달 전부터 ‘주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발트해 연안 공화국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공화국도 완전한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조지아(옛 그루지야)를 제외한 캅카스산맥 지역과 중앙아시아가 특히 심한 충격을 받았다. 카자흐스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소련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의 대표자 없이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분노한 그는 3명의 대통령에게 소련이 슬라브 세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결국 12월 21일 알마아타(1)에서 2차 모임이 이루어졌다. 15개 공화국 중 11개 공화국이 서명한 같은 이름의 협정에 의해 새로운 독립국가연합이 성립됐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은 소련과의 과거를 미련 없이 끊어버리고, 동유럽과 중부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출 기회를 잡았다. 동유럽과 중부유럽 국가들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공산주의 유산을 청산하려 했고, 유럽경제공동체(EEC)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기구들에 자신의 자리를 요구했다. 완전한 독립을 원한 조지아의 민족주의 정부는 모스크바가 지배하는 CIS에 가입하지 않았다.

옛 소련의 적기가 깃대에서 내려오고 러시아의 삼색기로 대체돼 크렘린 상공에서 펄럭이는 이미지는 상징적으로 소련의 종말을 보여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임기 만료일인 12월 31일을 며칠 남겨두고 사임한 1991년 12월 25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독립한 15개 공화국은 그 뒤 수많은 사람들의 환멸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정치·경제·사회 생활의 근간을 여전히 형성하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와 단절하고, 옛 소련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그때부터 신생국가들은 사회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제도를 합법화하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용품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하여 민족주의와 종교는 옛 소련 시스템에 의해 억압받던 것 이상으로 열렬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상당수 국가가 자신의 새로운 국경 안에서는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국가 지도자들은 새로운 민족 감정을 창출해내기 위해 과거를 다시 쓰게 했다. 기본적으로 다시 활용할 수 있는 신화들이 존재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이 용감하고 자유로운 코자크족이라는 신화를,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자국이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신화 등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선 해결해야 할 정치·경제·사회적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모든 신생 공화국들은 공산당 이외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 민주주의를 성취해야 했다. 기껏해야 권력을 잡은 여당, 조직화돼 있지만 투표에 의해 권력을 다시 잡기는 불가능한 공산주의 야당, 이데올로기보다는 개인적 싸움으로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파벌들로 이뤄진 비(非)공산주의 야당이라는 세 그룹이 존재할 뿐이었다.

경제적으로 시행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시장경제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외국의 원조는 극단주의적 자유주의 모델과 외국 투자자들에 대한 완전 개방을 강요했다. 외국 투자자들은 정치가가 부재한 상황과 비(非)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부족한 상황을 십분 활용해 불평등 계약을 체결했다. 공화국들은 이 불평등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많은 세월을 바치게 된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두마는 PSA(2)라는 이익배분법을 2003년이 되어서야 수정했고, 카자흐스탄은 2010년이 되어서야 카샤간 유전 지역의 투자자들을 굴복시켜 재협상을 받아들이게 했다.

사회적 문제도 산적해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소련의 종말은 공화국들 사이의 가족적·문화적·과학적 관계의 단절을 의미했다. 통합 인프라가 공화국별로 분리돼 활용할 수 없게 되었고, 국가의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주민들은 불안정, 미래에 대한 불안, 사회적 계층 차별, 가족 가치의 훼손, 돈과 물질적 부의 중요성을 목격했다.

비슷한 문제들에 직면한 정부들은,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유사한 방법으로 대처했다. 모든 정부 권력은 △강력한 대통령제 △칙령 기록실로 전락한 의회 △좋아서든 강요에 의해서든 정부의 공식 입장을 무조건 지지하는 언론이라는 세 요소에 의해 지탱됐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가가 개입해 지역 기업들을 보호해주고, 사기업들에 사회적 서비스와 지역 인프라를 부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국가의 이런 과도기적 기능은 자국의 시장경제가 국제 경쟁에 대처하고 충분한 재정 건전성을 이뤄내는 데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줄 것이다. 현재 국가의 이런 기능은 활기차게 작동하고 있다.

(1) 알마아타는 그 시절 카자흐스탄의 수도이고, 후에 알마티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7년에 수도를 지금의 아스타나로 옮겼다.
(2) PSA(Power Sharing Agreement)는 투자자와 해당 국가 사이의 이익 배분을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