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박원순, '스펙정치'의 도래
박원순 후보는 예상보다 약했다. 선거에 끼친 효과를 떠나,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응하는 모습은 유약해 보였다. 민주당을 비롯한 각 야당에 둘러싸인 모습은, 그가 가마가 아닌 유모차에 탄 듯 비쳤다. TV 토론에서 그는 상대 후보와의 언쟁에 서툴렀고, 이제는 민주당도 반대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비켜가려고 했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은 박원순 ‘후보’를 능가하고 청산했다. 선거경쟁을 벗어난 그는 온라인 취임식이나 예산안 프레젠테이션처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지만, 전임자들이 하지 않은 시도를 통해 전국의 이목을 곧바로 집중시킴으로써 대중적 지지 기반을 다져나갔다. 내가 일하는 지방의회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요컨대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렇게 하는데, 우리 시장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의외로 들리겠지만, 발언자는 한나라당 소속 3선 의원이다. 박 시장은 취임하자마자 학교 무상급식 예산을 집행했고,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방침을 내놨다. 앞으로도 박 시장은 이른바 진보개혁 진영이 축적한 정책 꾸러미들을 풀 것이고, 수도 서울시장의 정책은 전국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유약한 ‘후보’에서 강력한 ‘시장’으로
박 시장을 둘러싼 의회 사정도 좋다. 몇몇 민주당 서울시의원들이 첫 시정 질문에서 기선 제압에 나섰지만, 의회와 단체장 사이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긴장과 갈등이다. “시의회는 견제와 감시라는 본연의 역할을 할 것.”(서울시의회 김명수 민주당 원내대표) 오히려 의회의 비판을 견뎌내는 것은 박원순 시장의 자산이 된다. 의회 다수파가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면서 취약함을 드러낸 오세훈 전 시장을 보라(야당 도의원들과 학교 무상급식에서 타협점을 찾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대조된다). 그의 사임 배경에도 의회와의 나쁜 관계가 깔려 있다.
시정 질문에 나선 김형식 민주당 서울시의원은 “박원순 예산안에 보편적 복지가 부족하다”며 맹공했다. 새파랗게 벼린 칼날에 박 시장의 눈이 잠시 부셨겠으나, 복지 지향 시정을 떠미는 듯 밀어주는 내용을 보면 칼날이 어디로 향하는지 뻔하다. 더구나 서울시 야당인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들이 시장을 몰아붙이는 순간 민주당 시의원들은 우군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의 시정 질문에 퍼부은 민주당 시의원들의 비난으로 입증되었다.
한나라당 소속이 아닌 시의원들의 지원이 부족해도, 설령 2014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서울시의회 제1당이 되더라도 박원순 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단체장과 지방의회의 역학관계가 ‘80 대 20’으로 표현되는 것이 지방자치의 현황이다. 시장 재량으로, 조례 제정 없이도 보여줄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 의회의 반대로 정책 구현이 어려워진다 한들 단체장의 인기가 사그라지는 법은 없다. 단체장을 향한 의회 다수파의 핍박은 ‘개혁적 집정관 대 수구적 원로원’이라는 구도를 연상케 한다.
‘박원순 모델’의 전파·정착은 확정적
장래 모종의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는 한 박원순 시장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을 테며, 이명박-오세훈 전 시장의 9년에 넌더리가 난 시민의 여론은 그의 재선 가도를 뒷받침할 것이다. “한 번은 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한나라당보다는 낫다”면서. ‘박원순 모델’의 전파와 정착은 확정적이다.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 ‘시민정치’는 ‘정당정치’를 꺾었는가? 우선, 너 나 할 것 없이 시민인데 무엇이 시민정치인지 설명할 도리가 없다. 질문을 바꿔보자. 현존 정당들은 패배했는가?
한나라당이 입은 타격은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패배 이후 오기 마련인 ‘쇄신풍’조차 잘 불지 않는 정당이다. 그나마 있던 쇄신파는 한나라당이 총력을 다해 한-미 FTA를 기습 통과시킨 뒤 급격히 힘을 잃었다. 선거 초반에 좌절한 우익 시민운동가 이석연씨의 사례가 증명하듯, 한나라당 부근의 장외 세력도 부진해서 (신종 극우 폭력집단 ‘어버이연합’을 빼면) 외연 확대, 외부 인사 수혈도 어렵다.
한나라당의 회복 가능성은 적대 정파의 실책에서 비롯된다. 민주당이 그러했듯 말이다. 그럼 어디를 때릴까? 첫째는 단연 서울시장 박원순이다. 구속기소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무소속 야권 단일 후보로 당선돼 대선 ‘잠룡’으로 지목되는 김두관 경남도지사, 교육개혁의 진원지라는 경기교육청의 김상곤 교육감도 함께 꼽힐 만하다. 그러나 집권 여당 겸 의회 다수파로서 국민적 비난을 맨 앞에서 받아야 하는 그들이 빠르고 센 화살을 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반대로, 야권 후보단일화로 인한 박원순 효과의 덕을 가장 직접적이며 빠르게 누리는 쪽은 ‘혁신과 통합’을 위시한 야권 대통합 요구 세력으로 보인다. 이 흐름의 상징적 인물인 문재인은 노무현 정권의 핵심 인사였으면서도 희한하게 박원순처럼 ‘장외의 신선한 인물’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당과 통합에 성공할 경우, 나름의 지분을 보장받고 당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기존 민주당의 핵심은 손상을 입을까?
민주당의 손익에 관해서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손학규 대표는 “박원순은 사실상 민주당 후보”라며 ‘정신승리법’을 구사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을 선호하던 유권자도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민주당을 지지할 수 있다. 아니, 지역구 선거로 치면 그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찍을 공산이 더 크다. 어차피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 승부에서 이길 만한 인사는 한정되어 있다. 박원순이야 ‘박원순 정도 되니까’ 이긴 셈이다.
‘시민정치’가 아니라 ‘인물정치’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대항하는 연합을 위해 순순히 한발짝 뒤로 물러날 리 만무하다. 시민정치? 더 키워서 잡아먹으면 된다. 10·26 선거 과정에서 이미 박원순 후보의 민주당 입당 가능성이 회자되었고, 최근 박 시장은 “통합정당 동참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박원순에게 후보직을 넘긴 민주당이 ‘더 커진 채’로 박원순의 시장직을 먹는 시나리오가 어른거린다. 새로 올 식구에게 모이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세력이 민주당 내부에서 반발하나, 민주당이 분당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내부 반발은 오히려 향후 야권 통합 과정에서 민주당 중심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동력이 된다. 게다가 내년 총선에서 대대적 야권 단일화는 기정사실이고, 야권 단일 후보의 다수는 민주당 후보일 것이다.
기꺼운 얼굴로 박원순과 민주당 곁에 서서 “우린 해낼 수 있다”고 노래한 나머지 야권세력도 야권 단일 후보의 기회를 기대한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의 탈당파가 합쳐진 세칭 ‘통합진보정당’은 민주당과 선거연합 협상에서 예전보다는 좀더 유리한 고지에 설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통합진보정당’은 몇몇 인물만 야권 단일 후보로 앉히는 대신 야권 연합의 2중대로서 총선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 이후도 험난하다. 민주당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세력은 통합진보정당이 아니라 박원순과 안철수로 상징되는 ‘시민사회 제3세력’이다. 박원순 정도도 끌어들이지 못하는 통합진보정당은 제1야당이나 여권 핵심이라는 꿈 따위는 기약 없이 접어야 할 판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대통합 정당에 탑승하려고 안간힘을 쓸지 모른다. 민주당이라는 굵직한 축에 ‘혁신과 통합’, 박원순, 통합진보정당이 줄줄이 엮여 들어가는 장면, 그렇게 해서 ‘미국 민주당’에 가까운 정당이 출현하는 미래사는 나만의 예지몽일까?
독자적 좌파에 대항마는 있는가
지금껏 한 얘기는 결국 ‘조직’이 이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다. 앞에서 어렴풋하게 거론했는데, ‘스펙’이다. 나는 오세훈씨의 사임이 확정되자마자 곧바로 박원순의 등장을 예상했다. 희망사항이 아니라, 냉정하고 (뒤에 거론하겠지만) 암울한 예측이었다. 야권의 단순한 덧셈만으로 한나라당의 득표율을 앞선다는 보장은 없었다. 각 야당의 거부감을 사지 않으면서도 표를 확장시킬 요소를 가진 후보, 시민운동가 출신의 무소속 후보로 저울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민들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시장 캐릭터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임 시장인 조순과 고건, 이명박과 오세훈의 성공과 실패를 종합해 계산하면 시민들은 다음과 같은 인물을 선호한다. 국회의원보다 덜 투쟁적이고 더 포용적인,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1인’으로서 뚝심 있게 과감한 정책을 도입하면서 재정 건전성을 지킬 수 있는 ‘전문가’이다. 게다가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는 동시에 이 사람 저 사람이 자신의 편으로 여기고 싶은 비당파적 인물인 것이다. 이런 사정에 가장 부합하는 이가 바로 안철수와 박원순이었다.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후보직을 양보하고 이제 대선 주자 1위까지 차지하면서 ‘탈정치의 정치’는 대세가 되었고, 국민이 좋아하는 대통령 캐릭터까지 변하고 있다. 정당정치는 시민정치가 아니라 ‘인물정치’에 패배했다. 안철수는 의사이자 경제전문가인 박경철씨와 함께 ‘스펙’이 지배하는 세상에 찌든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다녔다. 위안은, 그들의 당당한 ‘스펙’에서 나왔다. 박원순도 매한가지다. 그만한 스펙을 가진 시민운동가가 몇이나 있는가. 총선시민연대를 지휘하고 아름다운재단으로 쌓은 덕망과 이력 없이 민주당 후보를 누르긴 버겁다.
‘스펙정치’에서 가장 불리한 쪽은 작금의 통합 및 연대 흐름에서 소외되거나 벗어나 있는 ‘독자적 좌파’다. 박원순 효과나 안철수 현상은 이들에게 절망적 질곡으로 닥쳐온다. 진보신당, 사회당, 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 안에서 야권 단일 후보가 될 만한 대중 정치인은 없다.
미지의 영역 찾아 과감한 기획해야
지지율은 차라리 둘째 문제다. 세상의 냉혹함은 변변한 조직력과 자금력 없이 힘겹게 바닥을 기어왔던 당 활동가, 정치지망생들을 그들의 보람과 신념까지 위협하며 괴롭힌다. 박원순과 안철수는 중립적 시민운동이나 전문적 영역에서 종사하다가 적시에 정치판에 뛰어드는 선례를 굳히고 있다. 젊어서부터 정당에 몸담아온 활동가는 알아주지 않는 바보꼴이 된다. 그러잖아도 떠나간 명망가를 향한 배반감이 도사리는 판국에, 만일 명망가가 비운 자리를 새로운 명망가를 양성하거나 발굴해 채우는 일에 조직적으로 사활을 걸게 되면, 많은 활동가들의 소외감은 짙어만 갈 것이다.
지방자치 정책에 관한 좌파의 오랜 숙원은 박원순의 공약에 녹아든 상태다. 하지만 좌파는 박원순을 지렛대로 삼을 수도 없다. 한국 지방자치의 재량권이 낮은 탓에 좌파의 지방자치 정책은 애초부터 전복적이지 않았다. 다른 쪽에서 하지 않는 정책을 선점해 차별성을 선전하는 정도랄까. 그러나 지난해 당선된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들이 이미 학교 무상급식, 주민참여 예산제, 작은 도서관, 대형마트 및 SSM 규제 등을 선도하고 있다. 좌파가 다른 ‘개혁진보’와 가장 도드라지게 다른 ‘노동’에서도 그렇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나 고용안정기업 우대제도를 추진할 전망이다. 거기에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 또는 야권 통합 정당이 한-미 FTA 폐기와 비정규직 차별 폐지를 이마에 두르게 된다면?
독자적 좌파 및 녹색파는 ‘박원순’으로 흡수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찾고, 과감한 기획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미래정치사’는 그래봐야 2012년까지다. 민주주의의 역주행과 그것이 초래한 야권 대통합의 회오리는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서 비롯되었고, 추세는 이명박 정권의 퇴장과 함께 바뀔 수밖에 없다. 민주당 및 야권 연합이 대권과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든 한나라당이 다시 정권을 잡아 야권이 무기력과 허무에 빠지든, 박원순이 재선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기회는 올 수 있다. 기회를 살리는 일은 물론 기회를 포착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그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한다. 이왕이면 늠름하게.
글 / 김수민 구미시의원
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 구미풀뿌리희망연대, 민주노총 경북일반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다.