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프랑스 좌파에 대한 반발일까?
프랑스에서 좌파의 집권과 권력 유지가 어려운 이유는, 상대편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강한 탓일까? 아니면 우경화된 서민층 내에서 좌파가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 상대편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일까? 이 두 가지 해석은 상호보완적이지만, 한 해석이 다른 해석보다 훨씬 유용하다.
비방의 무게, 계급 충돌
정계 재편 후 좌파 진영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현 시점에, 프랑스의 두 정치 전문학자가 선거철(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내놓았던 분석을 재점검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프레데리크 마통티의 저서 『우리는 어떻게 보수주의자가 됐나?』에는 지난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에리크 제무르(Eric Zemmour)가 몰고 왔던 ‘광풍’의 흔적이 남아 있다.(1) 이 책은 비방조로 프랑스 지식인의 현실을 너무나 단편적으로 묘사했기에, 호평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좌파에 절망해야 하는가?』를 쓴 레미 르페브르 역시 이 정치 집단이 “깊고 쓰라린 이념적 패배”를 겪었다고 결론지었다. 최근 총선결과를 보면 이런 결론은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두고두고 활용할 만한 분석이 많이 담겨 있다.(2)
프레데리크 마통티는 프랑스 이념 논쟁에서 보수 우파가 차지하는 지위를 염려했다. 하지만 이런 경각심을 정당화하고자 일련의 ‘보수적인 성향’의 저서를 비방하면서 보수주의자들이 ‘최근 몇 년간’ 지식계를 독점했다는 왜곡된 주장을 폈다. 마통티는 『사상의 패배(La défaite de la pensée)』의 저자인 철학자 알랭 팽키엘크로(Alain Finkielkraut), 『프랑스의 불안, 그 중심으로의 여정(Voyage au centre du malaise français)』의 저자인 사회학자 폴 요네(Paul Yonnet), 『68운동 사상(La Pensée 68)』을 공동집필한 철학교수 뤼크 페리(Luc Ferry)와 철학자 알랭 르노(Alain Renaut)의 사례를 들어 분석했다.
일부 대목에서는 케케묵은 독서 노트를 꺼내 읽는 기분이 들 만큼 저자는 이 부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 책들이 출판된 지 3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릴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마통티는 나아가 정치학자 파트리크 뷔이송(Patrick Buisson)과 에리크 제무르를 비롯해 철학자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와 사회학자 장피에르 르고프(Jean-Pierre Le Goff), 정치철학자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의 견해까지 공격했다. 결국 모두를 향해 화살을 겨눈 꼴이다. 마통티가 고른 저서들은 실상 지식논쟁을 주도한 저작물이기에, ‘보수화 물결을 아무도 피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면 지식인들이 모두 ‘보수화’됐다는 결론이 놀랍지는 않다.
마통티가 비난하는 지식층의 이념적 우경화에는 그 밖의 요인들도 작용했다. 하지만 작가는 다른 요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좌파’ 진영이 일부 보수 지식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인본주의’를 스스로 탈피한 것이 사회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나 북대서양 조약기구 정책에 동조하는 것보다 훨씬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본다. 하지만 좌파가 사회적 투쟁을 포기한 이유를 파악하려면, 팽키엘크로나 옹프레, 제무르의 저서보다는 정체성 문제가 부상하게 된 계기를 살펴봐야 한다. 아울러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출신 여성 사회학자 두 명이 2020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유나 비영리 단체에서 숨은 인재를 찾아내는 안 이달고(Anne Hidalgo)의 능력이 마통티의 주장처럼 척결의 대상인 ‘보수’의 물결을 과연 막아낼 수 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레미 르페브르는 사회의 우경화를 ‘정치-언론계의 진부한 논거’라고 본다. 일정 부분, 우파와의 유착 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두 정치학자 도미니크 레니에(Dominique Reynié)와 파스칼 페리노(Pascal Perrineau)가 언론에 상시 등장해 생긴 결과일 것이다. 르페브르는 일례로 설문 응답자의 90%가 최저임금 인상, 재산연대세(ISF) 재도입, 퇴직연금 인상을 지지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우익과 극우 진영은 사회 안전과 사회 보장 제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희망에 민족주의적 성격을 덧씌워 외국인과 소수인종에 대한 적대감을 양산했다.” 그리고 일부 좌파 정당은 이 와중에 문제점을 조명하기는커녕 ‘여론’에 더 잘 들어맞는 중립적인 담론만 늘어놓았다.
대다수의 좌파 정당이 서민층의 지지를 포기했다면, 그 이유는 일정 부분 “정치적 방향과 상관없이 좌파의 핵심 지지층이 서민층에서 도시에 거주하는 고학력층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르페브르는 여러 쪽에 걸쳐 테라노바 재단(중도좌파 성향의 싱크탱크)과 프랭탕 레퓌블리캥(Printemps républicain·공화당의 봄, 민간 정책 연구소)이 내놓은 상호 대칭적인 전략을 비판했다. 한 곳은 무기력한 좌파에 가까울 뿐더러 ‘사회적 인종차별’을 연상시킬 만큼 계급에 대한 증오를 표하고, 다른 한 곳은 문화적 불안정(Insécurite culturelle, 문화공간 내에서 원주민으로 구성된 집단이 문화, 가치, 규범, 생활방식 등의 지속가능성에 위협을 받아 생기는 불안감)에 맞선다는 기치만 내걸고 강경 우파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자는 서민층이 우경화됐다는 억측을 내세우며 서민층을 포기한 이유를 정당화했고, 후자 또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해 좌파가 노동자들의 지지를 되찾으려면 우경화된 담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끝으로, 르페브르는 “정당 정치가 다시 힘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정당 정치가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에 밀려 쇠퇴할 것이라고 보는 일반론과는 매우 다른 주장이다. 그는 “좌파 문화가 힘을 잃어가는 마당에 정당의 쇠퇴를 막을 수 없다”라고 했다. 과거 노동계층 운동가들이 활동을 전개하고 힘을 키우는 곳이었던 정당은, 이제 정치 전문가나 고학력층 중심의 ‘정치 지망생 모임’으로 전락했다. ‘정당 정치’가 다시 힘을 얻는다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좌파 진영은 현 상황을 타파하지 못할 것이며, 르페브르가 다음과 같이 제시한 목표에도 쉽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좌파는 사회학의 정치와 정치의 사회학을 구현해야 한다.” 이런 조언도 물론 좌파가 더 서민적이고 덜 부르주아적인 사회학과 정치를 지향할 때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크롱주의가 아무리 휘청댄다고 해도 결국 여전히 우세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Frédérique Matonti, 『우리는 어떻게 보수주의자가 됐나? Comment sommes-nous devenus réacs』, Fayard, Paris, 2021.
(2) Rémi Lefebvre, 『Faut-il désespérer de la gauche? 좌파에 절망해야 하는가?』, Textuel, Paris,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